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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7)화 (107/164)
  • 107화. 하고 싶었다

    2021.03.11.

    "그래서 언제쯤 두 번째 소원을 말할 건데?"

    "지금 재촉하는 거예요?"

    "맨날 미루니까 하는 소리지."

    카벨레누스는 불만을 내비치면서도 손으로는 자신과 미카엘의 접시를 바꿨다. 접시의 스테이크는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썰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완벽하게 생각해 왔으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뭐예요, 아저씨. 그렇게까지 나한테 그 소리를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

    "……."

    "왜?"

    잔뜩 인상 찌푸린 미카엘과 달리, 카벨레누스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미카엘은 포크를 입에 문 채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흘끔 카벨레누스를 흘겨봤다.

    "……아저씨는 안 부끄러워요?"

    "그럼 너는 부끄러워서 못 하는 건가?"

    "……그건 대답 안 할래요."

    미카엘은 입을 삐죽 내민 채, 포크로 고기 한 점을 푹 찍었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는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잘려 있었다.

    "그래서 소원은 뭔데?"

    "아, 그거요?"

    미카엘은 알리시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우리 같이 그림 그려요."

    "그림?"

    "네."

    "……쿠키 이후로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었군."

    예상 밖의 소원이 튀어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림은 한 번도 예상해본 적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하염없이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저씨는 그림 그리는 거 안 좋아해요?"

    "그림 같은 거 한 번도 그려본 적 없어."

    "잘됐네요."

    미카엘이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쿠키는 망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카벨레누스를 제대로 놀려줄 수 있는 기회였다.

    "……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아저씨도 그래서 날 놀리는 거 아니었어요?"

    "……."

    "어쨌든 소원이잖아요! 들어줘요!"

    "……다른 거로 대체할 순 없나?"

    카벨레누스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빠졌다. 하지만 대단한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눈에 잔뜩 힘을 준 아이는 양보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좋아. 대신, 잘 그릴 거라곤 생각하지 마."

    "굳이 잘 그리지 않아도 돼요."

    "그래야 네가 놀릴 수 있으니까?"

    "네."

    미카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때에는 아닌 척이라도 하는 게 어때?"

    "아저씨.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

    분명 알리시아는 저렇지 않은데. 카벨레누스는 눈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어머니인 알리시아를 닮지 않았다면,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말투를 고쳐야 하나 생각 중이야."

    "하긴, 아저씨는 고칠 필요가 있어 보여요."

    미카엘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일단 엄마한테 반말하는 거요. 엄마는 항상 아저씨한테 존댓말하는데 아저씨는 아니잖아요."

    "음, 확실히 그 부분은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긴 했지."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얼떨결에 두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알리시아는 당황해 눈만 껌벅거렸다.

    "그대가 말을 낮출래? 아니면 내가 높일까?"

    "네? 그건……."

    알리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발갛게 물든 여자의 뺨을 보니 예전이 떠올랐다.

    "그때,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이제는 제대로 정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부인. 은근슬쩍 덧붙인 단어에 알리시아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잘 익은 사과 같은 뺨을 만져보고 싶단 생각을 하며 슬쩍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 엄마예요."

    물론, 불쑥 끼어든 불만 어린 목소리만 없었더라면. 카벨레누스는 새 부리처럼 삐죽 입을 내밀고 있는 미카엘을 마주하고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네 엄마이면서 내 아내가 될 수도 있는 거야."

    "아저씨는 엄마랑 결혼 안 했잖아요."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당연히 결혼식을 올릴……."

    처음에는 당당하게 튀어나왔던 사내의 목소리는 점차 흐릿해졌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알리시아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나와 혼인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떨렸다.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둘 사이엔 아이도 있었다. 지금이야 할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곧장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 대답하지 마. 내가 뭘 실수했는지 알 것 같으니까."

    카벨레누스는 다급히 손을 들어 알리시아의 말을 멈췄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사내는 이제 제법 머리 회전이 빨라져 있었다.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던 거지?"

    "네?"

    "사과할게.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해."

    카벨레누스는 숨도 쉬지 않은 채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그에게 있어서 결혼은 형식적인 일이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 혹은 관계를 세상에 드러내는 제도라고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기준이었다. 알리시아는 생각이 다를 수 있었다. 그녀가 결혼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실망할 수 있었다. 사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내놓은 결론은 그것이었다.

    "제대로 준비해서 청혼할게.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아니. 감히 따라 하지도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네?"

    "혹시, 그대가 원하는 청혼이 있다면 얼마든지-"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재빨리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럼?"

    "그게……."

    알리시아는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어떤 청혼이든 상관없었다. 형편없는 청혼이라도 카벨레누스가 해준다면 기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카벨레누스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자신에게 청혼해줄 거란 확신이 없었다.

    "……아니면, 그냥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였나?"

    알리시아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카벨레누스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그것보다는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요."

    "갑작스러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 몰랐거든요."

    "……."

    어설픈 미소는 오히려 반감만 살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빤히 보다가 이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내 잘못이야. 우리 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단지 시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아닙니다."

    "……네?"

    불쑥 튀어나온 경어에 알리시아의 동공이 떨렸다.

    "시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미뤄두어서 이렇게 된 것이니 더 미룰 필요가 없지요."

    "……."

    "노력하기로 한 김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이 뭐든 간에. 카벨레누스의 눈매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사내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 꽂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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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가제프는 문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나와 있을 시간이었으나, 정작 카벨레누스의 방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가제프는 한참 더 주변을 서성이다가 결국 상관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곧장 돌아온 대답은 평소와 다른 바가 없었다. 가제프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습격이 있었던 겁니까?"

    "그럴 리가."

    "그런데, 방이……."

    가제프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금 천천히 방의 상태를 살폈다. 습격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된 방에는 온갖 옷가지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방의 주인인 카벨레누스는 달랑 바지만 입고 있었다.

    "뭘 입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곤란한 참이었는데 마침 잘 왔군."

    "네?"

    "이 둘 중 어느 것이 낫지?"

    당황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츠 두 개가 내밀어졌다. 가제프는 제대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흰색이 깔끔해 보이겠지?"

    "그게……."

    "……."

    "아, 아무래도 깔끔한 건 흰색이겠죠."

    가제프는 의문을 던지려다가 상관의 매서운 눈초리에 일단 오른쪽 셔츠를 가리켰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셔츠를 껴입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별로잖나."

    카벨레누스는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고는 도로 가제프 앞에 섰다. 가제프는 불만 어린 얼굴의 상관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훤히 열린 앞섬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맨가슴을 한 번 보고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단련된 몸은 솜씨 좋은 조각사가 깎아놓은 것처럼 완벽했지만, 같은 사내의 입장에선 썩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보면 모르나. 옷을 고르고 있지."

    "……옷이요?"

    가제프의 표정이 더욱 미묘해졌다. 카벨레누스는 치장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떤 옷을 들고 와도 격식에 어긋나지 않고, 크게 불편하지만 않는다면 시종이 준비해주는 대로 군말 없이 입었다. 옷들을 쌓아놓고 고르는 행동은 그답지 않았다.

    "제가 알기론 오늘 오전에는 아가씨와 도련님, 두 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중에선 어떤 게 낫지?"

    또다시 내밀어진 셔츠에 가제프는 하던 말을 삼켰다.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신이 충직한 부관인 이상, 의문을 품기보다는 카벨레누스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지금 입고 계신 셔츠가 더 낫습니다."

    "그런가?"

    카벨레누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셔츠를 던지고, 시종이 들고 있던 다른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전하께서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십니다."

    "고작 잘 어울리는 것 정도로는 안 돼. 완벽해야 하지."

    카벨레누스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어떤 목적으로 옷을 고르시는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유혹."

    "네?"

    더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심은 금세 무너졌다. 가제프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몇 번이고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덩달아 새하얗게 질린 시종의 얼굴을 보아하니 절대 착각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그럴 리가요."

    "사실이야."

    어떤 옷을 입고 거울을 봐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입었던 셔츠를 그대로 벗어 던지며 다른 셔츠를 집어 들었다.

    "시기가 좋지 않으니 생각할 틈이 없으셨던 게 아닐까요? 두 분이 다시 맺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그것보다는 내게 확신이 부족한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게 남편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던지.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결혼은 단순한 형식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기억은 사내의 머릿속에선 이미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사내는 진심으로 결혼이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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