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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3)화 (103/164)

103화. 기회였다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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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끝나는데요?"

"지긋지긋한 문제들이지."

"나는 가끔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서류에 시선을 뒀다. 미카엘은 다시금 시작된 지루한 시간에 뾰로통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마나,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을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미카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 지키던 강아지처럼 쪼르르 튀어나갔다.

"아저, 어?"

미카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녹색 눈을 발견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슬프게도 방문객은 기대했던 가제프가 아니었다.

"……음, 안녕?"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카엘에 펜리르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눈치를 살폈다.

"드디어 왔군. 앉아."

"앉아도 되는 겁니까?"

"서 있는 게 편하면 그렇게 하고."

"아뇨, 편한 건 아닌데……."

펜리르는 흘끔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이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전하, 아이는-."

"미카엘이에요."

"어?"

"저번에 미카엘 누스라고 말해줬잖아요."

미카엘이 우울한 표정으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펜리르는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멋쩍게 뺨을 긁적거렸다.

"미안해."

"용서해드릴 테니까, 다음부터는 제대로 불러주세요."

"그, 그래."

자신이 왜 사과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펜리르는 일단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상황에 의문을 갖기엔 미카엘은 지나치게 울적해 보였고, 반대로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서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펜리르는 한 번 더 눈치를 살핀 후, 터덜터덜 걸어가는 미카엘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자리가 없으면 대충 옆으로 밀어둬."

"그래도 됩니까?"

"어차피 미카엘은 가지고 놀지도 않거든."

"그렇다면……."

장난감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우려던 펜리르의 손이 멈췄다. 테이블에는 장난감뿐만 아니라, 쿠키가 한 가득이었다.

'설마, 그녀가 구운 건가.'

펜리르의 목울대가 울렸다. 알리시아가 만든 쿠키를 선물받긴 했지만 막상 먹으려니 아까워서 아직 한 입도 먹지 못했던 참이었다.

"전하."

"듣고 있으니까 그냥 보고해."

"제가 식사를 못 해서 그러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쿠키 좀 먹어도 되겠습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

안 된다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펜리르는 여전히 서류만 보고 있는 카벨레누스와 우울해 보이는 미카엘을 곁눈질하다가 쿠키를 집어들었다. 알리시아의 쿠키를 맛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맛있네요."

"그런가?"

카벨레누스가 보고 있던 서류가 살짝 아래로 움직였지만, 펜리르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쿠키에만 집중했다. 요리는 귀족의 소양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알리시아가 직접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제가 단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맛있습니다."

"다행이군. 다 먹어도 상관 없으니 마음껏 먹도록 해."

"제가 다 먹어도 되는 겁니까?"

"미카엘은 이제 초콜릿 쿠키는 질렸다고 했거든. 처치하기 곤란했는데 잘됐지."

"전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나는 단건 안 좋아해서."

카벨레누스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초콜릿 쿠키가 물린 건 미카엘 뿐만이 아니었다. 만드는 내내, 맛을 봐온 카벨레누스는 한동안 초콜릿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정성껏 만든 건데, 만든 이의 성의를 봐서 맛있게 먹으면 좋죠. 어떠십니까? 전하께서도 하나 드시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먹어서 필요 없어."

"그럼 사양하지 않고 제가 다 먹도록 하죠."

카벨레누스의 거절에 펜리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라면 뭐든 잘 먹었을 텐데, 그녀의 정성을 쉽게 외면하는 카벨레누스가 밉게 느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며칠 째, 저희 부대와의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달가운 소식은 아니군."

카벨레누스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펜리르의 정예부대는 최대한 제국군과의 마찰을 피하고 소문만 퍼트리고 있지만 성난 제르페누스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제르페누스는 로아킨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군대를 꾸렸고 군대의 추격은 나날이 집요해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지원을 바라나?"

"아닙니다.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움직여볼까합니다."

"썩 좋은 선택 같아 보이진 않는군."

카벨레누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평했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부각될 정도로 단련된 몸은 젊은 군주를 자만하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목숨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우리의 동맹을 걱정하는 거지."

"하긴, 제국인을 믿는 괴짜 로아킨인은 드물죠."

펜리르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맹이 끝나고 죽으면 상관 없……."

카벨레누스는 따가운 시선에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겁 먹은 표정의 미카엘이 보였다.

"……죽을 리 없지."

대충 뱉은 말은 앞선 이야기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아졌다.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뱉고는 이마를 짚었다. 말 한마디도 신경 써서 뱉어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시라도 가제프가 서둘러 돌아오길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반대야. 손발은 몰라도 머리가 잘리, 음……."

펜리르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슬쩍 입을 가렸다.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이 때문에 말을 고르고 있는 카벨레누스의 모습이 꽤나 웃겼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반대하시는지는 압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쉽겠군."

"하지만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닙니다."

펜리르는 느긋하게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대와의 연락이 끊겼음에도 여유가 있는 건,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희 부대는 제가 직접 고른 정예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혹시 모를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교육 받았죠."

"뭔가 생각해둔 게 있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 부대는 분명 무사할 거라는 겁니다."

펜리르가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닦아냈다.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멍청한 형들이 가장 많이 시도했던 건 암살이었다. 바글거리는 다섯 형들의 반복적인 습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생존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편이 나을 텐데?"

"기다리는 건 좋아하지만, 슬슬 눈에 거슬리는 게 보여서요. 틈을 보여줄 참입니다."

"틈?"

"배신자가 좋아하는 단어죠."

펜리르의 눈매가 더욱 유려하게 휘어졌다. 카벨레누스는 허,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내 손을 잡은 데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군."

"벨타인이 욕심난 건 맞습니다. 다만, 이왕이면 효율적인 걸 좋아했을 뿐이죠.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죠."

"무슨 꿍꿍이지?"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전하를 위해 쓰려고 했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좀 더 지켜보다가 상황에 따라 알차게 이용해먹을 셈이었죠."

"……."

"그런 눈으로 보진 마세요. 처음부터 전하께 해가 되는 계획은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앞으로의 제 계획을 듣게 되면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걸요?"

펜리르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솔직히 그 역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서요."

펜리르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이건 기회였다. 그동안 담아둔 죄책감을 버릴 수 있는 기회. 펜리르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뗐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 거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펜리르의 말뜻을 알아차린 카벨레누스가 서둘러 말을 막았다.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러지 마세요. 저희 사이에 이 정도 장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당황해하지 않고 미카엘을 안심시키기 위해 능숙하게 웃어 보였다. 카벨레누스는 금세 밝아진 미카엘의 표정에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순진한 아이는 장난이라는 말에 금세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장난을 계속하겠다고?"

"저는 전하를 돕고 싶으니까요."

"그대에게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손가락 사이로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선뜻 나온 선의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손을 잡았다 해도 동맹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었다. 서로를 위해 완벽한 헌신을 하는 것 어리석었다.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원하는 바를 얻어 가면 그만이었다.

"예전에 제 후견인을 따라 한 이웃국가의 사절단으로 가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저는 꼬마였으니 그렇게 비중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요."

"……사절단?"

"저는 그곳에서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무척 왜소한 아이였는데 얼마나 더러운 몰골인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정도였죠."

"……."

카벨레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펜리르가 말하고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펜리르가 돕고 싶어 하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 * *

"미카엘은 이제 없나보군요."

"제대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런 눈 안 하셔도 됩니다. 사심은 있지만 흑심은 없습니다."

펜리르는 두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흑심이 있다고 해도 틈을 줄 생각은 없어."

카벨레누스는 냉정하게 대꾸하며 다리를 꼬았다.

"자신만만하시군요."

"그녀에게 선택 받은 입장이니 그럴 수밖에."

"잔인하시네요."

"틈을 줄 생각이 없다고 했잖나."

카벨레누스가 빤히 펜리르를 응시했다. 펜리르는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카벨레누스는 원하는 대답을 얻기 전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참을성이 없으시군요."

차가운 반응에 펜리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괜히 말을 늘리는 건 질색이거든."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말했다.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소동이 좀 있었습니다. 지루해서 어른들 몰래 도망쳐 나왔다가 우연히 그분을 본 거죠."

"그게 다인가?"

"그게 답니다."

"……."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매서웠지만 펜리르는 굴하지 않고 웃었다. 학대 받던 과거는 알리시아에게는 치욕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제 계획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말 돌릴 생각하지 마."

카벨레누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펜리르는 이번에도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게 그분을 위한 일이니까요."

"……."

"나쁜 의도로 감추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상처입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그동안 충분히 힘드셨을 테니까요. 펜리르의 말에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내의 사심이 불쾌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리시아가 상처 입지 않길 바라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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