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94)화 (94/164)
  • 94화. 부모의 낯

    2021.01.25.

    '내가 뭘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펜리르는 주머니 속 서신을 만지작거리며 짤막한 숨을 뱉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지켜줘서 그녀가 상처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다른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내심 있었다. 그건 그가 지금껏 골라온 선택지 중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툭-. 그때였다. 돌아서 들어가는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영에 그대로 몸이 부딪혔다. 펜리르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인영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딴 생각을 하고 걷다보니 그만……."

    "……."

    "아! 저번에 봤던 분이군요. 맞죠?"

    펜리르가 약간 허리를 굽히며 눈을 크게 떴다. 서재에서 한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상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탐스러운 은발을 가진, 그것도 아름다운 미형의 사내는 흔히 보기 어려웠다.

    "음. 혹시 기억 못 하시나요?"

    "죄송합니다.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제임스가 짧게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긴, 잠깐 본 거니 그럴 수 있겠네요."

    펜리르는 자연스럽게 제임스의 앞을 막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노련한 사내의 시선은 제임스가 들고 있는 가방을 향해 있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나 봅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시군요."

    "걱정하는 거죠. 아시다시피 떠나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요."

    펜리르가 턱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어느덧 창밖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슈바르한의 밤은 유독 혹독하다고 들었는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제임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들어갔다.

    "이런. 제가 괜한 참견을 했나 보군요."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데, 그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펜리르는 옆으로 비켜 제임스가 갈 수 있게 도왔다. 제임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급히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게 수상하네."

    어차피 멀리 가진 못하겠지만. 펜리르는 멀어지는 제임스를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행동 없이 가던 걸음을 도로 옮겼다. 어설픈 도망자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나, 슈바르한 성은 잘 짜인 거미줄과도 같았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포식자의 영역이었고 요란스럽게 발버둥칠수록 엉킨 줄에 옴짝달싹하지 못할 뿐이었다.

    "미리 명복이라도 빌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펜리르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펜리르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끅끅거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펜리르는 더욱 미간을 좁히며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소리는 복도 안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흑, 흡, 흑……."

    "거기 누구 있습…… 이런……."

    처음에는 조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펜리르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서둘러 웅크려 있는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한쪽 벽면에서 공벌레처럼 몸을 만 아이는 한참 내려다봐야할 정도로 작았다.

    "꼬마야, 너 왜 여기서 울고 있어? 네 엄마-."

    "흐아아앙-!"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갑자기 우렁차게 우는 아이에 펜리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늘 속 가려져 있던 아이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나 운건지,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된 얼굴은 부어 있었음에도 묘하게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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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펜리르는 제 옆에서 함께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이는 낯선 사내를 흘끔 올려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았다.

    "다 울었어?"

    "……네."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이의 눈은 퉁퉁 부어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있지, 꼬마야."

    "미카엘이에요. 미카엘 누스."

    "미카엘 누스?"

    "제 이름이요."

    "좋은 이름이네."

    펜리르는 예의상 칭찬을 건네면서도 턱을 괬다. 고급 옷을 입고 슈바르한 성에 머물 수 있는 아이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가 누구인지 정확하기 유추하기 어려웠다. 카벨레누스의 아이라면 못해도 검은 머리카락 정도는 타고나야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긴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아이에겐 그 무엇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카엘을 알리시아의 아이로 보기도 어려웠다. 미카엘은 알리시아처럼 적갈색 머리카락과 잿빛 눈동자를 가졌지만, 문제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알리시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소유욕을 주장하던 카벨레누스가 다른 사내의 아이를 품어준다는 건 이상했다.

    "누가 지어준 이름이야?"

    "내 이름은 엄마가……."

    미카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멈췄던 눈물이 도로 고이고 있었다.

    "엄마한테 혼나서 우는 거였어?"

    "그런 거 아니거든요."

    미카엘은 발끈하며 거칠게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한테 혼난 것도 아닌데,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어."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뭔데?"

    "사생활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

    요즘 애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빠른 건가. 펜리르는 곁눈질로 미카엘을 살폈다. 아이는 나름대로 대단한 고민 중인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그것도 사생활이에요."

    "그럼 내가 너희 부모님께 널 데려다주는 건 어때?"

    펜리르는 주머니 속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서신의 내용을 전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우는 아이를 홀로 두고 가는 것도 찜찜했다.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을 걸?"

    "그래도 지금은 싫어요."

    미카엘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 똑바로 보며 외치던 제임스의 두 눈이 잊히지 않았다. 자신은 미움 받고 있었다.

    '나는 괴물이 아닌데…….'

    무름을 감싼 미카엘의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가 괴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자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진짜 괴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눈가가 시큰거렸다.

    '내가 진짜 괴물이면 어쩌지. 그래서 엄마가 불행해지면…….'

    미카엘의 몸이 떨렸다.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엄마가 불행해지는 건 싫었다. 엄마는 웃을 때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부모님한테 가기 싫으면, 그럼 잠깐만 나랑 같이 갈래? 내가 해결할 일이 조금 있거든."

    "엄마가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랬어요."

    "어? 음, 맞아. 그건 중요하지."

    펜리르가 멋쩍게 웃었다.

    "할일이 있으면 가요. 나는 혼자 있어도 돼요."

    "혼자 울면 외롭잖아."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선 별다른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펜리르는 미카엘의 눈치를 살피며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얼른 가요."

    "……그럼, 여기서 조금만 기다릴래? 내가 전해야 되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것만 전하고 올게."

    "안 와도 괜찮아요."

    미카엘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펜리르는 미카엘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신경쓰여도 지금은 서신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 * *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라면 알고 있어. 나도 방금 보고 받았으니까."

    카벨레누스는 보고서를 구기다 못해 그대로 찢어버렸다.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불꽃이 일 것 같았다. 펜리르는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는 곧장 입을 뗐다.

    "소문에 따르면, 전하께서 진짜 제국의 주인이라고 하더군요."

    "로아킨을 비롯해, 지금껏 퍼진 현 황제에 대한 소문들과 섞이면서 더욱 인기를 얻게 된 소문이지."

    "문제는 그 소문에 덧붙여진 이야기지만요."

    펜리르는 쓰게 웃었다. 최근 도는 제르페누스의 악행 중 가장 유명한 건, 황제가 이복동생을 홀리기 위해 보낸 요부에 푹 빠진 슈바르한 대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분을 모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입니다."

    "알아. 지나치게 의도적이지."

    "의외로 태연해 보이시는군요."

    "고작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더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대신관은 재앙을 조작하고 여론을 모으는 게 특기지. 그리고, 최근 재앙이 벌어질 때마다 여자가 목격된다는 이야기가 보고되고 있어."

    "……."

    "요부 같은 소문을 내는 게 목적이 아니야. 알리시아에게 마녀의 낙인을 찍을 셈이다."

    "설마……."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고귀한 존재로 찬양할수록 그녀를 향한 원망이 쌓이는 거지. 그리고 결국 내 손으로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게 만들 거다."

    카벨레누스는 테이블에 놓인 임명장을 노려봤다. 대신관의 인장이 찍힌 공문에는 슈바르한 대공을 신의 대리자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신의 대리자는 재앙을 제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거든."

    "그렇다면 더욱 대비를-."

    "대비는 이미 끝났어."

    카벨레누스는 가제프를 향해 손짓했다. 가제프는 재빨리 카벨레누스의 손에 그가 원하는 서류들을 얹어주었다. 지난 8년은 허투루 보낸 시간이 아니었다.

    "소문을 뒤집을 계획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 다만, 문제는 시기지."

    "시기요?"

    "내겐 황위에 오를 명분이 많아.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대공으로 살고 있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황제가 되면 적이 많아질 테니, 지금으로선 자중하시는 거겠죠."

    "그것도 하나의 답이겠지만 완벽한 정답은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선 수도가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잊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너구리를 잡기 위해 굴 앞에 불을 피우지. 연기를 마신 너구리들이 제 발로 나올 수 있도록 말이야."

    "저희가 불 역할이라는 거군요."

    "예민한 작자가 유일하게 이성을 잃는 게 로아킨이니 불 역할로는 충분하지."

    소문에 빠른 건 제르페누스의 강점이지만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소문이 있는 한, 그는 자신과 얽힌 로아킨의 이름을 확인해야만 했다.

    "황제는 유난히도 몸을 사리지. 섣불리 움직이면 꼬리를 끊고 도망갈 거야."

    "그러면 앞으로 저희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계속해서 황제를 몰아. 독에 올라서 튀어나올 때야말로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을 때니까."

    카벨레누스는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불완전한 모습이라 해도 족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대로 끝을 보기 위해서는 제르페누스와의 악연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더 궁금한 게 있나?"

    "아뇨.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법 영리하군."

    굳이 말해주지 않는 것은 따로 묻지 않는다. 어린 맹주의 아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살피고 눈치껏 문을 열었다. 방문객은 초조한 표정의 알리시아였다.

    "무슨 일이지."

    알리시아를 확인한 카벨레누스가 재빨리 움직였다. 알리시아는 매달리듯 카벨레누스의 소매를 꽉 쥐었다.

    "혹시, 미카엘을 보셨나요?"

    "미카엘? 분명 아까 만나서 분명 그대에게 가라고……."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알리시아의 방을 찾아갔을 때 미카엘은 자리에 없었다. 미카엘은 알리시아에게 돌아간 게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가제프. 사람을 풀어."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미카엘이라고 하면, 혹시 미카엘 누스 말하는 겁니까?"

    펜리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펜리르를 향했다. 얼떨결에 주목 받게 된 펜리르는 어설프게 입술을 올렸다.

    "미카엘을 보셨어요?"

    알리시아가 불쑥 다가왔다. 펜리르는 가까워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녀에게서는 옅게 풀 향기가 났다.

    "제 아들이에요."

    "아, 아들이요?"

    "제겐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예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알리시아에 펜리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실은 방금 전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울고 있어서-."

    "어디지? 바로 안내해."

    이번에 다가온 건 카벨레누스였다. 펜리르는 알리시아와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사내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을 삼켰다. 키는 비슷한 것 같은데 뿜어내는 위압감 자체가 달랐다. 으르렁거리는 사내를 보고 있자면, 맨손으로도 사람을 찢는다는 소문이 꼭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았다.

    "얼른."

    "부탁할게요."

    쏟아지는 시선에 펜리르의 목울대가 울렸다. 참으로도 이상한 일이었다. 울음을 삼켜내는 여자의 얼굴과 초조함에 이를 가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달랐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게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더는 미카엘의 부모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어졌다. 보이는 모습은 다를지언정, 두 사람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부모의 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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