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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4)화 (104/164)

104화.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

2021.03.01.

"열심이군."

알리시아는 드리워진 그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마주친 시선에 싱긋 웃었다.

"죄송해요, 집중하고 있어서 오신 줄 몰랐어요."

알리시아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해석은 잘되나?"

"오래간만에 쓰는 언어라서 더디긴 해도 점점 속도가 붙고 있긴 해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무리하라고 부탁한 일이 아니야."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종이에 닿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적어 내려가던 종이에는 글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종이를 채운 알리시아의 글씨는 그녀처럼 깔끔하고 단정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늘었는 걸. 정말로 무리하지 않은 거 맞아?"

카벨레누스의 검지가 알리시아의 옆에 쌓인 종이 뭉텅이를 향했다. 쌓인 종이 뭉텅이는 전에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두께가 늘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해석하는 편이 낫잖아요. 무엇보다 여기서 얻은 정보들도 많고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벽면에 그려진 벽화를 바라봤다. 벽면에는 마물과 함께,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늑대 무리의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적힌 이야기는 프라임 신전에서 말하는 신화와는 너무 달라요."

"이상할 건 없어. 신전은 대대로 자신들의 입맛대로 이야기를 꾸며왔으니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그래도 이곳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기는 조심스러워요. 무엇보다 이걸 기록한 사람이……."

알리시아는 지금껏 써내려간 해석본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이곳에 적힌 내용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일기였다.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날것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급되어선 안 되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라임이 마물이라는 게 이상한가?"

"이상한 게 당연하잖아요. 그는 분명 신이었는데……."

알리시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찬양하는 대상과 혐오하는 대상이 같은 존재였다니, 프라임을 믿지 않음에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교단에서 신으로 추앙한 거지. 그리고, 따지고 보면 진짜 신도 아니었잖아. 신의 헌신일 뿐이었지."

"당신은 제국인임에도 지나칠 정도로 덤덤하네요."

"나쁜 이야기가 아니잖아. 교단에서 울부짖던 신 프라임이 마물이라는 사실만 알려도 교단의 입장이 어떻게 될지 뻔하니까."

"하지만 여기에 적힌 내용만으로는 의견을 모을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프라임 교단은 제국와 시작을 함께해왔다. 웬만한 주장으로는 그들을 무너트릴 수 없었다. 오히려 신성 모독이라면서 손가락질 받을 확률이 더 컸다.

"믿게 하면 돼."

"어떻게요?"

"마물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 되는 거지. 신전과 마물의 입장을 반대로 만드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한가요?"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콧잔등 주름을 살살 펴냈다.

"물론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마물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신 거예요?"

"만약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괜찮으시겠어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카벨레누스에게 마물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걱정 어린 알리시아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젠 괜찮아."

"하지만……."

"정말이야."

"……."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카벨레누스는 다른 말없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여전히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마물의 피는 좋아할 수 없었다. 남다른 힘은 사내에게 있어선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마물의 피 때문에 평범하게 살지 못했지만,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 그래서 알리시아와 만날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은 조만간 또 나타날 거야."

"그렇겠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그들이 우리의 아군인지, 아니면 적인지.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보다 단단히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자연스럽게 카벨레누스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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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애, 일찍 일어나셨군요."

"습관이 되어서요. 그런데, 경께서는 어디 떠나세요?"

"일이 생겨서요.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떠날 줄 알았는데. 펜리르는 우연한 만남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럼……."

"아, 물론 아예 떠나는 건 아닙니다. 꼭 돌아올 겁니다."

펜리르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주신 쿠키 말입니다.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

"입맛에 맞으셨나요?"

"네. 아주 맛있었습니다. 정말로 솜씨가 좋으시던 걸요."

"그렇게 대단한 솜씨는 아닌 걸요."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펜리르는 그녀의 미소에 더욱 신이나 목소리를 높였다.

"아뇨. 얼마나 맛있었는데요! 오죽했으면 주신 걸 다 먹고도 전하의 집무실에 있던 쿠키까지 욕심낼 정도였습니다."

"전하의 집무실에 있던 쿠키요?"

"네. 집무실에도 영애가 주신 것과 같은 쿠키가 있더라고요."

"아, 그건 제가 구운 게 아니에요."

"영, 영애께서 구우신 게 아니라고요?"

펜리르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만든 게 아니라고 하기엔 선물 받은 쿠키와 집무실의 쿠키는 모양이나, 맛이 거의 흡사했었다.

"네. 그건 전하께서 구우신 거예요."

"……전하께서요?"

괴상한 소리를 듣다니, 아무래도 귀가 이상한 모양이다. 펜리르는 무의식적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미카엘이 장난을 좀 쳤거든요."

"……정말로 전하께서 구우신 쿠키라고요?"

알리시아는 웃었지만, 펜리르의 표정은 단숨에 어두워졌다. 문득 카벨레누스 앞에서 쿠키에 대한 온갖 찬사를 쏟아냈던 것이 기억난 탓이었다.

"아무래도 재능이 있으신가봐요. 한 번 알려드렸을 뿐인데도 곧잘 따라하시더라고요."

"그, 그렇군요……."

펜리르는 애써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받은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슈바르한 대공이 쿠키를 만들고 있는 장면만 떠올려도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혹시나 입맛에 맞으시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또 구워드릴게요."

"정말이십니까?"

"굽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염치 불구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있다는 것이었다. 펜리르는 겨우 정신을 부여잡으며 눈을 빛냈다. 알리시아는 녹음을 연상케하는 사내의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펜리르가 맹주의 막내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에게 더 눈길이 간 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노이슈타인 공주였던 시절을 아는 이는 이제 드무니까. 펜리르를 볼 때마다 과거의 잔재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 사실을 굳이 티내지 않았다. 어차피 지난 과거이고 당시 펜리르는 무척 어렸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짧은 정혼을 기억할 리 없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보다는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쿠키는 얼마든지 구워놓을 테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영애의 쿠키를 먹기 위해서라도 그래야겠군요."

펜리르는 알리시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또 뵙는군요."

"……."

"감옥에 있다 보니 예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펜리르는 창살 너머로 보이는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감옥에 갇힌 사내는 더는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윤기나던 은발은 제멋대로 엉켜 있었고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핏발이 성성하게 서 있었다.

"……날 조롱하러 온 건가?"

버짐이 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떨 것 같습니까?"

펜리르는 얄궂게 웃었다.

"내 비참한 꼴을 다 봤으면 당장 꺼져. 네놈따위에게-."

"구해드릴까요?"

"……뭐?"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보란듯 열쇠 꾸러미를 내보이는 펜리르에 제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나가면, 어쩌라고. 나는 이제 화가로서 살지도 못할 텐데."

제임스가 두 팔을 들어 보이며 비아냥거렸다. 덜렁거리는 손으로는 이제 그 무엇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대공이 그런 겁니까?"

"그래. 그자가 그랬지."

제임스의 꽉 다문 잇새로 노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제 손의 힘줄을 끊던 카벨레누스의 모습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렇다면 더욱 나와야겠군요. 복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럼 계속 이곳에 있을 겁니까? 죽을 게 뻔한데도요?"

"……."

펜리르의 시선이 제임스의 손에 닿았다. 단순히 상처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상처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대공이 원하는 대로 되겠군요."

"……."

"더러운 감옥 안에서,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는, 그런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줄 수 있으니까요."

"……지금 나와 뭐 하자는 거지?"

제임스가 거칠게 발버둥쳤다. 하지만 쇠사슬로 칭칭 묶인 몸은 움직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구해드릴 거라고."

"네가 대공의 부하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런 척하고 있는 것뿐이죠."

펜리르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미소가 사라졌을 뿐인데, 사내의 얼굴은 단번에 날카로운 인상이 됐다.

"저는 로아킨의 맹주 팔라마르의 여섯 번째 아들, 펜리르 로아킨입니다. 그리고, 알리시아의 정혼자였던 사람이죠."

"……방금 뭐라고 했지?"

"놀라는 걸 보니 몰랐던 모양이군요."

"나는……."

"괜찮습니다. 이제 아셨으니까요."

펜리르는 열쇠를 사용해 문을 열었다. 제임스는 부쩍 가까워진 펜리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알리시아의 풀네임은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그녀는 한때 노이슈타인의 공주였던 몸이었습니다."

대공으로 인해 모든 걸 잃기 전까지만 말이죠. 펜리르는 제임스 쪽으로 몸을 굽혔다. 제임스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은 알리시아의 조국을 멸망시킨 것도 모자라, 그녀의 부모, 형제를 모두 단두대로 보냈죠."

"……."

"결국 그녀는 모든 걸 잃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모, 형제를 죽인 살인마와 함께 지내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그자에게 속으면서까지요."

펜리르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 와중에도 그는 미묘하게 변하는 제임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그런 대공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그의 마수에서 구하고 싶어요."

"……그런데, 왜 날 구해주겠다는 거지? 내가 대공한테 어떤 꼴이 되었는지 빤히 봐놓고?"

"저는 대공에게 복수할 만큼의 힘은 가지지 못했지만 어떻게 해야 복수할 수 있는지는 압니다."

"방법을 안다고?"

제임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저는 당신이 제 대변인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대변인이 되어달라고?"

"원래도 로아킨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 악감정이 더 심해져서 말입니다. 황제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펜리르가 유려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 보고 대신 황제에게 접근해달라? 웃기는군. 나는 귀족이 아닌, 평민이야."

"그 문제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당신을 귀족으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귀족이 될 수 있다고?"

제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획에 필요한 건 제가 다 준비할 겁니다. 의복이나, 신분,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요."

"……."

"망설이시는 건가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제임스의 적대 어린 시선에 펜리르는 그냥 대놓고 웃었다.

"왜 웃는 거지!"

"그럼 죽으실 건가요?"

"뭐?"

"거절한다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대공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많잖아요. 굳이 당신이 아니어도 돼죠."

당신은 아니겠지만. 펜리르는 유려하게 웃으며 제임스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한계에 몰린 인간을 내모는 것은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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