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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0)화 (110/164)
  • 110화. 마물의 왕

    2021.03.22.

    "……괜찮나?"

    카벨레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갈증이 치밀었지만 제 욕심껏 굴기엔 손 안의 앙상한 팔이 마음에 걸렸다.

    "살짝 곤란하긴 하네요."

    "미안, 참았어야 했는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겨우 버티고 있는 여자였다. 무리시킬 생각은 없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바라봤다가 그대로 굳었다. 사내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욕망은 사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한 번 자극받은 본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눈물로 젖다 못해 발갛게 물든 눈가를 핥고 싶었다. 새하얗고 가는 목을 씹으며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카벨레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칼로 난도질당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해.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 아니야."

    "그럼 당신은요?"

    "나는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다가는 정말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알리시아와 떨어져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 먼저……."

    손이 잡혔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절 원하신다면서요."

    "그대 몸 상태를 뻔히 아는데 그딴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짐승도 그러진 않아."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걱정은 늘 하지."

    알리시아는 잡힌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보다 한참 큰 사내였지만, 카벨레누스가 별 저항 없이 따라 움직여준 덕분에 뜻대로 조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정하시네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지."

    카벨레누스가 힘없이 웅얼거렸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잡힌 손은 얼마든지 뺄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거야."

    "그럼 반대로 제가 원하고 있다면요?"

    "……."

    카벨레누스의 동공이 눈에 띄게 요동쳤다. 알리시아는 손목 안쪽 여린 살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예전의 카벨레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좋은 향이 나요."

    "……향수를 뿌렸거든."

    "그런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말할 때마다 뱉어진 숨에 살갗이 간지럽다 못해 등골이 오싹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진짜 좋은 냄새는 따로 있었다.

    "……자극하지 마."

    "저 안 부서져요."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탄식에 가까운 숨을 토해내며 쓰게 웃었다.

    "계속 절 보고 계시잖아요."

    "예뻐서 그래."

    "……."

    요부처럼 웃어 보이던 알리시아의 표정이 단숨에 무너졌다. 그녀의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카엘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인데 새삼스레 부끄러워하는군."

    "미카엘과 당신은 다르죠. 미카엘이야 워낙 절 좋아하고 따르니까……."

    "나도 그대를 좋아하는데."

    "……."

    손이 맥없이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사라진 온기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예쁘게 물든 알리시아의 얼굴을 깨물고 싶은데, 그 정도로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대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아, 아무래도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바쁜 일이 있으신 거잖아요?"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부끄러운가?"

    "아무래도 저는 미인도 아니고……."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이가 멋모르고 하는 말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사내가 뱉는 말은 무게부터가 달랐다. 애당초 미인에 가까운 건 자신보다 카벨레누스 쪽이었다. 따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결 좋은 머리카락도,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 하며, 날렵한 코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런 상대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들어봤다 얼굴만 홧홧해질 뿐이었다.

    "예전에는 그대의 머리카락을 보며 녹슨 쇠를 떠올렸어. 초라하고 볼품없는 색이라고. 정말로 편협한 생각이었지."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쥐었다. 붉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이제는 초라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대의 머리카락은 녹슨 쇠가 아니라, 노을을 닮았어. 아주 예쁜 색이야. 태양 아래에 그대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해."

    "……."

    "그대 눈도 마찬가지야. 색이 옅어서 빛의 각도에 따라 여러 색을 띠지."

    "……."

    "신기하게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전부 그대를 닮았어. 보면 볼수록 예뻐."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카벨레누스의 목소리는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부들부들하지 않았다. 오히려 높낮이가 일정한 어조는 담백하다는 느낌까지 줬다. 하지만 그렇기에 열이 치밀었다. 당연한 것을 말할 뿐이라는 듯 덤덤하게 뱉는 목소리는 진심이었으니까.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다시 카벨레누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역시, 같이 있는 편이 좋겠어요."

    "내 인내심에는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싫으세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거울을 볼 수 없는 여자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겠지.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물면서도 알리시아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채 가라앉지 않은 열에 여전히 붉게 물든 여자의 눈가에 침이 고이고 있었음에도 마른 몸을 더듬으며 겨우 이성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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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쉬도록 해."

    "계속 옆에 있어주실 거죠?"

    "원한다면 얼마든지."

    카벨레누스의 손이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알리시아는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카벨레누스의 손에 이마를 댔다. 어리광을 부릴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카벨레누스에게 미안하지만, 이렇게서라도 사내의 감정을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애정을 곱씹고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확신해야만 안심이 됐다. 카벨레누스가 원하면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역시, 그림보다 진짜가 좋네요."

    "당연하지. 그림으로는 이런 건 못 하잖아."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을 맞추려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멈췄다. 어느새, 알리시아의 등에는 미카엘이 고목의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아……."

    웅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괜히 못된 짓이라도 하다가 걸린 기분이었다.

    "히히, 엄마 냄새 좋아……."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지도 모른 채, 미카엘은 배시시 웃으며 더욱 알리시아에 달라붙었다. 다행히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침실을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카벨레누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이는 깨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깨졌다.

    "저는 셋이 함께 있는 것도 좋은 걸요."

    "확실히 내 인내심을 늘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긴 하지."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알리시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검지로 살살 카벨레누스의 주름을 폈다.

    "저, 살 거예요. 살아서 당신과, 그리고 미카엘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요. 그걸 위해선 뭐든 할 거예요."

    "……."

    카벨레누스는 멍하니 알리시아를 바라보다가 결의에 찬 눈을 마주하고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만 괜찮다면 마물을 이곳으로 부를까 해요."

    "마물을 부른다고? 어떻게?"

    "뭐라고 설명하기에 애매하긴 한데, 짐작 가는 방법이 있긴 해요."

    알리시아는 눈을 내리깐 채, 마물을 만났던 순간을 되짚었다. 경황이 없긴 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지 않았다.

    "마물이 말하길, 제가 원한다면 마물들은 슈바르한 어디에서나 제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 게 가능하다고?"

    "시도해봐야 알겠지만, 그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 이르지만, 그들에겐 저희가 원하는 답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답과 그대의 몸을 고칠 방법이 관련 있는 건가?"

    "제 몸뿐만 아니라, 당신이 가진 마물의 피를 없앨 방법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나는 상관없으니 그대의 몸부터 챙겨. 지금은 다른 것보다 그대의 몸이 가장 우선이야."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말했다.

    "다정하시네요."

    "그러려고 애쓰는 거지."

    "그래도 당신이 다정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제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렸지만 알리시아는 오히려 그의 행동에서 답을 찾았다. 역시 이번에도 그는 모른 척해주고 있었다. 의문을 품고 의심하는 것 대신, 자신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이미 당신이 눈치채셨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알리시아가 빤히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카벨레누스는 따가운 시선에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니잖아. 그대도 그저 생각만 하는 일이고."

    "저희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선 생각만 해선 안 된다는 걸 알 뿐이에요."

    "……."

    "8년 전 마물과 처음 마주쳤던 날. 저는 미카엘을 임신 중이었어요."

    그래서 착각했던 거예요.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떨렸다. 미카엘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짐승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지금껏 겪어온 일들을 떠올리면 당연히 마물이 노리는 게 미카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금 의문점을 하나둘 곱씹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는 마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미카엘은 그러지 못해요. 그래서 마물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고만 설명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

    "마물은 미카엘의 몸을 빌려서 제게 대화를 시도했어요. 그리고 미카엘이 제게 닿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고 말했죠."

    "……."

    "그래서 어렴풋이 알았어요."

    미카엘이 아니라는 거.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사내의 행동에 용기가 났다. 어떤 순간이 와도 이렇게 손을 잡으면 전부 괜찮아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저 사내만큼 제 곁에 있을 테니까.

    "저였어요."

    알리시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입을 뗐다. 왕좌는 하나뿐이었다. 미카엘이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마물의 왕은 미카엘이 아니라, 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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