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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6)화 (96/164)
  • 96화. 모순적이게도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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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짓이지? 나는 대공 전하의 손님이야! 지금 당장 꺼내줘!"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복도를 울렸다. 알리시아는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하실 수 있으십니까?"

    "검을 빌려주시지 않을 거면 돌아가셔도 좋아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굳이 영애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펜리르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손에 닿았다. 다소 거칠어 보였지만, 작고 하얀 손에는 쇠붙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경의 손은 더럽혀도 되는 것인가요?"

    "저야, 워낙 이런 일에 익숙하니까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라고요?"

    알리시아의 뒤를 따르던 펜리르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뒷모습만 봐선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펜리르는 입을 떼려다가 멈춘 알리시아를 보곤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검을 들어주겠노라는 핑계로 따라오긴 했지만 본심은 달랐다. 알리시아의 검 역할을 해줄 참이었다.

    "알리시아!"

    알리시아를 발견한 제임스가 달려왔다. 그는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알리시아, 얼른 말 좀 전해줘! 나는 네 손님이라고, 내게 이딴 짓을-."

    "꺼내."

    "수상한 자입니다."

    "괜찮으니 꺼내주도록 해. 책임은 내가 질게."

    병사는 머뭇거리다가 열쇠를 꺼냈다. 알리시아는 제임스가 풀려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바라봤다.

    "고마워, 알리시아.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나봐."

    감옥에서 나온 제임스가 멋쩍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진 짐 가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한 거야?"

    "협회에서 급한 연락이 왔거든."

    "내게 연락도 안 하고 떠날 정도로 급한 연락이야?"

    "사정이 있었거든."

    제임스는 고개 돌리다가 펜리르를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 못지 않게 장신인 금발의 사내는 훤칠하니 눈에 확 띄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제임스는 엉망이 된 자신의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에게 제압당하며 바닥을 뒹굴었으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 자신은 꼴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내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이야?"

    "미안해, 중요한 일이라서."

    제임스는 손끝으로 셔츠의 얼룩을 지워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셔츠를 깨끗하게 돌릴 수 없었다. 제임스는 닦아내는 걸 포기하고 손으로 얼룩을 가렸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았다.

    "제임스. 혹시 미카엘 못 봤어?"

    "왜 내게서 미카엘을 찾아?"

    "내 생일선물을 준비하느라고 너와 자주 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말했다시피 나는 협회 연락을 받고 급하게 떠나느라고 말이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거든."

    "그래?"

    "미안하지만 먼저 가봐도 될까.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래."

    "급한 일이라면 가봐야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제임스는 보란듯이 여행 가방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그는 알리시아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말없이 펜리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펜리르는 조심스럽게 품에 넣어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지금은 몸이 안 좋으시니까요. 무거운 건 좋지 않죠."

    펜리르는 슬쩍 허리춤의 검을 손으로 가리며 단검만 알리시아에게 내밀었다.

    "상냥하시네요."

    "영애를 지키는 게 제 본분이거든요."

    펜리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리시아는 그의 허리춤에 찬 장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단검을 집어들었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날붙이였지만 묵직한 감각은 이제 제법 익숙했다. 자신은 어머니와 약속한대로 루베르타인으론 갈 수 없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알리시아가 펜리르와 병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펜리르는 당황해 미간을 좁혔다.

    "설마 둘만 있겠다는 건 아니시죠?"

    "잠깐이면 돼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금방 끝날 거예요."

    펜리르는 머뭇거리다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틈을 노리려 해도 알리시아는 물러설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너무 길어지면 들어오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무리하시지 마시고요."

    펜리르는 그 말을 하고도 한참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겨우 발을 뗐다. 알리시아는 펜리르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제임스.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이야기? 무슨 이야기?"

    제임스가 양 입술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리시아는 제임스의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내게 검을 들이밀면서?"

    "상황에 따라선 이걸로 널 상처 입힐 수도 있어."

    "알리시아."

    "아니면, 아예 죽여버릴 수도 있고."

    알리시아가 빤히 제임스를 바라봤다. 제임스는 당황해 입만 뻐금거렸다.

    "……너, 날 안 믿는구나."

    "내가 아는 제임스 닉슨은 이렇지 않으니까."

    "알리시아."

    "당장 말해. 미카엘, 어딨어."

    알리시아의 두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미카엘을 왜 내게서 찾아?"

    "미카엘이 사라졌으니까."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미카엘이 사라졌는데 왜 내게 그 이유를 묻냐고."

    "내가 아는 제임스라면, 미카엘이 사라졌다는 말에 걱정부터 했겠지만, 지금의 너는 변명하는 데에만 급급해 보이니까."

    "그건 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정말 오해야?"

    "……."

    제임스의 눈가가 떨렸다. 알리시아는 헛숨을 뱉었다.

    "다시 물을게. 미카엘 어딨어."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 그럼 다시 물을게. 미카엘에게 무슨 말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제임스가 단호히 말했지만 알리시아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제임스는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을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미카엘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건 도가 좀 지나쳐. 애가 조금 울었다고 해서 검을 들고 사람을 협박하는 경우가 어딨어."

    "네가 미카엘을 울린 거라면, 분명 상처 입혔을 테니까."

    "미카엘은 내게도 자식 같은 아이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다고?"

    "그래. 내가 그럴 리, 아아아악-!"

    제임스가 손을 뻗는 순간, 붉은 피가 사방에 튀겼다. 알리시아는 치맛단에 튄 핏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제임스는 상처난 손을 꽉 쥔 채, 이를 악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정말로 날 공격한 거야?"

    “오늘 알았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왼쪽 입꼬리가 떨린다는 걸."

    "뭐라고?"

    "지금 당장 미카엘에게 무슨 짓 했는지 말해."

    "알리시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그저-."

    "말하라고."

    알리시아가 으르렁거리며 검을 겨눴다. 단검 끝에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강한 척 하지 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거 알아."

    "그렇다면 피하지 마."

    알리시아가 무심히 검을 휘둘렀다. 제임스는 가까스로 검을 피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휘두르지 못할 걸 안다면서 왜 피해?"

    "알리시아!"

    "네게 고마웠어. 지금껏 네 도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참았고 좋게 생각하려고 애썼지."

    미카엘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알리시아의 눈이 번뜩였다.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분명 눈앞의 여자는 알리시아인데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말해봐.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 알리시아, 나는 그저……."

    "변명할 필요 없어.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무슨 말을 했는데."

    알리시아는 다가섰고 제임스는 물러났다. 날카로운 칼날이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미카엘이 자기 친부를 알고 있었어! 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친부가 슈바르한 대공이라는 걸 알고 충격 받은 거라고!"

    "그 사람 때문이라고?"

    알리시아가 짧게 숨을 뱉었다. 제임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 사람 때문이야! 처음부터 전부 그랬어!"

    "……."

    "애당초 대공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잖아!"

    "……."

    "전부 그 사람이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만 없어지면-."

    "아니. 그 사람이 없었어도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 거야."

    알리시아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간의 정을 한꺼풀 벗겨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제임스와 좋은 친구로 남기 위해 억지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항상 내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웬만하면 네 기준에 맞춰 따랐어. 내게 있어서 너는 평범함의 기준 같았거든."

    "……."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평범하다 그렇지 않다를 논할 수 있겠어."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전에 내가 이상하다고 했지? 그런데, 내 기준으로는 네가 이상해."

    "……내가 이상하다고? 네 기준으로?"

    제임스가 비아냥거리며 알리시아를 노려봤다.

    "그래. 이상해."

    알리시아는 거칠게 숨을 뱉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사람이 결혼했다는 거짓말도, 그 사람이 날 찾지 못하게 내 흔적을 지운 것도 날 위해서란 말로 포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건 아니잖아."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야?"

    "미카엘에게 상처 줬잖아. 매번 모든 걸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항상 널 위해서만 합리화를 하잖아."

    "나는 잘못 없어. 나는 늘 너와 미카엘을 위해-."

    "아냐. 그건 우릴 위한 게 아니야."

    단호히 고개를 젓는 알리시아에 제임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대공이 그렇게 말하라고 해?"

    "아니. 내가 판단한 거야."

    너, 계속해서 왼쪽 입꼬리가 떨리고 있거든. 알리시아는 검을 고쳐잡았다. * * * 쨍그랑-. 피 묻은 단검이 바닥을 굴렀다. 펜리르는 재빨리 알리시아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옷이 더러워지실 거예요."

    "지금은 옷이 문제가 아니죠."

    펜리르는 망설임없이 다시금 알리시아를 부축했다. 알리시아는 이번에는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일단 영애를 방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펜리르는 알리시아를 끌어안으며 흘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는 기절한 제임스가 쓰러져 있었고 그의 어깨 부근에는 피가 흥건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여자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검을 쓰는 데에 익숙했다.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두 번 휘둘러본 솜씨는 아니었다.

    "방 말고, 전하께 데려다주세요."

    "전하께요?"

    "그게 우선이에요."

    "……."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괜찮다가도 가끔씩 다리에 힘이 풀리거든요."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펜리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순적이게도 피에 젖은 꼴을 했으면서도 웃는 여자는 가련해 보였다. 도무지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제임스를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좀 닦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전하께서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그러면 가면서 닦을게요. 급한 일이거든요."

    알리시아는 펜리르가 건넨 손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았다. 새하얗던 손수건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손수건은 새로 사드릴게요."

    "손수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께서는 지금 손수건이 아니라……."

    "손수건이 아니면요?"

    알리시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반사적으로 펜리르의 목울대가 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괜히 입안이 바짝 말랐다. 피를 뒤집어쓴 와중에도 여자에게선 풀내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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