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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8)화 (98/164)

98화. 예뻐해주세요

2021.02.08.

"네가 왜 괴물이지?"

"나한테만 괴물이 오잖아요. 그리고……."

미카엘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면 어떡하냐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에게서까지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뭔데."

"말 안 하고 싶어요."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둥그스름한 아이의 머리를 보다가 도로 앞을 바라봤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진짜 안 물어볼 거예요?"

"원치 않는다면서."

"……무서워서 그래요."

카벨레누스는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말랑거리는 손끝에 미간을 찡그렸다.

"뭐가 무서운데."

"내가 진짜 괴물일까봐요."

"……."

"그러면,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잖아요. 괴물은-."

"그만해."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아이의 꽉 쥔 손도, 떨리는 목소리도, 그리고 자꾸만 튀어나오는 괴물이라는 단어도 전부 거슬렸다. 괴물을 운운하기에는 미카엘은 너무 작았다. 괴물은커녕, 안간힘을 써도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이에게는 보호가 필요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카벨레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넌 괴물이 아니야."

"……그치만, 괴물은 내 앞에만 나타잖아요."

"이상할 거 없어. 원래 짐승은 사냥을 할 때 연약한 개체부터 공격하는 법이야. 그 편이 효율적이거든."

"나 안 약해요."

"나보다 약하잖아."

"……."

기준이 카벨레누스라면 할 말이 없다. 미카엘은 이마로 카벨레누스의 어깨를 꾹 눌렀다. 카벨레누스는 아이를 안은 팔에 살짝 힘을 줬다.

"넌 약해도 돼. 그래도 상관없어."

"약하면 먼저 공격 당한다면서요."

"내가 있잖아."

"……."

푹 파묻혀 있던 미카엘의 얼굴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카벨레누스는 튀어나온 아이의 머리를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앞으론 괜히 이상한 곳으로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내게로 와."

"……."

"대답 안 해?"

"……좀 생각해볼게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고쳐안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의 품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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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맙소사, 미카엘!"

미카엘을 발견한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안고 남은 손으로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쌌다.

"진정해. 미카엘은 괜찮아."

"정말로요?"

"오는 길에 잠들었어. 피곤했던 모양이야."

"상처는요? 다친 곳은 없어요?"

"큰 상처는 없지만, 손이 좀 까져서 치료를 받긴 해야 할 거야."

알리시아는 먼지와 상처로 더러워진 아이의 손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작은 생채기였지만 제 살이 찢어진 것처럼 괴로웠다.

"미카엘이 즐거워 보여서 너무 풀어준 게 화근이었나봐요."

"자책하지 마. 그대 탓이 아니야."

"제가 좀 더 잘 봤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 저런 곳을 방치해둔 내 탓도 있을 걸. 그리고……."

카벨레누스가 방금 전 나온 통로를 돌아봤다. 등불이 사라진 통로는 어두컴컴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많은 일이 있었지."

그대가 겪은 것만큼이나. 핏자국을 알아차린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알리시아는 가제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입을 뗐다.

"제 피는 아니에요."

"그럼 누구의 피지?"

"제임스요."

"그자가 그대를 습격한 건가?"

진작에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어울리지도 않게 손님 대접을 했다. 카벨레누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눈을 빛냈다. 제임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대로 찢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제임스가 아니라, 저예요."

"그대라고?"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죠."

"……."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옅게 웃는 알리시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핏자국이 빤히 보임에도 그녀가 말하는 다른 방법은 쉽게 유추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가 머뭇거리는 사이, 알리시아는 헝클어진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제임스가 미카엘에게 상처를 준 모양이에요."

"상처?"

"자세한 내용은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일부러 상처 입히려고 잔인한 말들을 퍼부었을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미카엘은 제임스를 잘 따라서……."

알리시아가 힘없이 입꼬리를 떨어트렸다. 제임스를 협박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셈이었지만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에게서 완벽한 대답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사실상 실패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자신에게 보였던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면, 그가 무슨 짓을 했을지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제임스가 한 말들은 저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커요. 실제 경께서도 미카엘을 발견하셨을 때, 절 언급할 때마다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거든요."

"……."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미카엘을 발견하면 제가 가장 먼저 안아주려고요."

알리시아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카벨레누스는 숨이 차 발갛게 물든 알리시아의 뺨에 손을 댔다. 알리시아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제가 좀 더 냉정해졌어야 했어요."

"그대 탓이 아니야."

"아니긴요. 절 생각해서 제임스를 눈 감아주신 거잖아요."

"……."

"실은 계속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어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 꼬인 관계긴 해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알리시아는 잠든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세상 모르게 잠에 취한 아이의 얼굴은 부어 있었다.

"저번에 그대가 운 것도 그놈 때문이지?"

"……알고 계셨어요?"

"그대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내 밑에 없거든."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감추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해주고 싶은 걸 해주지 못해서 후회했던 시절은 이미 겪어본 터였다. 이제 그는 여자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해줄까?"

"……."

"그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로 해줄 테니, 그대는 명령만 해."

금색 눈이 번들거렸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미 그녀는 무엇이 가장 잔인한 답이 될지 알고 있었다.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더는 그 일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카벨레누스가 지금껏 제임스를 참아온 건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묵인하는 순간, 어떤 결말이 날지는 뻔했지만, 알리시아는 끝까지 정한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 * *

"……그자가 미카엘에게 내가 친부라는 걸 밝혔다는 건가?"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알리시아는 잠이 든 미카엘을 보며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언젠가는 알려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알려지진 않길 바랐어요."

"게다가 미카엘은 날 좋아하지 않으니 더 하겠지."

"아뇨. 미카엘은 당신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과 아버지로 여기는 건 다른 문제지."

미카엘은 숨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에 비친 호감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시선은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미카엘은 자신을 부모로서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모른 척하실 건가요?"

"잘 모르겠어. 이제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도 웃기니까. 아이가 충격 받지 않는 방향으로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

"아직 어리잖아. 당분간은 완벽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어도 나쁘지 않지."

"미카엘이라면, 완벽한 아버지보다 가까이에 있는 아버지를 원할 거예요."

"……."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렸다. 쌕쌕 잠이 든 아이는 순진무구했다. 피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미카엘은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당신을 많이 좋아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알리시아의 미소에 카벨레누스는 짤막한 숨을 뱉었다. 스스로를 괴물이라 지칭하던 미카엘을 떠올리니 아직도 속이 뜨거웠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 걸 그랬나봐."

카벨레누스의 턱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거친 손길에 잘 손질된 머리카락이 멋대로 헝클어졌다. 한 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됐다. 8년 전 그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미카엘이 자신이 괴물이 아니냐고 물어보더군."

"맙소사……."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아니라고 했어.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 비웃었지. 내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잖아."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미카엘을 괴물이라 칭했던 건 자신이었다. 이제와서 아이의 입에서 나온 괴물 소리에 불쾌감을 느낀다는 건 모순이었다.

"후회하세요?"

"그래. 후회해. 물론,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저희 미래가 달라지잖아요."

"……."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그럼에도 자신 없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이상하기만 해."

"처음에는 누구나 그래요. 저도 그랬는 걸요."

"……그대도 그랬다고?"

"너무 힘든 나머지, 아이를 원망했던 적도 있었죠.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순간도 있었어요."

"……."

"참 못났다는 거 아는데, 그때는 그랬어요."

알리시아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지만, 미카엘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선 계속 그랬다. 짐승으로 태어난 아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언제나 비밀이 들킬까 두려워 초조해야만 했고,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도망치며 몇번이나 생사를 오고갔다. 몸도, 정신도 피폐해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아이의 존재가 너무도 버거웠다.

"그런데 모순적인 건, 그렇게 힘든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예요."

"……."

"그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때는 그걸 몰랐어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

"당신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만큼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거잖아요."

"……."

"그렇다면, 그만큼 지금의 미카엘을 봐주세요. 그동안 못 했던 것만큼 사랑해주세요. 예뻐해주세요. 그리고, 다정하게 보듬어주세요."

"고작 그런 거로 되는 건가?"

카벨레누스가 인상을 썼다. 알리시아의 입가에 성자처럼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애당초 아이가 원하던 건 대단한 게 아닌 걸요."

두 손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시선에 맞춰 몸을 낮췄다.

"……내가 친부라는 걸 밝혀도 괜찮은 걸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알리시아의 손끝이 부드럽게 카벨레누스의 귀 뒤를 어루만졌다.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알리시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덧 치맛자락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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