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95)화 (95/164)
  • 95화.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2021.01.28.

    "분명 여기 있었는데……."

    펜리르는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카벨레누스는 텅 빈 자리를 노려보다가 가제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사람을 풀어."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셨을 테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찾을게요."

    "그대는 쉬고 있어."

    "제가 미카엘의 엄마예요. 이렇게 가만히……!"

    순간 알리시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알리시아!"

    카벨레누스는 급히 알리시아를 부축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알리시아는 통증을 느낄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찾을 테니까. 그대는 쉬는 게 우선이야."

    "하지만-."

    "그런 몸 상태로 움직여봤자 도움 되지 않아. 알잖아."

    냉정하게 내려진 판단에 알리시아의 눈이 떨렸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고쳐 안았다.

    "이제는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

    "……."

    "그대만 미카엘을 지킬 책임이 있는 게 아니잖아."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얼마든지."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그를 버팀 삼아 몸을 똑바로 세웠다.

    "미카엘이 잘 가는 곳을 알아요. 일단 그곳부터 먼저 수색해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 그대는 좀 쉬고 있어. 방에 데려다줄게."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부축해드려도 될까요?"

    앞을 막은 펜리르에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대가?"

    "성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저보다 전하가 움직이시는 편이 낫죠."

    "방까지 가는 데 얼마 걸리지-."

    "그게 좋겠네요. 그렇게 해주세요."

    "알리시아."

    "지금은 미카엘을 찾는 게 우선이에요."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숨을 뱉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하지."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안은 팔을 풀자마자, 펜리르는 재빨리 알리시아를 부축했다.

    "모셔다드리고 저도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린 펜리르가 애써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팔을 잡은 펜리르의 손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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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타닥, 탁, 탁-. 미카엘은 귀를 막은 채 무작정 내달렸다. 기괴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금방이라도 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저 기괴한 소리의 괴물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거짓말쟁이. 그때 분명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고인 눈물이 미카엘의 뺨을 스쳐 떨어졌다. 누구든 달려와 자신을 안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보이던 왕래하던 하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악!"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발끝에 뭔가 걸렸다. 얼떨결에 넘어져 바닥을 구르게 된 미카엘은 젖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더는 괴물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카엘은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제대로 둘러보게 된 풍경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여긴 어디지?"

    그동안 마음껏 헤집고 다녔던 슈바르한 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풍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크르르르르-. 그 순간, 등 뒤에서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토끼 눈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렉스."

    털이 북실북실한 렉스를 발견한 미카엘의 두 뺨이 홍조를 띄었다. 말만 하지 못할 뿐이지, 렉스는 좋은 친구였다. 미카엘은 재빨리 렉스 쪽으로 다가섰다. 렉스는 미카엘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도대체 어떻게 나온 거야?"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혹시 아저씨한테 가는 거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미카엘은 연신 재잘거렸다. 그러지 않고선 음침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응? 이쪽으로 가자고?"

    렉스가 미카엘의 소매를 살짝 물어 당겼다. 미카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두컴컴한 길을 응시했다.

    "이쪽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음. 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그렇게 당기지 마!"

    렉스의 송곳니는 날카로웠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엄마가 입혀준 옷이 망가질 것이었다. 미카엘은 엉거주춤 렉스가 당기는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렉스는 그제야 물고 있던 소매를 놓고 몸을 돌렸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야?"

    점점 더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 미카엘은 인상을 썼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믿을 만한 건 렉스의 뒷모습 뿐이었다.

    "안 되겠어, 렉스. 돌아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미카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고개 돌린 렉스의 눈동자 색은 선명한 금색이었다.

    "렉스, 너 눈이 아저씨 같-."

    콰앙-! 그때였다. 거친 울림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균형을 잡았다.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끼이이이익-. 서 있는 공간이 회전하고 있었다.

    "렉스, 여기 이상해! 당장 도망쳐야…… 렉스?"

    미카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더 이상 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미카엘은 성급하게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미카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엄마! 엄마!"

    공포가 밀려오자, 떠오르는 건 엄마의 얼굴뿐이었다. 미카엘은 굳게 닫힌 문을 연신 두드리며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여전히 자신은 혼자였다.

    "엄마……."

    문을 두드리던 미카엘의 손에 힘이 풀렸다. 미카엘은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시금 괴물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 *

    "부축해주셔서 고마워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조금요."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입술을 말았다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카엘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에선 표정 관리조차 할 수 없었다.

    "불안하신 모양이십니다."

    "자식이 사라졌는데 불안하지 않은 부모는 없겠죠."

    "세상엔 꼭 좋은 부모만 있지 않으니까요."

    "……."

    펜리르는 잔에 물을 따라 알리시아에게 건넸다.

    "의외네요. 솔직히 저는 고집 피우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알리시아가 쓰게 웃었다. 몸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 몸으로는 이제 제대로 달릴 수조차 없었다.

    "이성적이시군요."

    "이성적이려고 노력하는 거죠."

    알리시아는 펜리르가 건넨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끓어오르는 속을 달랠 수 없었다.

    "저 말고도 미카엘을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알리시아는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신경이 바늘 끝보다 날카로워졌음에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이죠. 그럴 거예요."

    선뜻 고개를 끄덕인 것과 달리, 알리시아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펜리르는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막연하게 서 있었다.

    "제가 여기 있어도 딱히 큰 도움은 될 것 같지 않군요. 영애께서 쉬실 수 있게 저는 이만 나가-."

    "아까 미카엘이 울고 있었다고 했죠?"

    "네?"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경께서 미카엘이 울고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맞죠?"

    "아, 네. 그랬죠."

    "혹시 왜 울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알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알리시아의 흰자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펜리르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아이가 사라질 만한 일이 있었나요?"

    "사라질 만한 일이라뇨?"

    "실은 아까 아이를 만났을 때, 엄마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요."

    "……."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선 좀 예민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더욱 더 붉어진 눈을 보니 입을 떼는 게 더 어려웠다. 펜리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여서 죄송합니다."

    "아뇨. 경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단지 생각을 좀 하고 있을 뿐이에요."

    "생각이요?"

    "미카엘은 혼자서 울고 있을 아이가 아니거든요."

    미카엘에게 있어서 모든 기준은 알리시아였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녀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졌다. 울 만한 일이 있었다면 혼자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알리시아의 품에서 울어야 했다.

    "정말로 미카엘이 왜 울었는지 모르시나요?"

    "제겐 사생활이라고만 해서요."

    펜리르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새침하게 흘겨보던 아이는 당돌했다.

    "그럼, 다른 이상한 건 없었나요?"

    "이상한 거요?"

    "뭐든 좋으니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미카엘이 울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저도 잠깐 본 거라서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뭐든 좋아요. 부탁 드릴게요."

    간절한 시선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펜리르는 턱을 괸 채, 희미한 기억을 되짚으려고 끙끙거렸다.

    "인적 드문 구석에서 울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슬픈 일이겠죠?"

    "슬픈 일이요?"

    "영애의 말씀대로라면 혼자 울지 않은 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던 거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겼을 확률도 크고요."

    "오늘 아침까지 그런 기색은 없었어요."

    "그럼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확률이 크겠죠."

    펜리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서 탐정 노릇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대 어린 시선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밖에 다른 건 없나요?"

    "글쎄요. 애당초 너무 짧은 만남이라서…… 아! 그렇지! 그러고보니 개인적으로 좀 수상한 사람을 만나긴 했습니다."

    "그게 누구죠?"

    "예전에 영애와 서재에서 대화를 나눴던 남자 말입니다. 은발에 예쁘장하게 생긴-."

    "제임스 닉슨."

    알리시아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답했다. 이미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펜리르는 당황해하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제임스에게요."

    알리시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제임스는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감은 얼마든지 미카엘에게 향할 수 있었다.

    "벌써 떠났을 겁니다. 여행 가방을 들고 있던 걸 봐선 서둘러 떠나려는 것 같더라고요."

    "그자가 짐을 챙겨서 떠났나요?"

    "네. 마침 그때 마주쳤죠."

    "그렇군요."

    알리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뗐다. 펜리르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미 떠난 사람이에요. 그자에 대해 전하께 말하는 건 제가 할 테니, 영애께서는 쉬시는 게-."

    "그자가 떠났을 리 없어요. 이곳은 슈바르한 성인걸요."

    "그게 무슨 뜻이죠?"

    "슈바르한 대공의 허락 없인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의미죠."

    역시, 매력적이다.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가련한 얼굴을 한 여자의 번뜩이는 두 눈동자는 야만적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포식자의 땅이라는 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자를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자가 미카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캐내야죠. 미카엘을 찾기 위해 뛰어다닐 순 없어도 추궁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도움이 필요하실까요?"

    "상황에 따라선 필요할 수도 있겠죠."

    알리시아는 그의 허리춤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검이 있었다.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손을 빌려드리죠."

    "아뇨. 손은 필요 없어요."

    "네?"

    "검만 빌려주세요."

    알리시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미카엘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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