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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1)화 (111/164)
  • 111화. 마물을 부리는 자

    2021.03.25.

    "혹시 몰라, 병사들을 대기시켜두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가제프는 손질한 검을 카벨레누스에게 건넸다. 카벨레누스는 마치 가늠하듯 검 손잡이를 몇 번이고 쥐었다가 폈다. 수도 없이 잡아본 검이지만, 어쩐지 오늘의 검은 무겁게 느껴졌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정말로 마물이 나타나는 겁니까?"

    "응. 분명 올 거야."

    알리시아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이미 한 번 그들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날도 그랬거든."

    "그날이요?"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가제프는 눈을 찡그렸다. 솔직히 여리해 보이는 여자와 마물은 어울리는 썩 조합이 아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만 보면 이 자리에서 알리시아가 쓰러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8년 전, 내가 슈바르한을 떠났던 그날 말이야."

    "8년 전이라고 하시면……."

    가제프는 말을 멈췄다. 그 해, 사라진 건 알리시아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마물들도 전부 모습을 감췄다. 알리시아와 마물 사이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가제프는 의문을 뱉기보다는 삼키기로 선택했다. 충직한 신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가제프는 살짝 뒤로 물러난 채,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보는 게 더 이상했다.

    "이모님께서 지켜봐주실 겁니다."

    "……."

    "전부 잘될 겁니다."

    "……고마워, 항상."

    가제프는 미소로 화답한 후, 자리를 떴다.

    "클라우드 경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모르코 부인을 많이 닮았지."

    "맞아요."

    알리시아는 싱긋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든든하네요."

    "그러면 다행이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깍지 낀 손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시작할게요."

    눈을 감고 있으니, 손안의 온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잇새로 미처 나오지 못한 숨을 잔잔히 뱉으며 손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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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카벨레누스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이기며 알리시아의 안색을 살폈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알리시아는 미동도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처음 그대로 자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

    혀끝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지고서야 카벨레누스는 입술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거친 숨을 뱉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이쯤 되니 초조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마치 시체를 연상케 했으니까. 그녀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숨을 참아가면서까지 그녀의 소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입안의 피맛이 더욱 진해졌지만, 사내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는 속이 쓰렸다. 그녀를 대신해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어때요?"

    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평소에도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걸 좋아했지만, 지금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양 머리가 띵했다. 도저히 여자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물은 반응이 없나요?"

    돌아오지 않은 답에 알리시아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알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방 안에는 카벨레누스와 자신, 둘뿐이었다.

    "실패했나봐요. 다시 한번 해봐야…… 입술이 왜 그래요?"

    겨우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바라본 알리시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그저 멍하니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피가 나잖아요."

    알리시아의 표정이 못내 사나워졌다. 가만 보면 사내는 자신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입술을 깨무신 거예요?"

    "……향기가 나."

    "네?"

    차마 입술은 만지지 못하고 그 위만 맴돌던 손이 그대로 잡혔다. 알리시아는 끔벅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절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평소와 달랐다. 잠에 취한 양 몽롱했다.

    "눈이 풀리셨어요."

    "내 눈이 어떤데?"

    카벨레누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당신 지금-."

    "당신보다는 이름을 불러줬으면 싶은데."

    "네?"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대가 불러주는 내 이름."

    알리시아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뭔가 카벨레누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열이 올랐다. 눈웃음을 흘리며 매달리는 사내는 지나치게 요염했다.

    "그대에게선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나."

    "저는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아냐. 향기가 가. 내겐 느껴져."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하며 알리시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코를 훅 찌르는 여자의 향기가 너무 진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이대로 잡아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카벨레누스와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카벨레누스."

    "……."

    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른 탓인지, 사내의 눈은 아까보다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괜찮으세요?"

    "미안하지만, 잠시 떨어져야겠어. 그대에게서 나는 향이……."

    "향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벨레누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벨레누스는 남은 손으로 자신의 코를 가렸다.

    "아무래도 마물의 피 때문인 것 같아."

    "그러면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봐요."

    아무런 소득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

    "할 말이 있으면 해."

    "혹시 괜찮으시면, 한 번 더 해봐도 괜찮을까요?"

    알리시아가 결의에 찬 얼굴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다면 충분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마물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참기 힘드시면 나가 계셔도 괜찮아요. 저는 혼자서도 괜찮아요."

    혼자 남기 싫다는 표정이면서. 카벨레누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잡힌 손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을 알면 결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최대한 참아보지."

    카벨레누스의 대답에 알리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신호를 보내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신호를 너무 약하게 보낸 것 같거든요."

    알리시아는 재빨리 눈을 감고 집중했다. 질질 끌면 카벨레누스만 힘들 뿐이었다. 차라리 한 번에 빠르게 끝내는 편이 나았다.

    '이리와. 나는 여기에 있어.'

    굳게 다물린 알리시아의 눈꺼풀이 떨렸다. 마물을 부르는 데에 대단한 주문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필요로 하면 그들은 나타났다. 8년 전, 그날 마물이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바랐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불렀다, 그대. 우리.]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알리시아는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도 마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알리시아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마물이 왔어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떴다. 드디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무슨 목소리가 들리지?"

    카벨레누스는 더욱 짙어진 향기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의 말과 달리,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제가 부른 걸 기뻐하고 있어요. 한둘이 아니고…… 어?"

    일순간 알리시아의 동공이 커졌다. 한꺼번에 흘러들어온 음성들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에 시야가 멋대로 흔들리고 속이 매슥거렸다.

    [우리의 왕.]

    [위대한 자.]

    [드디어 찾는다. 우리를.]

    "아아……."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귀를 막았다. 하지만 음성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귀를 막아도 짐승의 울음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알리시아?"

    알리시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카벨레누스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하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시아!"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카벨레누스가 멈추는 순간, 줄이라도 끊어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안 돼……."

    카벨레누스가 허탈한 숨을 뱉었다. 초점 잃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거칠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가제프가 벽을 짚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모양인지 그는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물입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엄청난 수의 마물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물?"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녹슨 기계처럼 삐거덕 돌아갔다. 가제프는 붉은 핏줄이 선 카벨레누스의 눈을 마주하고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품에는 알리시아를 안고 있는 카벨레누스는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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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리했다, 그대.]

    [힘이 약해졌다.]

    [깨져 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알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펼치진 풍경은 그녀에게 있어선 익숙한 것이었다.

    "여기는……."

    [그대의 무의식이다.]

    [그리고 우리 머문 곳이다.]

    "……여기서 머물렀다고?"

    알리시아의 시선이 소복하게 쌓인 눈을 지나 처참할 정도로 산산조각 난 마차에 닿았다. 마차를 시작으로 핏자국이 새하얀 눈 위로 얼룩덜룩하게 번진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내리는 눈에 핏자국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다가 영영 사라졌다. 불쑥 튀어나온 마차 잔해들만 아니었다면 끝없이 펼쳐진 설원은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화로워 보일 뿐이었다. 눈앞의 풍경은 다름 아닌, 8년 전의 그날이었다.

    [그대가 바랐다. 우리 머물러 있는 것.]

    [우리는 따른다.]

    [그래도 외로웠다.]

    [필요하다. 우리. 그대.]

    [우리는 항상 기다렸다.]

    한마디만 하면 너도, 나도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알리시아는 절 보고 있는 무수히 많은 눈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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