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잊지 못할 순간
2021.03.08.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잘 됐군."
카벨레누스는 맞은편 소파를 턱으로 가리켰다. 가제프는 서류를 한 아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일을 완수한 것치곤 표정이 안 좋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추격대 대장을 맡았던 필립 경이 말하길, 죽이는 것보다 죽지 않게끔 애쓰던 게 가장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걱정되나 보지?"
"검은커녕, 붓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작자입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펜리르, 그자는 그 점을 좋아하던걸. 무능력한 자일수록 속이기 좋다고 말이지."
카벨레누스는 느긋하게 긴 다리를 꼬았다.
"로아킨의 꼬마 도련님을 믿어도 되는 겁니까?"
"괜히 제 위의 형들을 셋이나 죽인 게 아니야. 꽤 머리를 잘 굴려."
"남은 둘도 죽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벌써 하나는 다 죽어가더군. 그것도 머리가 타지에 머물고 있던 동안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숨을 뱉으며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문제가 없다는 건, 그 정도로 로아킨을 장악했다는 뜻이었다. 실없이 웃고 다니는 로아킨 꼬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따로 조사해볼까요? 안타깝게도 능력과 신뢰는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아니. 괜찮아. 솔직히 그가 배신할 것 같진 않거든. 다만……."
"계획에 걸리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계획은 나쁘지 않아. 수정할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기본적인 틀 자체가 좋은 편이었어."
카벨레누스는 별다른 동요 없이 대답했다. 티내진 않았을 뿐 펜리르의 계략을 듣고 감탄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듯한 꼬마의 제안은 젊은 만큼 과감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걸리시는 게 있으신 표정이십니다."
"티가 많이 나나?"
나도 이제 무뎌진 모양이군. 카벨레누스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짧게 조소했다.
"티가 많이 난다기보다는 익숙해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하를 섬겨왔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너와도 꽤 오래 함께했군."
"전하를 오래 모셔온 건 제 자랑이죠."
가제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딴 게 자랑이라니 자랑할 것도 더럽게 없나 보군."
카벨레누스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 절 살리셨을 때 생각했습니다. 제 목숨은 전하를 위해 쓰겠노라고. 그러니 전하를 위해 살아온 인생은 제게 자랑일 수밖에 없지요."
"내가 언제 널 살렸다고."
"당시 신입이었던 제가 전하를 모실 수 있었던 건, 제 위의 상관들이 줄줄이 전사했기 때문이었죠."
"……."
"사실 상관들이 죽었던 전장에는 저도 있었습니다. 상관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옴짝달싹 못 한 채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죠. 만약 그날 전하께서 절 구하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가제프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팔목을 매만졌다. 이제 막 군대에 입대한 청년은 젊고 열정이 넘쳤다. 뭐든 쉬워 보였고 영웅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여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자신의 상상이 젊은 날의 혈기에 불과하다는 걸 청년이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배운 것과는 달랐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적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무기 앞에선 절도 있는 검술은 의미 없었고, 처절한 비명과 살점을 베는 감각, 쏟아지는 피와 내장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항상 최고점을 받아왔던 아카데미의 우수한 인재였던 청년은 도망치는 한 명의 병사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압니다. 전하께서는 절 살리고자 했던 것이 아니셨다는 것도, 그저 적이 있어서 검을 휘두르셨을 거라는 것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딴 게 자랑이라고 말하는 건가?"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지만 제게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날, 도망치던 청년에게 수치는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동료를 등졌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쳐도 결국 전장 안이었다.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찾아오는 건 지독한 절망뿐이었다.
"전하께서는 절 공격하려는 병사를 베어내고 제게 그자의 검을 던져주셨습니다."
"……."
"그리고, 말씀하셨죠. 살고 싶으면 무슨 수를 쓰든 버티라고."
가제프의 시선이 자신이 입고 있는 제복에 닿았다. 청년은 이제 다른 어떤 옷보다 제복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햇병아리 시절 스치듯 지나간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전하께서 던져주신 검을 쥐었을 때, 제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고작 검일 뿐이야."
"하지만 제겐 커다란 의미가 되었죠."
가제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제프를 가만히 응시했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얼굴을 마주해왔지만 꼼꼼하게 얼굴을 살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동자 색이 갈색이었군."
"제 눈은 태어날 때부터 쭉 갈색이었죠."
"그랬겠지."
새카만 머리카락이 카벨레누스의 이마 위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금안이 평소보다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나는 네가 죽었을 때도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솔직히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하나?"
"전하께서 알아주시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전하께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가제프는 웃었고 카벨레누스의 눈은 더욱 가늘어졌다.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를 죽이면 그 얼굴이 떠올라 악몽까지 꿨었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턴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피가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죄책감은 무뎌졌고 나날이 덤덤해졌다. 어차피 적이든, 아군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죽여야 하는 목숨이거나,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의미를 부여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부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쫓는 맹목적인 시선을 다신 보진 못하는 순간이 오면, 저 미소가 떠오를 것 같다고.
"……내가 점점 나약해지는 모양이야."
"저는 나약해지는 게 아니라, 변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변해?"
"전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비슷한 경험이라…… 그렇군."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사내는 피투성이였던 여자를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니. 좋아."
카벨레누스의 말을 들은 가제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얹어졌다. 두려운 게 없던 사내는 이제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습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모두가 괴물이라 말하던 슈바르한의 늑대는 이제는 제법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의 상태만 괜찮다면 말이지."
"……아가씨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최악이야."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가제프는 두 손을 모은 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알아보곤 있지만 모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노이트라이라족은 이미 사라진 부족이라 알아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다른 정보처도 마땅치 않아 이젠 별의별 소문이나, 미신까지 조사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아직도 성과는 없나?"
"죄송합니다."
"눈에 띌 만한 정보도 없고?"
"그나마 기대할 만한 건 마물 쪽인데, 슈바르한 전역을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제프는 양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마물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거대한데다가 모습까지 기이한 짐승이었다. 이렇게까지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계속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일단 제가 계속해서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방도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
그저 시간이 없을 뿐. 카벨레누스는 눈을 내리뜬 채로 긴 숨을 뱉었다.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알리시아와 미카엘 앞에서는 일부러 티내지 않았다. 불안할수록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일상을 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잘라내지 않은 실밥처럼 계속해서 거슬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
"과연 내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
카벨레누스의 시선에 검에 닿았다.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말라가는 알리시아를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엄마. 자고 있었어? 나 눈사람 만드는 거 지켜봐준다고 했잖아."
"미안해. 엄마가 깜박 잠이 들었나봐."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정원을 뛰어다닌 덕분인지 아이의 얼굴은 발갛게 얼어 있었다.
"얼굴이 얼음장이네. 너무 밖에 오래 있었나봐.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면 안 돼?"
"왜?"
"아직 눈사람을 다 완성 못 했거든. 완성하고 들어갈래."
"다 만든 거 아니야?"
"아직 아니야. 완성하려면 엄마가 도와줘야 하거든."
미카엘은 들고 있던 당근을 내밀었다. 그제야 알리시아는 미카엘이 만든 눈사람에 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장식해도 되는 거야? 우리 아드님은 눈사람 코를 장식하는 걸 가장 좋아하잖아."
"당연히 괜찮지! 나는 엄마한테는 제일 좋은 것만 줄 생각이거든!"
"정말?"
"아저씨가 그랬어. 좋아하는 걸 티 내지 않으면 매일 후회할 거래. 그러니까 엄마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라고 했어."
"……아저씨가 그랬어?"
"응. 그랬어."
미카엘은 뺨을 비비는 알리시아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알리시아는 그런 미카엘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힘껏 끌어안았다.
"왜 그래, 엄마?"
"그냥 우리 아들이 너무 좋아서."
"나도 엄마가 좋아!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미카엘은 덩달아 알리시아를 꽉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눈을 감은 채 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자신을 향한 카벨레누스의 마음이 거짓이라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얼마든지 미카엘을 향할 수도 있었다.
"있지, 미카엘. 엄마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응? 무슨 부탁?"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었다. 알리시아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미카엘이 아저씨한테 부탁한 세 가지 소원 말이야. 그중에 하나만 엄마가 써도 될까?"
"응. 알았어."
"그렇게 쉽게 줘도 되는 거야?"
"엄마니까, 괜찮아. 소원 두 개 다 엄마한테 줄 수도 있어."
미카엘은 배시시 웃으며 알리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많은 것이 두려웠고 아무런 확신도 없었는데, 빠르게 뛰는 아이의 심장 박동 앞에선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자신이 어떤 답을 내려야 하는지 확실히 정해졌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높은 체온 탓일까,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혹한은 이제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