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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3)화 (93/164)
  • 93화. 당신 없이는 안 돼

    2021.01.21.

    쾅! 쾅! 거칠게 두들기는 문소리에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 내에서 자신의 방문을 저런 식으로 거칠게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죠?"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야기 좀 해."

    다행히 문 너머로 들려온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알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카벨레누스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알리시아는 당황해 몸을 돌렸다가 마주친 시선에 얼굴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야기가 따로 오고가지 않았음에도 굳은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에게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이야기라뇨. 갑자기 그게 무슨-."

    "그대가 가진 힘."

    "……."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그 힘이 그대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 거 맞아?"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떨렸다. 입에 담기도 싫은 소리였는데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리시아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의사에게 가지."

    "카벨레누스."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더 들을 것도 없어."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알리시아의 손을 당겼다. 알리시아는 울먹이는 얼굴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의사에게 간다고 낫는 병이 아니에요."

    "그럼 신관을 부르지."

    "신관도 소용없을 거예요."

    "의사도, 신관도 아직 만나본 게 아니잖아. 제대로 진단을 받아. 그러고나서 되는지, 안 되는지 따져도 늦지 않아."

    카벨레누스가 으르렁거렸다. 꽉 다물려진 잇새는 억지로 분노를 삼켜내고 있었다.

    "제가 쓴 힘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그냥 죽겠다고?"

    카벨레누스가 거칠게 숨을 뱉었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인정 못 해. 어떻게서든 그대를 고칠 거야."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닌 걸요."

    "고칠 시도는 해봤고?"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숙여 알리시아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시도할 필요도-."

    "그런 거라면 됐어."

    "……."

    "그대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만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는 절대 포기 못 해."

    선명하게 핏줄 선 금안이 번뜩였다. 이제야 겨우 닿았는데 놓을 수 없다. 알리시아를 잃어버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어쩐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피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집요한 사내는 포기를 몰랐다. 그저 끊임없이 도망치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맞춰올 뿐이었다.

    "그런 건 뭐든 시도한 후에나 하는 말이지."

    "……."

    "그대는 처음부터 포기할 생각부터 하고 있잖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억지로 꾹꾹 눌러놓았던 욕심이 자꾸만 흘러나온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정해진 일인데.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포기하고 다른 곳에 집중하는 편이 나아요. 그게 최선이에요."

    "내 최선은 그대가 살아 있는 거야."

    "저는……."

    알리시아의 젖은 속눈썹 사이로 비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포기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안 되는 일이라면 진작에 포기하고 최선의 방법을 궁리하는 편이 옳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사내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목이 메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8년 전, 나는 그대가 죽었다고 생각해 수색을 멈췄지. 하지만 그대는 살아 있었어. 만약, 내가 그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더 일찍 만났을 거야."

    "……."

    "그렇게 되었다면, 그대가 미카엘을 지키기 위해 그런 힘을 쓸 이유도 없었겠지."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급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한다고 소용없다는 거 알아. 그럼에도 나는 후회하고 자책해."

    "……."

    "그리고, 다짐하게 되지. 더는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

    "여기서 포기하면 나는 분명 후회할 거야. 평생 그대의 죽음을 내 탓으로 안고 살겠지."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알리시아의 몸이 젖은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거미줄에 잡힌 양 두 손이 엉켜 들어갔다. 마디 사이를 파고든 단단하고 굵은 손가락이 여린 살을 긁는 감각이 기묘해 괜히 손끝이 말려들어갔다.

    "그대가 죽어도 나는 살 거야."

    "……."

    "어떡해서든 살아남아서 그대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거야."

    "……."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말라비틀어져서 죽은 것과 다름 없이 그렇게 살아갈 거야."

    "……."

    "그러니 내가 그러지 않길 바란다면, 살아."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내 옆에 있어. 입술 위로 쏟아지는 숨결이 마치 낙인과도 같았다. 알리시아는 광기 어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번뜩이는 금안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두 사람의 손은 더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얽혀 있었다. 고였던 눈물이 알리시아의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당신 없이는 안 돼."

    카벨레누스는 그 말과 함께, 알리시아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에도 두 손은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나는 문제에 직면하면 어떡해서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매달렸어. 그리고 결국 해답을 얻어냈지."

    "……."

    "방법을 찾자. 그러면 돼. 그대가 죽을 일은 결코 없어."

    "……방법이 없으면요?"

    "없어도 찾을 거야."

    "헛된 희망은 오히려 사람의 피를 말릴 뿐이에요."

    알리시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이 카벨레누스의 손등 위를 간지럽혔다. 카벨레누스는 눈에 바짝 힘을 줬다.

    "나는 헛된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목표를 말하는 거야."

    "……."

    "나는 그대도, 미카엘도 지키기로 했어. 그뿐이야."

    "……살 수 있을까요?"

    조곤거리는 목소리는 집중해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사내의 귀에는 선명하게만 들렸다. 그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살 수 있어."

    "저는……."

    "살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그러니까, 제발 포기하지 마."

    "……."

    "사실 당신도 죽고 싶지 않잖아."

    우는 법을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보다. 시큰거리는 눈가에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다물었다. 알리시아는 애써 울음을 삼키는 사내를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당신은 항상 그러네요. 당신은 매번 나를 살고 싶게 만들어요."

    알리시아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천천히 카벨레누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시금 가까워진 거리에 서로의 숨이 얼굴을 스쳤다.

    "그대도 항상 그래. 매번 날 미치게 만들지."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움직여 알리시아의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젖은 눈가에 맞춘 입맞춤은 짰지만 올려다보는 시선은 달았다. 이 맛을 기억하는 한, 다신 맛을 보지 못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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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슨 일이냐? 뭔데,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얼굴이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펜리르는 서신을 읽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그의 매끄러운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문제? 설마, 우리 쪽에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한 거냐?"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체르가 재촉하듯 테이블을 쿵쿵 내리쳤다. 하지만 펜리르는 별다른 반응없이 서신만 노려볼 뿐이었다.

    "됐다! 네놈이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보면 그만…… 뭐야. 이건……."

    펜리르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아 읽던 체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서신에는 있어선 안 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단 대공부터 만나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다. 이 서신 내용대로라면 우리의 계약이 꼬여버려."

    "단지 계약이 꼬이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펜리르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멍청한 놈. 숨기려면 잘 숨겨야지."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체르에 펜리르의 반듯한 어깨가 아래로 축 쳐졌다. 나름대로 알리시아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해보고, 회의 시간을 제외하곤 방에 처박혀 일만 해봤지만 도무지 여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어차피 네가 가질 수 없는 상대다."

    "압니다."

    "안다는 놈이 그러냐."

    "……진짜 그녀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한 걸요. 나는 이런 재회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단 말이에요."

    펜리르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그의 귓불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체르는 대놓고 혀를 찼다. 펜리르는 슬쩍 손바닥을 내리며 체르를 향해 눈을 흘겼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합니까?"

    "원래 정신 못 차리는 놈들은 매가 약이라서."

    "내가 맹주의 핏줄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죠?"

    "있어서 더 그런 거다. 여섯 중 하나정도는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는 놈이 있어야지."

    체르는 비아냥거리며 들고 있던 서신을 펜리르에게 내밀었다. 펜리르의 사랑을 순수하게 응원하기에는 로아킨의 상황이 너무 암울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국내 사정을 악화시키는 건, 다름 아닌 바글거리는 맹주의 아들들이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대공에게 가봐. 거기 적힌 내용이 사실이면, 네가 그토록 열광하던 그녀의 안위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대공은 그녀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네 아버지는 널 내게 팔았지. 어차피 아들은 많으니, 하나쯤은 인질로 팔아먹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꼭 그렇게 못되게 말해야 해요?"

    펜리르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권력이라는 게 그런 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영향력은 거대해서 항상 사람을 홀리고 휘둘러. 피가 섞인 혈육들도 그런데, 연인은 하물며 더 하겠지."

    "그녀를 위해선 전부 하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은 바닥을 봐야지, 본성을 아는 법이야."

    체르는 같잖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펜리르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펜리르는 입을 삐죽 내밀며 서신을 건네받았다.

    "가만보면 영감님은 낭만이 없다니까요."

    "낭만도 먹고 살만해져야 찾을 수 있는 거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펜리르는 대충 서신을 주머니 속에 구겨넣고 몸을 돌렸다. 체르는 멀어지는 펜리르의 등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펜리르."

    "왜 부릅니까, 영감님."

    "만약, 대공이 그 여자를 버린다고 해도 주울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

    "그거 한 가지만 약속하고 가라."

    체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펜리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색한 적은 없지만, 펜리르가 지금껏 잘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그간 쌓은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영감님은 걱정이 너무 많으시군요."

    "너답지 않아서 그런다."

    "솔직히 말하면, 좀 흔들리긴 합니다."

    "흔들려?"

    "솔직히 대공의 여자가 아니게 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잖아요."

    펜리르는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어느덧 그의 눈매는 유려하게 휘어져 있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입은 원래 말하라고 뚫려 있는 겁니다."

    "헛소리를 하라고 뚫린 건 아니지."

    "헛소리는 아니죠. 원래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고 하잖아요. 그녀가 대공과 헤어지면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저 이래봐도 빠지는 미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개를 까닥거리는 펜리르에 참다 못한 체르가 팔짝 뛰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사랑? 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오해는 마세요.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저도 그 정도 도덕심은 갖추고 있다고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냐!"

    펜리르는 달려드는 체르를 여유롭게 피하며 재빨리 문 쪽으로 달려갔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펜리르!"

    체르의 얼굴부터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생글생글 웃는 펜리르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감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애당초 이건 간단한 문제인 걸요."

    "간단한 문제?"

    "대공이 그녀를 지키겠다고 하면 함께 지키고, 버리겠다고 하면 제가 지키면 되는 거죠."

    "진짜 이놈이-."

    "아무리 화내셔도 소용없어요. 서신을 읽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니까요."

    펜리르는 올라간 체르의 손을 잡아채 가지런히 아래로 내렸다. 체르는 용을 써도 이길 수 없는 펜리르의 힘에 인상을 팍 쓰며 거친 숨만 씩씩거렸다.

    "도대체 그 여자가 뭔데?"

    "제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게 해준 사람이요."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산 자는 달랐다. 칩거한 펜리르가 오랜 시간 고민해서 내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를 거다."

    "괜찮아요. 제가 알잖아요."

    펜리르는 씨익 웃으며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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