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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9)화 (99/164)

99화. 이제 그만 용서해주려고

2021.02.11.

미카엘은 눈을 떴다, 아니 뜨려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퉁퉁 부은 눈을 뜨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미카엘은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 눈에 힘을 줬다. 아이에겐 자고 일어나면 엄마의 품에 파고 드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바람과 달리 먼저 보인 건 금색의 눈동자였다.

"아저-."

"쉿."

카벨레누스가 턱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알리시아가 잠들어 있었다. 미카엘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검지를 입술에 댔다. 엄마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건 미카엘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와봐."

카벨레누스가 거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미카엘을 불렀다. 미카엘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요?"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침대 옆 협탁에 상자를 집어들었다. 상자 안에는 약과 붕대를 포함한 자잘한 의료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손 줘봐."

"손이요?"

"얼른 줘."

덧붙여진 재촉에 미카엘은 고개를 숙였다. 몰랐는데 자신의 손등 위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 갈아야 해."

"아저씨는 의사 아저씨가 아니잖아요."

"간단한 치료 정도는 나도 해."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붕대를 풀었다. 얇게 감긴 붕대를 벗기자 감춰졌던 상처가 드러났다.

"아야……."

"아픈가?"

"안 아파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턱을 치켜세웠다. 카벨레누스는 살갗이 까진 상처를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아프면서."

"안 아파요."

"그럼 아프면 말해."

카벨레누스는 천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를 눌렀다. 미카엘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등골이 오싹했다. 엄마가 자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아파?"

소독약을 바르던 카벨레누스의 손길이 멈췄다. 미카엘은 끝까지 버티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기로 참기에는 너무 아팠다.

"아픈 게 싫으면, 다신 다치지 마."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건 그렇지."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미카엘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치료 더 해야 해요?"

"얼른 낫고 싶다면 해야지."

"……."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면 더 해야 하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로 손이 내밀어졌다. 카벨레누스는 다시 소독약을 집어들었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미카엘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꿋꿋하게 치료 받으면 선물을 주지."

"내가 애인 줄 알아요?"

"그럼 싫은가?"

"싫다곤 안 했어요."

미카엘이 재빨리 카벨레누스의 말을 가로챘다. 어느덧 아이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그럼 뭘 원하지?"

"최고로 비싸고 좋은 붓이요."

"붓?"

"그게 실은 삼촌이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것 같아요."

"……."

"그래서 선물을 주면서 사과하면 삼촌 기분도 풀리지 않을까요?"

미카엘이 기대 어린 눈으로 눈을 빛냈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자가 그렇게 좋은가?"

"그야, 삼촌은 좋은 사람인 걸요. 금방 화 풀릴 거예요."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아저씨, 생각보다 잘하네요. 의외예요."

깔끔하게 묶인 붕대를 확인한 미카엘이 씨익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자가 네게 괴물이라고 했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데도 원망스럽지 않다고?"

"내가 정말로 잘못한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미카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건 모르죠. 원래 상처 주는 사람은 모르잖아요. 분명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을 거예요."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카벨레누스의 손이 미카엘의 머리를 꾹 눌렀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머리를 쓰다듬는 사내의 손은 엄마의 것처럼 자연스럽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럽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알아.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너는 누군가에게 상처줄 아이가 아니니까."

카벨레누스의 손가락 사이로 적갈색 머리카락이 사르르 빠져나갔다. 미카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슬쩍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삼촌이 그랬어요. 나 때문에 엄마랑 아저씨랑 헤어진 거라고요."

"……."

"진짜예요? 정말로 내가 태어나서 둘이 헤어진 거예요?"

"아냐.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그건 내 탓이었지, 네 잘못이 아니었어."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미카엘의 눈동자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나랑 살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

"그런데, 만약에 아저씨가 계속 엄마 옆에 있었으면 엄마는 지금처럼 커다란 성에서 공주님처럼 살았을 거잖아요."

미카엘의 목소리는 거의 울 것처럼 잠겨 있었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자신 때문에 항상 힘들어했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삼촌이 날 미워한 거예요. 나 때문에 엄마가 불행-."

"그런 적 없어."

"……."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얼굴을 감싸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권력자로 살아온 사내에게 있어서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위로 같은 것도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울지 않았으면 했다.

"네 어머니는 널 가진 걸 후회한 적이 없어."

"그치만-!"

"너는 네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든 게 아니라, 행복하게 만든 거야."

"……."

"내가 보기엔 그랬어."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빠졌음에도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손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 수 없었다. 남들보다 높은 체온이, 그리고 커다란 손이 너무도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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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엄마, 일어났어?"

미카엘은 마주친 시선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리시아의 품을 파고 들었다. 알리시아는 눈을 뜨자마자, 제 품에서 바스락거리는 아이의 온기에 반사적으로 두 팔에 힘을 줬다.

"괜찮아, 미카엘?"

"응! 응! 나는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엄마 많이 놀랐잖아."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다 괜찮아졌어."

"괜찮아졌다고?"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미카엘의 얼굴은 부운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있어서 행복한 거 맞지?"

"당연하지. 엄마한테 미카엘은 보물인 걸."

"정말?"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여 미카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니! 안 해!"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허리를 힘껏 감싸 안았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으면 금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다신 엄마 놀라게 하면 안 돼. 미카엘이 없어지면 엄마는 정말로 슬픈 거야."

"응. 다신 안 그럴게."

힘차게 대답하는 미카엘의 모습에 알리시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착하다, 우리 아들."

알리시아는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붕대에 도로 인상을 썼다.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흉터 안 남을 거래. 아저씨가 그랬어."

"……아저씨가?"

"이거 아저씨가 치료해준 거야."

미카엘이 자랑하듯 붕대가 감긴 손등을 내보였다.

"잘해주셨네."

"맞아. 잘해줬어. 그리고……."

미카엘은 말을 멈추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쩐지 다음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웠다.

"왜?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거 아니었어?"

"그게…… 음, 있지. 엄마는 아저씨를 어떻게 생각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아저씨가 아빠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

"물론 내가 아빠가 필요하다는 건 아니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미카엘은 급하게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의 두 뺨은 꽃물이 든 것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미카엘은 아저씨가 좋아?"

"그, 그게 아저씨는 거대한 성도 가지고 있고, 렉스도 있고, 사탕도 많고, 또……."

"또?"

"……아저씨한테 이야기하면 안 할 거지?"

"우리 아드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알리시아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뗐다.

"……아저씨, 요즘 들어 좀 멋있는 것 같아."

"응?"

"내가 무서울 때마다 짠! 짠! 하고 나타나잖아."

"그래서 좋아?"

"좋은 건 아닌데……."

"정말?"

"……실은 좋은 것 같아."

미카엘의 뺨이 더욱 붉게 물들었고 덩달아 알리시아의 미소도 진해졌다.

"아저씨가 들으면 좋아하시겠다."

"아저씨는 놀릴 걸."

"아니야. 아저씨가 얼마나 미카엘을 좋아하는데."

"그럴 리가."

"많이 좋아해. 미카엘이 사라졌을 때에도 아저씨가 먼저 나섰는걸."

알리시아는 어린 아들의 헝클어진 머리를 찬찬히 정리했다. 미카엘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진짜 그랬어?"

"그래."

"그럼 됐어. 이제 그만 아저씨를 용서해줄래."

"용서?"

"아저씨는 너무 늦게 왔잖아."

일순간,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제임스에게 친부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연히 미카엘이 충격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평온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전에 진실을 알고 있었다.

"미카엘, 혹시 너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리시아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그간 미카엘이 보였던 반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아저씨가 먼저 그랬는걸. 우리 아빠가 아니라고."

"……."

"그래서 심술이 났어. 그렇게 늦게 왔으면서 아빠처럼 굴지도 않았잖아."

엄마가 나보다 아저씨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미카엘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카벨레누스가 완벽하게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나쁘진 않았다. 말도 못되게 하고 엄마처럼 좋은 냄새도 안 나도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있지, 엄마. 나는 아빠가 못된 사람인 줄만 알았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알리시아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미카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 알면서 모른 척 혼자 속을 끓였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다들 아빠가 엄마를 버렸다고 했고, 한 번도 우리를 안 찾아왔잖아. 그래서 계속 미워할 생각이었어."

"……."

"그런데, 자꾸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내가 큰 마음 먹고 이제 그만 용서해주려고. 미카엘이 웃었다. 이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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