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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2)화 (102/164)
  • 102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2021.02.22.

    "그래서? 그래서 늑대가 어떻게 하는데?"

    미카엘은 이불에 몸을 모두 감춘 것도 모자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는 미카엘이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글쎄, 어떻게 했을까?"

    알리시아는 아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말꼬리를 늘리며 다음 책장을 넘겼다. 똑똑-.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이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떡해. 늑대가 왔나봐."

    "늑대는 아닐 거야."

    "정말?"

    "궁금하면, 미카엘이 가볼래?"

    미카엘은 잠시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리시아는 궁금하면서도 무서운 건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종종 걸어가는 미카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저씨?"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몸집에 비해 한참 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만 깜박거리는 미카엘의 모습에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미카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거든요."

    "동화책?"

    "미카엘이 좋아하거든요."

    알리시아는 들고 있던 동화책을 내보였다.

    "동화책과 이불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불을 새걸로 바꾸긴 해야 할 것 같군."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은 건가?"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뒤로 보이는 침대부터 방문까지 꼬리처럼 길게 이어진 이불을 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꼼꼼하게 청소된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바닥을 구른 이불을 덮고 자게 할 순 없었다.

    "정말로 괜찮아요.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그대 도움이 필요해서."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뭘 도와드리면 돼요?"

    "그대가 확인해줬으면 하는 부분 있어. 그리고……."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움직였다. 알리시아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시선을 움직였다. 그의 시선에는 미카엘이 있었다.

    "방금 전에 완성했거든."

    "완성이요?"

    "미카엘. 손 줘봐."

    "이게 뭐예요?"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떨어진 새하얀 종이봉투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쿠키 구워오라면서."

    "……진짜 아저씨가 구운 거예요? 혼자서요?"

    미카엘의 눈에 의심이 서렸지만 카벨레누스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소원이라면서."

    "그건 그렇지만……."

    미카엘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쿠키에 대해 운운하긴 했어도 진짜 쿠키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 정리가 끝나면 후하게 인심을 베푸는 척을 하며 아빠라 불러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혹시, 이상하게 구운 건 아니죠?"

    "궁금하면 먹어봐."

    미카엘은 쿠키를 감싼 종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초콜릿이 콕콕 박힌 쿠키가 한 가득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거 아니에요?"

    "내가 만들었어."

    "진짜요?"

    "몇 번이나 반죽을 태워가면서 만들었지. 네 소원대로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알리시아와 함께 만든 쿠키 대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로 쿠키를 굽기로 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알리시아와 함께 만들 때는 쉬웠던 것과 달리, 처음부터 혼자 다시 만들려고 하니 어려웠다. 그럴싸한 쿠키를 만들기 위해 시행착오를 몇 번이나 겪어야 했는지 몰랐다.

    "쿠키는 됐으니, 이제 다음 소원이나 말해봐."

    "일단 쿠키부터 먹어보고요."

    미카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쿠키를 집었다.

    "어때?"

    "……아저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뭘?"

    "이거 아저씨가 만든 거 아니죠."

    "왜? 별론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울상이 된 미카엘의 얼굴을 보니, 첫 쿠키의 기억이 떠올랐다.

    "맛있잖아요."

    "뭐?"

    "이건 말도 안 돼요. 아저씨가 이렇게 맛있는 쿠키를 구울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헛소리는."

    미카엘의 외침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듣는 건 나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쿠키는 언제 구우신 거예요? 바쁘시잖아요."

    "일을 주방에서 했지."

    카벨레누스는 그간의 시간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가제프는 티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주방에 들어올 때마다 부관의 표정이 미묘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까다로운 심사관이 있으니 할 수 없지."

    카벨레누스는 턱짓으로 미카엘을 가리켰다. 아이는 벌써 다음 쿠키를 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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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신기하네요. 시간이 꽤 오래 흘렀을 텐데 멀쩡하네요.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알리시아는 방 안을 천천히 걸으며 벽을 매만졌다. 정으로 움푹 파인 글자들이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기묘했다.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읽을 수 있나?"

    "양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대충 훑어보니 가능할 것 같아요."

    알리시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벽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벽에 적힌 글자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을 찾아야 했다.

    "이상하군."

    "어떤 점이요?"

    "나는 여기 있는 글을 읽을 수 없거든."

    "……."

    "분명 내가 아는 언어인데도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황족에게 있어서 고대어는 기본 소양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여기 있는 글자 중 그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읽을 수 없으세요?"

    "그래. 읽을 수 없어. 마치 내가 읽는 걸 원치 않는 것처럼 말이지."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제프의 추측이 맞았다. 방은 알리시아가 있으니 모습을 드러냈고 남겨진 글조차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여자와 마물 사이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요."

    "딱히 문제는 아니지. 애당초 이 방은 그대가 있어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시죠?"

    "그동안 이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어.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지."

    "……."

    "그런데, 그대가 있으니 방이 나타났어."

    이게 단지 우연일까?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제프가 그러더군. 마물과 깊게 연관된 건 나보다 그대일 거라고. 그래서, 마물들이 미카엘에게도 반응하는 거라고."

    "……."

    "어쩌면, 그대의 신과 신 프라임이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고 말이야."

    "그럴 리가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못 돼요. 아시잖아요. 제 힘은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이지 완벽하지 않죠."

    알리시아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이 거창한 게 들려도 까보면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힘은 불완전했다. 소원에는 항상 수명이라는 대가가 필요했고, 그 힘은 대가를 치룰 수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도 없었다. 그것은 제국이 오랫동안 찬양해오던 완벽한 신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의심스럽긴 해."

    "어떤 점이 의심스러우신 건데요?"

    "마물은 대대로 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심지어 그대가 가진 힘조차 신 프라임의 능력과 흡사해."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표정 없는 사내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아. 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굳이 괜한 이야기를 꺼내 분쟁을 일으킬 필요 없지."

    "그런가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확인해볼 셈이야."

    "……."

    "그대가 가진 힘이 그대의 수명을 갉아먹었다면, 그 반대의 경우가 가능할 수도 있잖아."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드레스에 닿았다. 이제 알리시아에게는 몸에 딱 맞는 드레스가 없었다. 매일 말라가는 화초처럼 그녀의 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앙상해졌다. 알리시아는 한 번도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은 소리 소문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지금껏 준비해왔던 무엇도 그대를 살리지 못하고 있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카벨레누스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이를 꽉 다물었다.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어. 신이 아니라면, 다른 것도 좋아. 뭐든 찾아낼게."

    "네. 믿을게요."

    무엇보다 저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걸요. 알리시아의 손끝이 카벨레누스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헛된 희망이라도 좋으니 계속 품고 싶었다. 함께 할 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엄마한테 가면 안 돼요?"

    "안 돼. 알리시아는 바빠."

    카벨레누스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다. 미카엘은 애꿎은 쿠션만 괴롭히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괴물 사건 이후, 변한 게 있다면 혼자만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자신이 혼자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알리시아나, 카벨레누스, 못해도 가제프라도, 적어도 어른이 한 명 이상 동행해야 외출이 허락됐다. 멋대로 성을 쏘다니던 미카엘에게는 너무도 잔혹한 형벌이었다.

    "그럼 렉스라도 보러 가면 안 돼요?"

    "조금 있다가 가제프가 오면 같이 가."

    "지금 가면 안 돼요? 나 되게 심심하단 말이에요."

    미카엘은 일부러 거칠게 발을 동동 굴렀다. 쇼파 테이블에는 간식과 장난감이 쌓여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것보다는 자유롭게 나가서 뛰어놀고 싶었다.

    "조금만 참아. 이것만큼은 끝내야 해."

    "아저씨가 정 바쁘면 나 혼자서 가도 괜찮은-."

    "안 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미카엘의 입술이 더욱 튀어나왔다.

    "치이……."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한 시간 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미카엘은 한 번 더 조르려다가 포기하고 슬쩍 문 쪽을 바라봤다. 이 와중에도 카벨레누스는 서류만 볼 뿐, 이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괜한 생각하지 마."

    "……."

    쇼파에서 내려왔을 뿐인데 바로 지적이 날아왔다. 미카엘의 두 볼이 불만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몰래 나가려다가 걸린 건 벌써 세 번째였다.

    "쿠키라도 먹고 있어. 좋아하잖아."

    "엄마가 단거 많이 먹지 말랬거든요."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아저씨 쿠키는 늘 같은 맛뿐이잖아요."

    미카엘은 일주일 내내 먹어야 했던 쿠키를 흘겨봤다. 초콜릿을 좋아하긴 해도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매일 먹어도 조금도 줄지 않는 바구니 속 초콜릿 쿠키는 자로 잰 것처럼 변함없이 똑같은 맛이라 이젠 질려버렸다.

    "어차피 단건 다 똑같지 않나."

    "안 똑같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미카엘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얼마 다양한 쿠키가 있는데, 그걸 단거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다음에는 케이크라도 구워주지."

    "아저씨, 케이크도 만들 수 있어요?"

    "몰라."

    "모르면서 만들어준다고 한 거예요?"

    "모르면 배우면 되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배워서 만들어줄게."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미카엘을 바라봤다. 미카엘은 그동안 쌓인 불만을 드러내기 위해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가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에 결국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언제 시간이 나는데요."

    "모든 일이 끝났을 때겠지."

    찰나지만,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책장에 닿았다. 병법서 같이 딱딱한 책으로만 가득 차 있던 책장의 한 편에는 어울리지 않는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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