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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7)화 (97/164)
  • 97화. 내가 괴물이에요?

    2021.02.04.

    "가제프."

    "아가씨는 방에서 쉬고 계시기로 하셨던, 잠깐! 이 피는…… 설마 다치신 겁니까?"

    알리시아를 알아본 가제프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는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재빨리 입을 뗐다.

    "내 피는 아니야."

    "아가씨의 피가 아니라고요?"

    가제프는 미간을 찡그리며 펜리르를 올려다봤다. 펜리르는 조용히 시선을 회피했다. 공범은 말이 없는 법이었다.

    "실은 일이 좀 있었거든."

    "그럼 혹시 습격이라도-."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미카엘은 찾았어?"

    "지금 막 도련님의 흔적을 찾은 참입니다. 전하께서 움직이셨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제프는 알리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흔적을 찾았다고? 정말이야?"

    알리시아는 성급히 가제프의 손을 꽉 잡으며 울음을 꾹 잡았다. 턱 막혔던 숨이 이제야 좀 쉬어지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도련님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발자국?"

    "도련님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골동품 창고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바닥에 먼지가 듬뿍 쌓여 있었던 곳이었죠."

    "미카엘이 왜 그런 곳을 간 거지?"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미카엘은 종종 슈바르한 성을 탐험한다면서 돌아다녔지만 아이는 겁이 많은 편이었다. 모험이라고 해도 항상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길로만 다녔다.

    "도련님은 창고로 가신 게 아닙니다."

    "창고로 간 게 아니라고? 그럼?"

    "창고로 가던 도중, 도련님의 발자국이 끊겼거든요."

    "그럼 누군가 미카엘을 납치했다는 거야?"

    알리시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잊으려 해도 8년 전의 악몽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발자국은 도련님의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럴 확률은 낮습니다!"

    "그러면, 미카엘은……."

    "슈바르한 성에는 숨겨진 통로가 많습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온 후로 대부분의 통로를 파악하고 기록해뒀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카엘이 숨겨진 통로를 찾았다는 거야?"

    "저희는 그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간 발자국만 있고 나온 발자국이 없거든요."

    "그럼 그 통로는 어디 있어?"

    가제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와 펜리르는 동시에 가제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가제프가 바라본 방향에는 휑하게 뚫린 벽과 그 밑에 쌓인 돌더미가 있었다.

    "……설마 전하께서 저러신 겁니까?"

    펜리르가 이마 위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울리지 않은 위치에 뚫린 벽의 단면은 때가 탄 다른 벽돌에 비해 유난히도 깨끗했다. 최근에 잘려나간 흔적이었다.

    "아무래도 숨겨진 통로를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망치로 벽을 부술 생각이었는데……."

    가제프는 멋쩍게 웃으며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렸다. 통로를 찾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곧장 검을 뽑던 카벨레누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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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미카엘은 벽면에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하도 울다보니 이제는 우는 것도 지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절 바라보는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은 조금도 변함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선명하게 빛나는 금안을 번뜩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카엘은 한참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희들, 거기서 뭐 해?"

    크르르르르-.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낮게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뿐이었지만. 미카엘은 조금 더 눈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뗐다. 무거운 침묵보다는 그래도 입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너희들이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어?"

    "너희,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역시 혼자 떠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카엘은 다음 할 말을 골똘히 생각하다 말고 그대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번뜩이는 눈동자들이 무서웠지만, 자꾸 보다보니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아이에게 있어선 익숙한 것이었다. 미카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손을 휘저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고장난 기계처럼 움직이던 미카엘의 걸음이 멈췄다. 손에 뭔가 닿았다. 모가 굵은, 거친 짐승의 털이었다. 미카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잡고 있는 짐승이 거대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은 괴물이지? 그래서, 날 데리러 온 거지?"

    미카엘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순간에도 무수한 눈동자들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삼촌이 그러는데, 내가 괴물이래."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미카엘은 울지 않기 위해 손에 꽉 힘을 줬다.

    "그런데 나는 괴물하기 싫어. 그렇게 되면 더는 엄마를 볼 수 없게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 해주면 안 될까?"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미카엘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괴물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괴물은 미카엘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렸다.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할짝-.

    "힉!"

    뺨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미카엘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코앞에 있는 금안에 그대로 굳었다.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아이의 얼굴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 핥아준 거야?"

    물음 대신, 돌아온 건 두툼한 혀였다. 미카엘은 축축해진 뺨을 손으로 닦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혹시, 너 내 말 알아듣는 거야? 그렇지?"

    미카엘의 두 눈이 빛났다. 어둠 속이라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 고개가 움직였다. 미카엘은 좀 더 기대 어린 눈으로 괴물의 털을 살짝 당겼다.

    "그럼 나 엄마에게 데려다주면 안 돼? 응?"

    괴물은 미카엘을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카엘은 금세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진짜 안 돼?"

    할짝-.

    "아니, 핥는 거 말고!"

    할짝-.

    "이래도 소용없어!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단 말이야!"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얌전히 사고치지 말고 있었어야지."

    "……아저씨?"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미카엘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카벨레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은 금세 울상이 되어 울먹거렸다.

    "아저씨, 어딨어요!"

    "어딜 보고 있는 거야."

    "히이익!"

    불쑥 튀어나온 손에 미카엘이 놀라 뒤로 넘어갔다. 카벨레누스는 넘어질 뻔한 아이를 잽싸게 잡아채며 미간을 찡그렸다. 미카엘은 마주친 카벨레누스를 보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아저씨,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미카엘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심호흡을 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카벨레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나긴. 나는 계속 여기 있었어."

    "아저씨가 여기 있었다고요?"

    "그래. 내가 계속 불러도 네가 대답하지 않았지."

    "그럴 리가요. 여기에 있었던 건……."

    미카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쩐 일인지 주변이 무척 환했고 괴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놀고 있는 거야."

    카벨레누스가 들고 있던 등불을 미카엘 쪽으로 좀 더 가져갔다. 불그림자가 일렁거리는 아이의 얼굴은 운 흔적이 역력했다.

    "논 게 아니에요! 그냥 괴물의 소리가 들려서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미카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절 내려다보는 카벨레누스와 시선을 마주치다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다리에 매달렸다.

    "뭐 하는 거야."

    "아저씨랑 있으면 괴물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요."

    "뭐?"

    미카엘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다리를 조이는 어설픈 힘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래요. 방금 전까지 여기 괴물들이 되게 많았는데 아저씨가 오니까 사라졌어요."

    "괴물이 여기 있었다고?"

    "네. 여기 있었어요."

    "언제까지 여기 있었는데?"

    카벨레누스의 눈썹이 위를 향했다. 이곳에 있던 건 멍하니 서 있던 미카엘 뿐이었다.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가 날 만지기 전까지요."

    "……."

    "아저씨는 이번에도 괴물 못 본 거예요?"

    "그래. 못 봤어."

    카벨레누스는 대답하면서도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빨리 사라진다 해도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지만, 이곳에는 흔적이 없었다. 마물 특유의 냄새는커녕, 미세한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괴물이 아저씨를 무서워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처음부터 내가 볼 수 없는 괴물이었을지도 모르고.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삼키며 천천히 등불을 움직였다. 등불로 비춰진 벽면에는 빼곡하게 그림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금안의 마물들을 연상케하는 벽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이를 홀려서 여기까지 끌고 온 데에는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

    "괴물들이 무서워할 만도 해요. 아저씨는 성격이 나쁘잖아요."

    "아직도 잘만 떠드는 걸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미카엘의 머리를 꾹 눌렀다. 다행히 눈을 말똥말똥 뜬 아이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조사보다는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먼저였다.

    "아저씨, 나 걱정했어요?"

    "맨날 얼쩡거리던 게 없으니 이상했을 뿐이야."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떼어놓고 품에 등불을 안겼다. 마정석이 들어간 등불은 안고 있으면 따뜻했다. 미카엘은 손 안의 빛을 만지작거리다가 슬쩍 카벨레누스의 옆에 붙었다. 단단한 사내는 곁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든든해졌다.

    "있죠. 나는 솔직히 아저씨가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어요."

    "지킨다고 했잖아. 나는 하기로 한 건 해."

    "그럼 다음 번에도 또 지켜줄 거예요? 내가 어떤 곳에 있든, 뭘 하든 간에 항상요?"

    "그래."

    툭 던져진 카벨레누스의 대답에 미카엘은 배실배실 웃었다. 다소 성의가 없긴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나 예전보다 아저씨가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고작, 조금 더?"

    "다른 건 몰라도 새아빠 문제만큼은 신중히 생각해야 하거든요."

    "……."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이 문제만큼은 양보 못 해요!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 만나야 한단 말이에요!"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빤히 보다가 몸을 낮췄다.

    "이리와."

    "왜, 왜요?"

    "안아줄게."

    미카엘은 미간을 좁히며 뒤로 물러섰다.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카벨레누스는 수상했다.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요?"

    "나랑 있으면 괴물이 사라지는 것 같다면서."

    "……."

    "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와."

    미카엘은 주춤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그와 동시에 몸이 붕 떴다.

    "아저씨."

    "왜."

    "……엄마, 울었어요?"

    "알면 다신 몰래 사라지지 마."

    카벨레누스의 손이 미카엘의 등을 꾹 눌렀다. 어색하게 안겨 있던 미카엘은 뺨에 닿은 체온에 슬그머니 긴장을 풀었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사내는 자신을 너무도 가볍게 들었다. 그게 참 좋았다. 미카엘은 두 팔로 카벨레누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두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뺨에 닿은 온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있잖아요, 아저씨. 나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내가 괴물이에요?"

    "……."

    순간,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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