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09)화 (109/164)
  • 109화. 계기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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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혐오해요. 저는 그저……."

    "그저?"

    알리시아는 벅찬 숨을 참아내고는 그대로 카벨레누스의 손을 잡아챘다. 카벨레누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복도로 따라갔다. 알리시아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상처는 상처였다.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불안해서 의도와 다른 말을 했어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 오히려 진심에 가까울 수 있지."

    "……."

    "나는 괜찮으니 그런 눈 하지 마."

    "괜찮으시다고요?"

    알리시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혐오만 있는 게 아니잖아."

    "……."

    "나는 일부의 감정 때문에 전부를 잃고 싶지 않아."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확고한 대답이었다. 알리시아는 가만히 숨을 고른 채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사내의 반응이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카벨레누스가 정말로 마물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니까.

    "……역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알리시아는 결의를 다지며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물론, 날 떠나겠다는 말만 제외하고."

    "반대일 수도 있어요."

    "반대?"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신이 절 혐오할지도 몰라요."

    "그럴 리 없어."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끝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닐 수도 있어요."

    "그건 불가능해. 나는 처음부터 그대만 보고 있었는 걸. 당연한 것처럼 시선을 빼앗겼고, 결국 그대를 원하게 되었지."

    "그게 문제였다면요?"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은 건가."

    카벨레누스의 꽉 다문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알리시아는 되새김질하듯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실험체가 된 이후,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했죠?"

    "……그래. 맞아. 마물의 피에 익숙해질수록 점점 감정이 무뎌지고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게 변해버렸지."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제게 감정을 느꼈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카벨레누스는 더는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늘 그렇듯 그녀에게는 태양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당신과 마물이 닮았다고 한 건, 눈 때문이었어요."

    "눈동자의 색 때문이라고?"

    "아뇨. 그게 아니라, 시선에 담긴 감정이요."

    "감정?"

    "당신이 절 바라보는 것처럼 마물도 그렇게 저를 바라보았거든요."

    "……."

    눈가의 잔떨림이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알리시아는 무던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도 카벨레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도 아주 천천히 목소리를 짜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이상하지 않아."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회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시잖아요."

    "……."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지만 알리시아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애당초 상대는 눈치 빠른 사내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마물 때문에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거예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요."

    "내게 중요한 건 감정의 원인 같은 게 아니라, 그대야."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절 생각하는 만큼 저도 당신을 생각하니까요."

    "……."

    "당신은 이미 충분히 타인에 의해 멋대로 휘둘리며 살았잖아요. 그런 삶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 눈물이 차오른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잡고 있는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침묵하고 싶었어요. 적당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었어요. 지금의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서 그대로 안주하고 싶었어요."

    "……."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저도 같은 사람이 되잖아요.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거잖아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거칠게 저어 눈물을 털어냈다.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금세 시야가 다시 뿌옇게 물들었지만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는 이상, 저는 침묵할 수 없어요."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네. 알고 있어요."

    쉽게 나온 알리시아의 대답에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잦게 울렁이는 목도, 긴장해서 잔뜩 굳은 어깨도,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도 전부 그녀의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카벨레누스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잡힌 손 덕분에 알리시아가 안고 있던 스케치북이 손등에 닿아 있었다.

    "그대는 잔인해."

    "……."

    알리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벨레누스는 참다 못해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고작 스케치북 따위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여자는 짜증날 정도로 거슬렸다.

    "그리고, 너무나 강해."

    카벨레누스는 팔을 뻗어 알리시아를 끌어안은 채,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한 품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작은 여자는 항상 강했다. 대단한 힘도, 강인한 육체도, 뭐 하나 강한 구석이라고는 없는데도 그랬다.

    "굳이 들쑤시지 않아도 괜찮았잖아.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었잖아."

    "예전에 당신이 그랬잖아요.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카벨레누스는 말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봄볕만큼이나 따뜻한 미소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 괜히 목이 잠겼다. 알리시아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당신 안에 있는 마물의 피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물의 피를 없앨 수 있다고?"

    "마물의 피가 사라지면, 당신은 더는 마물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거예요."

    "……."

    "만약, 그날이 왔을 때 당신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게 된다면-."

    "계기일 뿐이야."

    거친 숨이 목덜미를 스치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물러날 구석은 없었다. 맞물린 손은 알리시아 혼자만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잡고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는 크든 작든 간에 계기가 있는 거잖아."

    "……."

    "마물의 영향일 수도 있어. 그대에게서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게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이 계기일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그런 건 다 계기일 뿐이야.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들고 알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눈물 자국을 따라 연신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계기는 그냥 감정의 시작이야. 그동안 쌓은 감정과 기억까지 포함하지 않지."

    "……."

    "그깟 계기가 사라진다고 해서 끝날 리 없어."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알리시아는 손을 꽉 눌러오는 사내의 가슴에 숨을 삼켰다.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거세게 울리는 심장 박동은 표정이 드문 사내와 어울리지 않게 제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그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서든 그대를 잡았을 거야."

    "……."

    "울고 매달리든, 비굴하고 추한 꼴을 보이든 간에 그저 그대의 감정 한 쪼가리라도 얻어내기 위해 안달 났겠지."

    눈물을 모조리 핥아 내린 사내가 도로 고개를 든 채 쓰게 웃었다. 새하얀 치아 사이로 보이는 혀가 지독하리만큼 붉었다.

    "그대는 항상 그대가 아쉬운 사람인 것처럼 굴지. 그대가 우리 관계의 약자인 것처럼 굴어. 그런데, 그거 알아?"

    먼저 손을 놓으려고 했던 사람은 항상 그대였어. 여자의 눈에 고인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고 사내 역시 다시금 얼굴을 내렸다. 얼굴을 더듬어내리는 입술은 탐욕스러웠고, 그와 동시에 절박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마물의 피를 없애지 마."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지금처럼 그대 곁에 남을 수 있겠지."

    "……."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토했다.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띵했다.

    "언제나 고민했어. 내가 그대에게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

    "나는 말주변이 있지도 않고, 남들과는 다르잖아. 하지만 그런 나라도 아는 건 있어."

    사내가 말할 때마다 거친 숨결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도장 찍듯 내려앉은 입술은 뜨거웠고, 마디 굵은 손은 움직일수록 깊게 파고드는 올가미처럼 집요했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길 바란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선택하지."

    "절 선택한다고요……?"

    "뭘 선택하든 그건 내 몫이잖아."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였다.

    "나는 나를 알아. 나는 지키는 것보다 망가트리는 게 더 익숙한 인간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앗아오고 필요하다면 뭐든 이용할 수도 있어."

    "……."

    "그런 작자가 하는 사랑은 솔직히 뻔할 거야. 제대로 된 것일 리 없지."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살짝 어긋났다. 스스로가 뒤틀려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험쥐가 되었던 그날부터 무엇이 답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내게 질릴 순 있어도 내가 먼저 관계를 정리하는 날은 없을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나는 이 순간에도 그대에게 입을 맞추고 싶거든."

    툭. 안고 있던 스케치북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멋대로 펼쳐진 스케치북에는 카벨레누스를 모델 삼은 스케치가 담겨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종이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저걸 그리면서 그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하지만 아무리 잘 그려도 그림은 그림일 뿐이야."

    "……."

    "그림 말고 그냥 진짜 날 원해줘. 저 정도로 만족하지 마."

    "……정말로 제가 그러길 원하세요?"

    "원해."

    겹쳐진 입술에 그대로 숨을 빼앗기며 절로 고개가 젖혔다. 허리가 잡힌 채 당겨졌고 성마른 손이 등을 쓸었다. 더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데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사내는 더욱 여자를 단단히 안았고 작은 손을 더욱 깊게 파고 들었다. 굳은살이 손가락 안쪽 여린 살을 스치고 도드라진 뼈마디가 살갗을 꽈악 누르며 완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숨 하나 제대로 뱉기 어려울 정도로 조급한 입맞춤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초조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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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성급하게 맞붙었던 입술이 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는 서로의 숨이 그대로 느껴졌고, 서로의 눈동자에는 서로만이 오롯이 비춰지고 있었다. 사내는 번들거리는 여자의 입술을 바라보며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그대를 원해."

    "……."

    "그대의 머리카락 한 올, 눈빛 하나, 심지어 작은 숨조차 오롯이 내 것이길 바라."

    그리고, 그대도 그랬으면 좋겠어.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서로의 숨이 뒤엉켰다. 굳은 살 배긴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귀 뒤 여린 살을 스치는 감각에 솜털이 바짝 섰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탐미하는 듯한 시선이 오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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