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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8)화 (108/164)
  • 108화. 웃고 있었다

    2021.03.15.

    "얼마나 그리셨어요? 어렵진 않으세요?"

    "……."

    "왜 그러세요?"

    알리시아는 빤히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에 앉은 카벨레누스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달라 보이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달라 보이는 거요?"

    "네."

    진지한 카벨레누스의 표정에 알리시아는 잠시 고심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뺨에는 옅은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단 당신 말투가 어색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모르겠다고요?"

    "네. 당신은 평소와 같은 걸요."

    알리시아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훤칠한 사내는 변함없이 잘생겼을 뿐이었다.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평소와 같아 보입니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

    카벨레누스는 손목에서 반짝이는 커프스 단추를 흘끔 내려봤다. 옷을 고르고 그에 맞는 커프스 단추를 달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건만, 알리시아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별로인 건가.'

    예전의 알리시아는 자신의 얼굴을 좋아했지만,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취향이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내는 조금 우울해졌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거예요."

    사내의 울적함을 알 리 없는 아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제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재촉하는 미카엘을 보며 연필을 집어 들었다. 우울해도 약속은 약속이니, 그림을 그리긴 해야 했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뭘?"

    "아무리 생각해도 아저씨보다 내가 더 잘 그리는 것 같아요."

    "……너는 어떻게 그렸는데."

    "이렇게요!"

    미카엘은 뿌듯한 얼굴로 안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잘 그렸네."

    "그쵸?"

    미카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중에 화가가 되면 되겠네."

    "나는 기사가 될 건데요?"

    "검도 못 들면서."

    "나중에는 들 거예요. 어른이 되면 힘이 세지잖아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카벨레누스가 지난 복도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끝마다 기사를 운운하던 아이는 진검을 한 번 쥐어보고는 말을 잃었다. 철을 두들겨 만든 검의 무게는 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휘두르긴커녕, 검을 쥐고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아저씨가 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내가?"

    "아저씨 말고, 가제프 아저씨요."

    미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할까 말까 고민됐지만 결심은 금세 섰다. 절 빤히 내려다보는 카벨레누스의 눈은 언제나 승부욕을 자극했다.

    "가제프 아저씨가 그랬어요. 나는 아저씨를 닮았다고."

    "……."

    "그래서 어른이 되면 키도 엄청 커지고, 되게 강해질 거라고요."

    미카엘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의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뭐, 날 닮았으면 약하진 않겠지."

    카벨레누스는 불만으로 가득 부푼 미카엘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만 놀려야지 싶으면서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괜히 장난을 걸고 싶었다.

    "뭐, 아저씨랑 비슷해지는 건 별로지만."

    "……."

    "……그런데, 진짜 강해질 수 있는 건 맞겠죠?"

    "강해질 거야."

    "진짜요?"

    기대 어린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움직여 아이의 눈꼬리를 살살 매만졌다. 반지르르한 아이의 두 눈은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구슬 같았다. 지나치게 맑아서 빤히 보이는 속내가 우스웠고, 동시에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자면 모든 게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물론 나보단 약하겠지만."

    "아니거든요! 내가 더 강해질 거거든요!"

    "그건 무리야."

    "왜요!"

    미카엘의 두 뺨이 더욱 빵빵하게 부풀었다.

    "네게는 선택지가 많으니까."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아이의 가는 목에 닿았다. 약한 것은 쉽게 부스러지고 망가졌다. 살아남기 위해선 누군가를 짓밟은 일은 흔한 일이었다. 처절한 삶을 살았던 사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절 보는 말간 눈만큼은 그대로였으면 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으면 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아닌, 더 나은 길을 걸으며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하루를 보냈으면 했다.

    "나한테 무슨 선택지가 있는데요?"

    "글쎄."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아저씨, 지금 나 놀리는 거죠?"

    "놀리는 거 아닌데."

    "그럼요?"

    "너는 나처럼 살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카벨레누스는 아이의 둥근 머리를 손으로 살짝 누르며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알리시아는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뭐든 좋아."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사내는 여전히 위로하는 데에는 자신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그리고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되고 싶은 게 있으면 돼."

    지키는 건 내 몫이니까. 카벨레누스는 절 보는 잿빛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알리시아가 들려주었던 오래된 이야기가 지금에서야 생각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정말로 힘이 있길 바랐다. 그래서 손안의 온기도, 마주보는 시선도 완벽하게 지켜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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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렇게 재잘거리더니 금방 잠이 드는군."

    카벨레누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잠이 든 미카엘을 침대에 바로 눕혔다. 눈 감은 아이에게선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묘했다.

    "아이들이 다 그렇죠."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케치북을 꼭 끌어안았다. 카벨레누스는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카엘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어도 들어줬을 겁니다."

    "……눈치채셨어요?"

    "모른 척하기에는 지나치게 티가 났거든요."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게나마 미소가 번졌다. 두 번째 소원을 운운하던 미카엘은 연신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 도와주신 거라는 거 알지만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도왔다고요?"

    "미카엘이 제게 아빠 소리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신 거잖습니까."

    "……."

    "……아닙니까?"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전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는 걸요."

    "여유가 없다고……."

    카벨레누스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알리시아는 황급히 한 걸음을 뗐다.

    "제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뭡니까?"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뭐든 하셔도 됩니다."

    "……."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카벨레누스의 오른쪽 눈썹 끝이 올라갔다. 알리시아는 손끝만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

    "말씀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야기는 언제든-."

    "미루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해요. 두려움만 쌓이고 쌓여서 결국 침묵할 뿐이죠."

    카벨레누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창백하게 질린 낯을 하고 있었음에도 알리시아의 두 눈은 곧게 빛나고 있었다.

    "차라리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저만 입을 닫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니까요."

    "……."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벨레누스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에 곧장 섰다.

    "괜찮습니다."

    "……."

    "제가 여기에-."

    "전처럼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알리시아가 다급히 카벨레누스의 말을 끊었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스케치북을 쥔 알리시아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가 경어를 쓰는 건 별로입니까?"

    "별로는 아니에요. 다만……."

    알리시아는 성급하게 심호흡을 했다. 각오했던 일이지만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말해주…… 아니. 말해."

    "역시, 그편이 좋네요."

    "……."

    "질책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그냥……. 조금……."

    알리시아는 말을 고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봤던 탓에 웃고 넘겼을 말투조차 신경 쓰였다.

    "괜찮습, 아니.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지금만큼은 예전처럼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요."

    저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저희 관계가 변함없길 바라니까요. 알리시아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사내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물이 그러했듯이.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는 거야."

    카벨레누스가 달래듯 알리시아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투박한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알리시아는 사내의 단단한 손을 겹쳐 쥔 채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내, 사내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저, 마물을 만났어요."

    "마물을 만났다고?"

    "네. 만났어요."

    "그들이 그대에게 해코지라도 했나?"

    카벨레누스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뇨. 그러지 않았어요. 오히려 호의적이었죠."

    알리시아는 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저었다.

    "호의적?"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이라기보다는 갈구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요."

    "갈구라니, 묘한 표현이로군."

    "집요한 시선이었어요. 오롯이 저만 바라보고 있는, 굉장히 맹목적인 시선이었죠."

    "두려워하지 마. 마물은 그대를 해칠 수 없어. 내가-."

    "당신과 마물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알리시아는 한 손으로 안고 있던 스케치북을 꽉 쥐었다. 스케치북 안에는 카벨레누스와 미카엘, 두 사람의 스케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대단할 것 없이 평범한, 하지만 그렇기에 지키고 싶은 일상의 모습들이었다.

    "미카엘을 임신하고 있을 때에는 몰랐어요. 제가 마물을 마주친 건 한 번뿐이었고, 그저 아이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경계를 했을 뿐이었거든요."

    "……."

    "하지만 이번에 보고 깨달았어요. 마물과 당신이 닮았다는 걸요."

    "……그래서 이제 와서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건가?"

    카벨레누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높낮이가 일정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카벨레누스를 상처 입혔다는 걸 깨달았다.

    "오해예요."

    "오해라고?"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알리시아는 급히 말을 삼켰다. 방에는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괜찮아. 변명하지 않아도 돼."

    "……."

    "이해해.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카벨레누스는 다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의 반응을 오해한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애써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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