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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5)화 (105/164)
  • 105화. 어쩌면

    2021.03.04.

    "예상했던 것보다 대공 측의 추격이 거세군요. 까딱 잘못하면 죽을 뻔했습니다."

    펜리르는 낭랑하게 웃으며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당신은 지금 웃음이 나와?"

    "운이 좋았으니 자축할 만하죠."

    "운이 좋았다고?"

    제임스는 이를 악문 채, 왼쪽 팔을 들이밀었다. 그의 팔에는 화살이 깊게 꽂혀 있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펜리르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운이 좋은 건 맞죠. 팔보단 목숨이 소중하잖아요. 팔 하나를 내준 것으로 살아남았다 생각하면 남는 장사죠."

    "장사? 지금 그딴 말이 나와?"

    "이런. 너무 화내지 말아요. 어차피 당신은 상처를 치료해야 하잖아요. 하나 더 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죠. 물론 신관을 만나기 전에 화살은 제거할 필요는 있어 보이지만요."

    "화살을 제거한다고? 어떻게? 여긴 의사도 없잖아."

    "괜찮아요. 마침 제가 이런 일에 능통하거든요."

    펜리르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제임스는 펜리르와 자신의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신이 날 치료하겠다고?"

    "화살을 제거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죠."

    펜리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제임스의 팔을 잡았다. 제임스는 잡히지 않으려 발버둥쳤지만 단단한 손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소, 소독은……!"

    "여기에 소독약이 있을 리 없잖아요. 어차피 나중에 신관이 말끔하게 치료해줄 테니 일단 제거만 하죠."

    "불이라도 피울 순 있잖아!"

    "대공의 추격대가 근처에 있을지 모릅니다. 눈에 띌 만한 행동은 삼가야 하죠."

    "화살 같은 건 그냥 뽑으면 되잖아!"

    "제가 저번에 봤는데, 슈바르한 병사들이 쓰던 화살은 촉이 독특하더라고요. 막무가내로 잡아 뽑으면 그대로 살점이 뜯길 겁니다."

    펜리르는 태연히 대답하며 제임스를 제압했다.

    "아아악!"

    "고작 이런 거로 바들바들 떠시다니. 겁이 굉장히 많으시네요."

    "시, 시끄, 악!"

    "참으세요. 화살을 꽂힌 채로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우리는 모습을 숨겨야 하는 도망자들이니까요."

    펜리르는 제임스의 붉게 물든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고는 화살을 마저 제거했다. 화살을 제거하는 건 자주 해본 터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건, 꽥꽥 우는 사내의 비명이었다.

    "화살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제 귀가 먹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슈바르한에 머물 때는 그냥 헛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제국인들은 희멀건하니 싸우는 맛도 없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쪽이 너무 얼어 있는 것 같아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것뿐입니다."

    펜리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들고 있던 화살을 바닥으로 휙 던졌다.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당신은 슈바르한 대공이 무섭지도 않아?"

    "저는 대공의 비밀을 알고 있거든요."

    "……대공의 비밀?"

    "왜요? 궁금한가요?"

    펜리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제임스는 대답 대신, 펜리르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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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게 이럴 순 없습니다, 대공 전하. 저는 엄연한 손님이고-."

    "손님은 마중을 받지, 추격을 받진 않지."

    카벨레누스의 손짓에 병사들의 칼날이 목에 닿았다. 체르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선택해. 그쪽의 멍청한 도련님인지, 아니면 로아킨의 안위인지."

    "저는……."

    "참고로 나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아."

    카벨레누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체르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스스로를 뼈 굵은 무장이라고 여겨왔지만 슈바르한 대공 앞에 서니 무력감이 먼저 들었다. 마치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었다.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나서? 어떻게?"

    "펜리르 로아킨을 제 손으로 사로잡아 전하의 앞에 바치겠습니다."

    "그딴 건 제대로 된 거래라고 할 수 없지. 네놈도 그 애송이처럼 도망치면 그만 아닌가."

    "저는 로아킨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카벨레누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체르는 고개를 들어 드리워진 그늘 속 흉흉하게 빛나는 금안을 응시했다. 짐승의 것처럼 가는 동공은 슈바르한 대공의 악명을 더욱 그럴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시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대의 아들이 로아킨의 장군이라지? 그자로 하여금 멍청한 도련님을 추격시켜."

    "제게 아들 같은 건……."

    "소중한 걸 감추려고 하면 오히려 티가 나는 법이지. 뒷배가 없음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작자는 더욱 그렇고 말이야."

    "……."

    다 안다는 듯 날카롭게 빛나는 시선에 체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차피 로아킨 가문의 핏줄은 그대의 아들에게도 흐르지 않나."

    "……지나치게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체르는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이미 카벨레누스는 포식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기회라고 생각해. 어차피 갈등하고 있었잖아."

    "……."

    "어릴 적 주워서 기른 아이와 뒤늦게 나타난 친아들. 아이는 둘이지만, 자리는 하나이니까."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고상한 척 굴지 마. 어차피 한 번은 정하고 가야 할 문제였잖나."

    카벨레누스는 가제프를 돌아봤다. 가제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그대로 체르의 앞에 뿌렸다.

    "친아들의 정체를 아신 후, 꼬마 도련님 몰래 하신 일들이 많으시더군요."

    "……."

    "잘 선택하세요. 어차피 저희는 로아킨의 내분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것만 얻어 가면 그만이죠."

    "……."

    "저희가 원하는 바만 제대로 지켜주신다면야 계약자가 바뀐다고 한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체르는 멍하니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응시했다. 서류들에는 지난날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 * * 알리시아는 잠든 미카엘의 잠자리를 꼼꼼히 봐준 후, 침대 옆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숨겨진 방 안의 모든 글을 해석했고 하나의 책으로 엮었기까지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직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역시 그들을 직접 만나보는 편이 빠르겠지만…….'

    알리시아는 숨을 삼킨 채 애꿎은 책장만 만지작거렸다. 카벨레누스도 괜찮다고 말했고, 이제는 마물이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증거도 생겼다. 그럼에도 선뜻 그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물이 미카엘의 삶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지금껏 그녀가 항상 두려워했던 일이었다. 알리시아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미카엘이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간절한 바람만 품고 있을 수 없어졌다. 몸이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드는 날들이 많아지는 건 물론,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혹시나 누가 자신의 상태를 알까 두려워 이제는 걷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차라리 그의 족쇄라도 풀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이보다 더 몸이 나빠진다면, 카벨레누스의 족쇄조차 풀지 못하게 될지 몰랐다. 헛된 희망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알리시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고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살 거야. 어떻게서든 살아남을 거야.'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좋았다. 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닿았다, 드디어.]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마주친 금안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안 돼,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마."

    [해치지 않는다. 그럴 이유 없다. 그저 필요하다. 우리는. 통로가.]

    미카엘이, 아니 아이의 몸을 빌린 마물이 중얼거렸다. 마물의 목소리는 오랜 기억처럼 어눌했고, 동시에 쇠를 긁는 것처럼 기괴했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깨문 채, 미카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당장 미카엘에서-."

    [하지 마라. 명령.]

    "뭐?"

    [우리, 닿을 수 없다.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당장……."

    알리시아는 하던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카엘을 품고 있었을 때, 아이는 엄마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습을 숨겼었다.

    "……너희들, 내가 원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거였어?"

    [우리는 거스르지 못한다. 그대의 뜻. 우리, 약속했다.]

    "……."

    [이 아이는 우리의 피가 흐른다. 그래서 가능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대의 뜻을 따른다. 원하지 않는다면 닿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알리시아는 얼굴을 구겼다. 그 순간에도 마물은 그저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한순간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것은 지독하리만큼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알리시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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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알리시아?"

    "……."

    "왜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어."

    카벨레누스의 손이 뺨을 스쳤다.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그 손에 얼굴을 댔다. 사내의 손은 거칠었음에도 손길만큼은 변함없이 부드러웠다.

    "침대로 옮겨줄게. 피곤하면 더 자도록 해."

    "괜찮은데……."

    알리시아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벨레누스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하리만큼 수마를 이겨내기 어려웠다. 중노동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무리하지 말고, 미카엘이랑 같이 자."

    "……미카엘이요?"

    익숙한 이름에 몽롱해진 정신이 돌아왔다. 알리시아는 성급히 카벨레누스를 밀어내고 미카엘을 찾았다. 미카엘은 침대에서 쌕쌕거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꿈을 꾼 건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는데……."

    알리시아는 말을 하다가 문득 마주친 금색 눈동자에 그대로 굳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의 빛나는 눈동자는 마물을 연상케 했다.

    "알리시아."

    "……."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알리시아의 손끝이 떨렸다. 마물을 만났다고 말해야 했는데 어쩐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 어린 시선, 조심스러운 손길, 따뜻한 온기 무엇 하나 의심할 것 없이 애정이 서려 있었음에도 의심이 갔다. 마물과 마주했던 순간, 떠올랐던 생각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마물의 피 때문에 점차 감정을 잃어갔다면, 반대로 마물의 피 때문에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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