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01)화 (101/164)
  • 101화. 주머니 속 송곳

    2021.02.18.

    "그래서 제 생각은…… 어? 영애!"

    이야기를 나누던 펜리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체르는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후다닥 달려나가는 펜리르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펜리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경을 찾았는데, 바로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때도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걱정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죠."

    펜리르가 다소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알리시아는 싱긋 웃으며 바구니에 넣어둔 포장한 쿠키를 꺼냈다.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게 뭐죠?"

    "제가 구운 쿠키예요. 저번에 도와주신 게 고마워서 한 번 구워봤어요.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꺼내드세요."

    "지, 직접 구우셨다고요?"

    펜리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작 쿠키였지만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알리시아가 건넨 건, 그냥 쿠키도 아니고 무려 직접 구운 쿠키였다.

    "네.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맞을 겁니다! 무조건 맞을 거예요!"

    "……."

    "그, 그게 저는 어릴 때부터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알리시아에 펜리르는 그제야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체면을 차리려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알리시아의 앞에서는 그게 되지 않았다. 눈만 감아도 감옥에서 마주쳤던 시선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좋아하신다니 다행이에요. 주변 분들과 나눠드시라고 넉넉하게 담았는데, 혹시 싫어하실까봐 걱정했거든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쿠키라면 없어서 못 먹는 사람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알리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펜리르는 알리시아가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쑥 내밀어진 투박한 손에 급하게 쿠키를 위로 높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손 대지 마십시오."

    펜리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체르는 쿠키를 빼앗기 위해 팔을 휘휘 저었다가 닿지 않는 높이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같이 나눠먹으라는 말,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요?"

    "양도 많은데 치사하게 그러지 마라. 어차피 네놈은 단걸 좋아하지도 않잖아."

    "오늘부터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좋아할 겁니다."

    보물 상자라도 품은 양, 펜리르는 쿠키를 꽉 품에 안았다. 동시에 체르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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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신경 쓰지 말고 보고해."

    카벨레누스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가제프는 그럴 수 없었다. 가제프는 버터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상관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쿠키를 굽고 있지."

    "쿠키요?"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되묻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 풍경을 천천히 살폈다. 카벨레누스가 주방으로 오라고 했을 때부터 의아했지만, 그의 주변에 쌓인 조리도구와 각종 재료들의 존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카엘이 쿠키를 구워달라고 하더군."

    "……전하께요?"

    "그것도 나 혼자 구운 쿠키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지."

    카벨레누스는 이를 갈면서도 버터를 적당량 잘라 저울에 올려놓았다. 잘린 버터의 단면은 필요 이상으로 깔끔하게 썰려 있었다.

    "조금 부족하군. 더 넣어야겠어."

    카벨레누스는 버터를 조금 더 잘라 저울에 올렸다. 알리시아와 함께 구운 쿠키는 완벽했지만 혼자 구운 게 아니었다. 약속대로 혼자서 쿠키를 완벽하게 구울 필요가 있었다.

    "……."

    "뭐해, 보고 안 하고."

    "아, 네. 네……."

    가제프는 삐걱거리는 고장난 기계처럼 어설픈 몸짓으로 보고서를 확인했다.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버터를 계량하는 상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보고서를 확인하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시선이 가려는 걸 겨우 참았다.

    "계속 찾고 있지만, 도련님이 계셨던 방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렸죠."

    "성 안은 전부 수색한 건가."

    "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법인가."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후, 미카엘이 발견되었던 방의 조사를 맡겼지만 돌아온 건 방이 사라졌다는 소식뿐이었다. 숨겨져 있던 것도 모자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방은 지나치게 수상했다.

    "내가 따로 찾아봐야겠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아니면, 도련님과 함께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거기서 갇혀 있던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말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카벨레누스는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등이 다 까졌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같은 장소로 데려가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보통 뭔가를 숨기는 마법은 특정 조건에 충족되어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조건이 미카엘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적어도 도련님과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도련님을 홀려서 끌고 갈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가제프는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꼼꼼히 살폈다. 상관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역시나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 훌륭한 부관은 이럴때야말로 차선책을 내놓아야 하는 법이었다.

    "정 내키시지 않으시면, 아가씨와 함께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알리시아와?"

    "개인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걸리는 부분?"

    "왜, 도련님이었던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마물이 도련님께 관심을 보이는 마물의 피 때문이라면 전하께도 반응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아가씨께서는 고대어를 알고 계셨고요."

    "고대어라고?"

    "제가 듣기론 모친께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모친은 제국인이 아니잖나. 고대어를 어디서 배운 거지?"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도 그게 이상했습니다. 프라임은 제국의 국교고, 고대어는 고위층들만 배웁니다. 남부에서 그것도 고립된 상황에서 자란 아가씨가 알만한 지식이 아닙니다."

    "……."

    "심지어 프라임 신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죠."

    가제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제국이 평생 따르던 위대한 프라임 신과 망국의 공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 배제해왔고 그럴 확률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가씨의 모계 혈통인 노이트라이라족은 신의 그릇이라고도 불리죠. 만약, 신전에서 말하는 신과 노이트라이라족이 같은 신을 믿고 있는 거라면-."

    "위험한 발언이라는 걸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책임질 자신이 있으면 더 말해봐."

    카벨레누스는 들고 있던 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따지고보면 프라임 교단은 제국의 국교지만, 신화에서는 대륙 전체를 아우릅니다."

    "……."

    "그리고, 이름은 보통 사는 문화나 환경에 맞춰서 각기 다른 언어나 단어로 불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민족이 나누어져 다른 문화를 이루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마물들이 도련님께 반응하는 건, 전하께 물려받은 마물의 피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제프가 눈에 힘을 줬다. 마물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쪽은 당연히 카벨레누스였다. 그래서 당연하게 그가 원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상했다. 마물이 사라지기 전까지 카벨레누스는 항상 사냥철의 선봉이었다. 그는 지금껏 무수히 많은 마물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카벨레누스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모두에게 그러하듯 이를 보이며 경계하고 적대했을 뿐이었다.

    "솔직히 이것은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겹치는 점들이 있어도 확신할 순 없죠. 신전이 그토록 찬양하던 존재가 고작 소수민족의 혈통이라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

    "하지만 아가씨 역시 그 방을 찾아낼 수 있으면 추측은 확실해질 겁니다."

    "추측이라……."

    "물론, 전하께서 아가씨의 비밀이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짧은 의견으로는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제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상관을 바라봤다. 카벨레누스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의심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마물이 반응하는 이유가 카벨레누스가 아니라면, 남은 건 알리시아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별다른 동요 없이 덤덤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신 프라임은 못 이룰 게 없는 대단한 존재지. 안 그런가?"

    "네. 일단 신전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죠."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군."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좋다는 보양식부터 온갖 짓은 다하고 있지만 알리시아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날이 나빠지는 상태만이 벌레처럼 야금야금 사내의 신경을 긁을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카벨레누스는 이마 위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냥 잊고 조용히 지나갔으면 했지만 소용없었다. 해결되지 않은 비밀은 주머니 속 송곳과도 같았다. 아무리 잘 덮어놔도 불쑥 튀어나와 살갗을 찌르는 법이었다.

    "조사해.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어. 프라임 신전이든, 노이트라이라 족이든 간에 뭐든 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부 캐봐."

    "……."

    "왜 그러지? 이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나?"

    "그게…… 솔직히 전하께서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마물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가제프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둥글게 말한다고 해도 카벨레누스가 마물에게 가진 감정이 혐오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딴 소리를 운운할 때가 아니니까."

    "……."

    "신이든, 마물이든, 아니면 악마라도 해도 상관없어."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제야 가제프는 카벨레누스가 덤덤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그는 묵묵히 참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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