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12)화 (112/164)

112화. 가장 위대한 것

2021.03.29.

"……내가 너희들의 왕인 거야?"

[그랬다.]

"그랬다고?"

[그대, 사랑하는 것 너무 많았다.]

[우리의 왕만 되어주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알리시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시커먼 검은 털을 가진 짐승들은 보기 좋은 외형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몇 번 봤다고 두렵진 않았다.

[우리, 인간의 소통 방식 배웠다.]

[그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연습했다.]

[정말로 모르나?]

마물들이 보내는 집요한 시선은 확실히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칭찬을 바라듯 기대 어린 눈들을 보고 있으니 어린 아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비유라는 걸 알지만, 그들의 존재가 어미새를 향해 소리 내는 아기새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너희들이 내게 바라는 걸 모르겠어. 하지만-."

[옆에 있고 싶다.]

[그거면 된다.]

[버려지고 싶지 않다.]

[분명 약속했다.]

"옆에 있기만 해도 된다고? 고작?"

알리시아는 거짓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번뜩이는 눈들은 진심이었다.

[항상 바랐다. 그대 옆.]

[함께하고 싶었다.]

[그대 돌아봐주지 않았다.]

[기다렸다. 항상.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마물들이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말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어눌한 말투와 어조는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나는 역시 너희들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겠어."

[노력한다.]

[이해할 수 있다.]

[그대 원하는 거 한다, 우리.]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변명하듯이 꼬리가 줄줄 달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다시 알리시아가 외면할까 봐.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면, 날 도와줄 수도 있어?"

[우린 그대 돕지 않는다.]

[그대 명령하면 된다.]

[그대 명령하고 우린 따른다. 그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 몸을 고치는 것도 가능해?"

마물은 원체 몸이 튼튼했다. 자신이 정말로 마물의 왕이라면, 자신에게도 강인한 육체를 얻을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

[그대 몸 고쳐?]

[고칠 필요 없다.]

[그대, 안 아프다.]

"아냐. 난 아파."

알리시아는 소매를 걷어 앙상하게 마른 팔을 내보였다. 삐쩍 마른 팔은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소원을 빌었어. 그리고, 그 대가로 내 수명을 잃었지."

[수명?]

[대가?]

"이제로라면 나는 죽을 거야. 그래서 너희 도움이 필요해. 내 힘의 근원이 너희라면, 해답도 너희에게 있을 거잖아."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 아프지 않다.]

"그럴 리가."

[그저 깨졌을 뿐이다.]

마물 하나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알리시아는 흠칫 놀라면서도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마물은 몇 번이고 킁킁 알리시아의 냄새를 맡고는 도로 몸을 세웠다.

[많이 깨졌다.]

"깨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릇이 깨졌다. 그래서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좀 더 설명해줬으면 해."

마물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힘 우리와 다르다. 가장 위대한 것이다.]

"가장 위대한 것?"

[그대의 힘이다. 그대를 해칠 리 없다. 대가도 없다.]

"……대가가 없다고?"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마물의 말과 달리, 핏기 없는 손은 여전히 그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대 힘 거대하다. 그런데 담는 그릇이 작다. 그래서 깨졌다.]

"그릇……."

[할 수 없다. 인간의 몸. 나약하다. 한계 있다.]

마물의 두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당사자인 알리시아보다 오히려 마물 쪽이 더 슬퍼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면, 그릇이 깨지면? 깨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죽는다.]

"뭐?"

당황한 나머지, 혀를 씹을 뻔했다. 하지만 정작 마물은 태연하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괜찮다. 그대 진짜 죽지 않는다. 죽는 건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

[그대 약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강하고 위대하다. 인간의 탈 벗으면 그렇게 된다.]

"그 말은 더는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야?"

[다시 위대한 자가 된다.]

마물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위대한 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데?"

[이 땅을 떠나야 한다. 원래 그대의 것이었는데 빼앗겼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 그게 약속이다.]

"……."

[하지만 괜찮다. 우리 늘 그대 곁에 있는다.]

마물이 위로하듯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알리시아에게 닿지 못했다.

"나는 계속 이곳에 있고 싶어."

[어째서? 인간, 나약할 뿐이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그자?]

[아이?]

"둘 다."

알리시아는 가슴 위로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지금이 좋았다. 더는 카벨레누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대 변함없다.]

[여전히 인간 사랑한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역시, 인간 부럽다.]

[인간 없었으면 좋겠다.]

위험하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질투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동자는 위협적이었다.

[밉다, 인간.]

[그렇지만 할 수 없다.]

[과오 이미 저질렀다. 그래서 벌 받았다.]

[같은 실수할 수 없다. '그자'처럼 될 순 없다.]

활활 타오르던 눈에 힘이 빠졌다. 알리시아는 금세 꼬리를 만 짐승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날, 도와줄 거야?"

[말했다. 우리, 그대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따를 뿐이다. 마물들이 웃었다. 주둥이가 긴 짐승의 구강 구조상 웃는다는 표현 자체가 이상하긴 했지만, 적어도 알리시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16638396297814.jpg

* * *

"슈바르한에 마물이 나타났고?"

"네. 그래서 지금 다들 그 이야기로 시끌벅적합니다. 재앙의 징조라고요."

"그 아이의 소행인가보군."

제르페누스의 미소가 진해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았다. 카벨레누스의 핏줄은 특별했다.

"정말로 아이가 마물을 부리는 힘을 타고난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물들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지. 분명 성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펠시온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 번 둥지를 털린 맹수는 더욱 예민하고 경계가 심해졌다. 몇 번이고 정보를 캐내려고 시도했지만, 변변히 철옹성 같은 경계에 실패의 쓴맛만 맛봤을 뿐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생각 이상으로 지키는 걸 잘하신 덕분이지."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다. 두고 보실 겁니까."

"아이의 힘이 확인되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턱을 괬다. 정면 승부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 취향은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결점 없는 걸 좋아하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쪽이 유리해질 거야."

"하지만 저희에게는 족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직접 움직일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리 병사들을 잘 교육했다 한들, 슈바르한에게 최고의 이름이 붙은 건 내 아우님의 힘이잖나."

제르페누스는 지도에 놓인 말들을 천천히 옮겼다.

"탈린과 헤이넌, 그리고 케인 지역에 있는 연구소를 개방하지."

"실패작들을 풀어놓으실 겁니까?"

"쓸모없는 실패작들이지만, 공포를 심어주기엔 나쁘지 않지. 워낙 세상이 흉흉하잖나."

제르페누스의 눈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교단에서 만든 가짜 마녀가 제국 온 지역을 쑤시며 재앙을 일으키고 있었고, 마침 슈바르한에선 마물이 나타났다. 끊임없이 각 지역에서 호소가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니, 조금만 조미료를 쳐도 금세 불길이 번질 것이었다.

"평생 신의 뜻에 놀아났는데, 이제 우리도 신의 이름을 써먹을 때가 되었지."

"하지만 저희는 신전보다 명분이 부족합니다."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더군."

"이미 조사해봤지만, 그자는 가짜입니다."

펠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사기꾼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신전의 가짜 마녀들을 처리하는 것만 봐선 제법 솜씨가 좋을지 몰라도, 그자들이 신의 뜻을 운운하는 사기꾼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지."

제르페누스는 수북하게 쌓인 신의 대리자에 대한 보고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중하게 모셔와. 우리도 어디 한 번 충실한 신의 종노릇 좀 해보자고."

그리고, 드디어 손에 넣는 거다. 제르페누스는 검은 말을 툭 쳐서 넘어드렸다. 말에 슈바르한을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얼른 못된 마녀를 죽이고 왕자를 구해야지."

"하지만 저희 측에서 움직이면 신전 측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나. 신전도 함께 움직여야지."

물론 슈바르한에서 돌아오는 건 우리 쪽뿐이겠지만.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입술을 핥았다.

"신의 대리자를 신전에 넘기고, 마녀 사냥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으면 신전 측에서 군대를 움직이기엔 충분하지."

"대신관이 성급히 움직일까요? 괜히 자극하지 않으려는 건 신전 측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안 되면 움직이게 만들면 되지."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신전 측에 아이에 대한 정보를 흘려."

제르페누스는 오만하게 웃어 보이며,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확실하게 부각해.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늙은이의 마음을 제대로 자극할 수 있게끔 말이야."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신전 측에선 아이를 놓지 않으려고 할 텐데요."

펠시온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만은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탐욕스러운 늙은이는 누구보다 청렴해야 하는 대신관 자리에 있음에도 한 번 손에 쥐면 놓는 법을 몰랐다.

"그만큼 선봉에 서려고 하겠지. 맨날 뒤로 빠지는 노인네가 답지 않게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올 거야."

"둘을 먼저 붙이시려는 거군요."

"배부른 신전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든."

제르페누스는 자신만만하게 턱을 추켜올렸다. 평생 황실을 찍어누르고 명령해온 헤르만은 항상 승자였다. 황가의 사냥개가 얼마나 강할지 걱정하기보다는 당연히 승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형적인 특성까지 더해지면 슈바르한 군은 정말로 강할 거야. 그렇게 되면 상황은 자연스럽게 신전 측에게 불리해질 거다."

"그때 저희가 움직이면 되겠군요."

"신전이 제아무리 불리하다 해도 카벨레누스 역시,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없지. 그때, 우리는 준비한 개들을 풀면 돼."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잡아먹고 내 것을 찾아오면 되는 거지. 제르페누스는 검은색 말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는 병사들로 훌륭한 사냥개로 변모했지만, 역시 만족하기에는 부족했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당연히 최고를 가져야 했다.

1663839629781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