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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0)화 (100/164)

100화. 고마워

2021.02.15.

"나한테 할 말 없나?"

"그러는 아저씨는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서로 맞은 편에 앉아서 눈싸움을 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에 알리시아는 웃었다. 둘 다 생각하는 바는 같을 텐데, 자존심 때문에 입을 떼지 못하는 게 퍽 귀여웠다.

"그냥 먼저 솔직하게 말하세요."

알리시아가 슬쩍 카벨레누스에게 언질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미카엘이 친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한참 고심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라고 불러봐."

"……."

"……."

물론 고심 끝에 내놓은 것치곤 썩 좋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카벨레누스는 닮은 얼굴로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알리시아와 미카엘의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는 지금 나한테 아빠 소리 듣고 싶은 거죠?"

"……일단은."

"좋아요. 그럼 내가 불러줄게요."

미카엘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모든 시선이 미카엘을 향했다.

"아……아……."

호기롭게 대답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하려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카엘은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연신 입술만 달싹거렸다.

"안 부를 건가?"

"지금 재촉하는 거예요?"

"재촉하는 건 아닌-."

"아저씨 때문에 못 하겠어요."

미카엘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고작 아빠 소리를 입에 담을 뻔했다고 벌써부터 양 뺨이 홧홧했다.

"못 하겠다고?"

"아저씨가 재촉해서 기분이 나빠졌어요. 기분 좋을 때 다시 할래요."

"핑계가 이상한데."

"핑계 아니거든요! 됐어요! 내가 큰마음 먹었던 건데, 아저씨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못 해요!"

미카엘이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방방 뛴다는 걸 알면서도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어쨌거나 아쉬운 건, 미카엘보다는 자신이었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도로 앉아."

"진심으로 사과해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어."

"……좋아요."

미카엘은 슬쩍 자리에 앉았다. 카벨레누스는 이번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미카엘은 다시 도전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하지만 두 번째 주어진 기회 역시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못 하겠어요."

"왜? 내 사과가 마음에 안 들어서?"

카벨레누스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네? 아, 맞아요! 아저씨 사과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미카엘은 눈치껏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널 만족시킬 수 있는데?"

"으음……. 아! 세 가지 소원이요."

"세 가지 소원?"

"저번에 세 가지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거 다 이뤄주면 그때에는 진짜 아빠라고 불러줄게요."

방금 생각했던 핑계치고는 훌륭하다. 미카엘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쫙 폈다.

"미카엘."

"아냐. 나는 괜찮으니 뭐라고 하지마. 어렵지도 않은데,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하지."

"진짜요?"

"그래. 일단 말해봐. 뭐든 들어줄 테니까."

미카엘은 예상치 못한 카벨레누스의 반응에 눈을 꿈벅거렸다. 소원도 갑자기 꺼낸 핑계라서 뭘 빌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을뿐더러, 카벨레누스가 쉽게 소원을 들어주면 곤란했다.

"말해. 자꾸 소원을 운운하는 걸로 봐선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거잖아"

"그게……."

미카엘은 슬쩍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엄마는 이미 자신의 속셈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엄마는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미카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만 굴리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카벨레누스의 손에 미소를 지었다.

"쿠키요!"

"쿠키? 그거야 얼마든지-."

"다른 사람 말고, 아저씨가 만든 쿠키요!"

"……."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정적이 맴돌았다. 하지만 미카엘만큼은 싱글벙글 잔뜩 신이 나있었다. 카벨레누스의 투박한 손은 검은 몰라도, 요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쿠키를 구우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

"아저씨가 직접 쿠키 구워주세요. 그게 내 소원이에요."

"……."

"물론, 아저씨 혼자 만들어야 해요! 다른 사람 도움 받으면 절대 안 되고요!"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쿠키를 구워본 적이 없다만."

"이제 경험하게 되겠네요."

낭랑한 대답에 카벨레누스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이 요리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한껏 신이 난 아이는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다른 건 안 되나?"

"저는 아저씨가 구워준 쿠키를 먹고 싶은 건데요."

"날 놀리고 싶은 거겠지."

카벨레누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미카엘이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슈바르한의 요리장이 매일 같이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솜씨 좋은 요리장을 두고 굳이 자신에게 쿠키를 굽게 하는 의도는 뻔했다.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이런 게 소원일 줄은 몰랐지."

"뭐든 들어준다면서요."

"……."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이를 바득 갈면서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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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뭐 도와드릴 거 없나요?"

"괜찮아. 거의 다 구웠어."

카벨레누스는 오븐 안쪽에서 트레이를 꺼냈다. 알리시아는 종종 걸음으로 카벨레누스의 트레이를 구경했다. 트레이에는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쿠키가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잘 구우셨네요. 맛있을 것 같아요."

"한 번에 성공해야 다신 이런 짓을 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먹어봐도 되나요?"

"원한다면."

카벨레누스는 가장 잘 구워진 쿠키를 접시에 담아 알리시아에게 건넸다. 갓 구워 따끈따끈한 쿠키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알리시아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별다른 경계 없이 쿠키를 베어 문 알리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알리시아는 묘하게 기대 어린 카벨레누스의 표정을 눈치껏 살피다가 급하게 턱을 움직였다. 진실을 말해주기엔 카벨레누스는 너무도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때?"

"나쁘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그를 따라 웃으면서도 동시에 쿠키를 도로 접시에 놓았다.

"다만 미카엘은 호두를 싫어해서요. 다른 걸로 새로 구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호두를 싫어해?"

"편식은 좋지 않지만, 이번에는 미카엘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잖아요. 미카엘이 좋아하는 쿠키를 구워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확실히 그 편이 낫겠군."

"초콜릿이나, 피넛을 넣어서 구워보시는 건 어때요?"

알리시아는 재료를 찾기 위해 안쪽 주방을 돌아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문제 있는 건 쿠키뿐만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반으로 동강난 트레이를 애써 모른 체하며 초콜릿을 챙겨들었다.

"다행히 초콜릿이 있네요. 이걸 쓰면 되겠어요."

"그러면 이건-."

"이건 제가 먹을게요. 저는 호두를 좋아하거든요. 옆에 두고 틈틈이 간식으로 먹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알리시아는 재빨리 끼어들어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다행히 카벨레누스는 별 의심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드시는 동안 심심하실 테니 제가 이야기 상대를 해드릴게요. 괜찮으시죠?"

"그대만 좋다면 얼마든지."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처 의자를 끌고 왔다. 알리시아는 그가 마련해준 자리에 앉은 채, 서둘러 트레이에 있는 쿠키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혹시라도 남은 쿠키가 카벨레누스의 입에 하나라도 들어가면 낭패였다.

"혹시 모르시는 게 있으면 물어보셔도 돼요."

"미카엘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라고 한 거 알잖아."

"그게 시간을 끌기 위한 핑계라는 거 아시잖아요."

"알아도 어쩔 수 없지. 아쉬운 건 나잖아. 원하는 걸 들어줄 수밖에."

카벨레누스가 밀가루를 집어들었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앞치마를 써도 될까요?"

"도와줄 필요 없어."

"도와드리려는 게 아니라, 저도 쿠키를 구워보려고요."

"쿠키를 구워서 뭐 하려고."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이렇게라도 보답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괜찮은 생각 아닌가요?"

알리시아는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오븐의 온도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븐의 온도는 지나치게 높았다. 알리시아는 장작을 빼 온도를 조절한 후, 볼을 집어들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초콜릿 쿠키는 설탕이 살짝 씹히는 게 좋더라고요."

"……."

"저는 쿠키를 만들 때, 다른 것보다 밀가루가 뭉치지 않게 체로 쳐주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알리시아는 틈틈이 재잘거리면서 카벨레누스가 자신의 조리 과정을 볼 수 있게 신경 썼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알리시아를 살피다가 슬쩍 들고 있던 볼을 옆으로 밀고 새 것을 찾았다. 사내가 드디어 무작정 재료를 섞는다고 쿠키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제 찬 곳에 넣어두고 숙성시키면 되겠네요."

"……."

"왜 그러세요?"

"원래 쿠키가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건가 싶어서."

카벨레누스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혼자 했을 때는 한참 끙끙거렸는데, 알리시아가 있으니 마법처럼 금세 끝이 났다.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법이죠."

"확실히 그대는 익숙해 보이는군."

"전 요리사를 데리고 살진 않았으니까요."

알리시아는 가볍게 웃고는 반죽을 찬 곳에 두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사뭇 달랐던 그녀의 조리 과정을 보니 문득 의구심이 들은 탓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눈치를 한 번 더 살피고 잽싸게 바구니 속 쿠키를 하나 집었다.

"……."

"숙성 시키는 동안 시간이 남는데 어쩌, 음? 표정이 왜 그러세요?"

굳은 카벨레누스의 표정에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카벨레누스는 등 뒤로 감춘 쿠키를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쿠키는 심각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딱딱하고, 쓰며, 동시에 짰다. 쿠키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럴싸한 겉모습뿐이었다.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쿠키를 먹은 알리시아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왜, 함께 요리해준 건지 알겠군.'

카벨레누스는 미소 짓고 있는 알리시아를 보며 쓰게 웃었다. 차마 쿠키가 맛없다고 말하지 못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괜히 속이 쓰렸다.

"……고마워."

"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게 뭐예요."

알리시아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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