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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2)화 (92/164)
  • 92화. 기생충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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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좋겠군."

    카벨레누스는 그대로 제임스를 방 안으로 던졌다. 딱히 큰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제임스는 한참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애 앞에서 떠들 이야기가 아니잖나."

    "애 앞이요? 언제부터 그렇게 미카엘을 챙기셨다고요."

    제임스가 비아냥거렸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까."

    "아뇨.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그저 알리시아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미카엘을 챙기는 척하시는 것뿐이죠."

    "넌 다르다고 생각하나? 알리시아의 호감을 사기 위해 미카엘을 챙겼던 건 네놈도 마찬가지잖아."

    "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런데, 왜 방금 전 아이의 손을 뿌리쳤지? 그 대단한 가족이라는 이름은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지나보지?"

    빤히 바라보는 금안에 제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듯, 다 안다는 듯 오만한 시선으로 사람을 깔보는 저 눈이 항상 거슬렸다.

    "이제 그만 떠나."

    "……떠나라고요?"

    "이미 경고는 한 것 같은데. 선을 지키라고. 내 경고를 무시한 건 네놈이야."

    "못 떠납니다."

    "그럼 떠나게 만들어야지."

    카벨레누스가 느긋하게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슈바르한은 자신의 땅이었다. 이 땅에서 사람 하나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아주 많았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알아먹으니 다행이군."

    "제게 해를 가하신다면 알리시아가 바로 알 겁니다."

    "그딴 짓을 해놓고 잘도 그녀의 이름을 대는군."

    "그딴 짓이라뇨."

    제임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뭐라고요?"

    "네놈이 울렸잖아."

    카벨레누스의 눈빛이 켜켜이 침전하듯 가라앉았다.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새 가서 전하께 이른 겁니까?"

    "아니.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내 성에서 개소리를 지껄이며 그녀를 울릴 만한 상대는 뻔하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제임스의 목에 닿았다. 생전 단련이라곤 해본 적 없는 유약한 몸만큼이나 가는 목이었다. 저 정도는 굳이 무기를 쓰지 않아도 맨손으로도 충분히 꺾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네놈이 좋아서 봐주고 있었던 게 아니야.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모른 척해주고 있었던 거지."

    "……."

    "내 경고를 어긴 건 네놈이야."

    "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오른쪽 눈썹이 추켜올라갔다.

    "전하께, 그리고 미카엘에게 알리시아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정말로 평범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전하께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알리시아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결핍이에요. 알리시아는 애정을 주는 상대라면 누구나 쉽게 따르고-."

    쾅-! 그 순간, 그대로 옆에 있던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제임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카벨레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발을 까닥거릴 뿐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될 수 있으면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는데, 네놈이 하도 헛소리를 지껄여대서 말이지."

    "참으로도 잘난 배려군요."

    제임스가 헛숨을 뱉었다.

    "계속 말하지만 적당히 해. 나도 이제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닿은 것 같거든."

    어쩌면 벌써 닿았을지도 모르고. 카벨레누스는 느긋하게 중얼거렸지만, 그의 두 눈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쭉 살기가 서려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배려가 넘치는 분이셨다고요."

    "불쾌하다 해도 네가 그녀를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카벨레누스가 짧게 조소했다.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있는 건, 지난 8년 동안 자신보다 제임스가 알리시아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를 위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제임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알리시아가 타인의 애정에 그저 맹목적이었을 뿐이라면, 네놈이 그딴 개소리를 할 이유도 없지."

    "지금 무슨 소리를-."

    "애정만 주면 쉽게 따르는 여자라면서?"

    "……."

    "그런 여자를 손에 넣지 못해서 안달 날 필요가 있나?"

    카벨레누스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였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을 닮은 사내의 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사냥감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알리시아를 가지지 못해서 안달 난 적이 없습니다."

    "아니. 너는 안달 나 있어. 심지어 지금 이 순간조차 말이지."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뒤틀렸다.

    "이상한 건, 그녀가 아니라 네놈의 열등감이야."

    "……."

    "네놈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다만, 멋대로 그녀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카벨레누스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이를 꽉 물었다. 키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짐승의 것처럼 동공이 도드라진 금안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책임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각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겁니다."

    "현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자꾸 알리시아를 흔드시는 겁니까? 잘 살고 있던 그녀에게 왜 헛된 꿈을 품게 하시는 겁니까?"

    짐승 같은 시선에 오금이 저렸지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카벨레누스에게 맞서기 위해 애썼다.

    "나는 네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걸."

    "알리시아는 평민입니다! 평생 그 꼬리표가 그녀의 뒤를, 그리고 미카엘의 뒤를 뒤쫓겠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을 비난할 거란 말입니다!"

    "그딴 건 상관없다고 말했을 텐데."

    "전하께서는 상관없겠죠! 어차피 전하께서는 아쉬울 게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알리시아는 다릅니다! 비난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될 테고, 결국 그녀는 괴로워하게 될 겁니다!"

    제임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정작 그를 보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건조할 뿐이었다.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세 치 혀를 놀리는 것밖에는 없군."

    "뭐라고요?"

    "그런데 그거 아나? 네놈이 아무리 혀를 놀려도 결국 네놈은 제3자라는 거."

    "……."

    "착각하지 마. 이건 그녀와 내 관계야. 네놈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카벨레누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덕분에 제임스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그늘이 짙어졌다.

    "알리시아가 뻔히 불행의 길로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습니다."

    "네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겠지."

    "사람을 모독하는 것도 정도껏-."

    "모독은 네놈이 하고 있지."

    카벨레누스의 양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놈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제가 모른다고요?"

    "그녀가 어떤 삶을 이겨내며 살아왔는지 안다면, 애정을 갈구하니 마니 그딴 소리를 꺼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전하께서는 스스로가 알리시아에 대해 다 안다고 자부하시는 모양이군요?"

    알리시아에 대해 진짜로 모르는 게 누군데. 제임스의 입술이 눈에 띄게 뒤틀렸다.

    "다 알진 못해도 적어도 네놈보단 많이 알겠지."

    "아뇨.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전하께서 알리시아에 대해 아셨다면, 미카엘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 리 없으니까요."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감정은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건, 저 오만한 눈을 망가트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내가 네놈의 헛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줘야하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그딴 건-."

    "미카엘은 괴물입니다."

    "……."

    "당신이 8년 전에 예상했던 대로 괴물이 태어난 겁니다."

    미세하지만 분명 시선이 흔들렸다. 제임스의 입술 끝을 말아올리며 곧장 말을 이었다.

    "8년 전, 알리시아는 인간이 아닌, 짐승을 낳았습니다."

    "……."

    "그건 누가 봐도 네 발 달린 짐승이었습니다. 아이를 받은 산파조차 기겁하며 도망갔고, 알리시아는 짐승을 낳았다는 오명에 몸을 추스르지도 못 하고 도망쳐야 할 정도였죠."

    "그래서?"

    "그래서라뇨. 짐승이라니까요? 걘 괴물이라고요!"

    분명 시선이 흔들렸는데 어느샌가 다시 시선이 곧아졌다. 제임스는 다급해져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괴물이라는 이유로 미카엘을 죽이려고 했던 작자였다.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 없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딴 건 이제 상관 없어. 지키기로 했으니 지킬 뿐이야."

    "본인이 죽이고자 했던 아이를 이제와서 지킨다뇨. 그렇게까지하시면서 알리시아의 환심을 사고 싶으신 겁니까? 이제와서 좋은 사람 흉내라도 내고 싶으신 거예요?"

    "차라리 흉내내는 편이 낫지."

    "윽!"

    카벨레누스는 거슬리는 손을 잡아채 그대로 바닥으로 던졌다. 제임스는 바닥에 내동댕쳐진 채 거칠게 숨을 뱉었다. 카벨레누스의 발이 제임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그딴 말을 뱉는 인간보단 말이야."

    "커, 허억!"

    "네놈을 죽이는 건 쉬워. 그리고, 죽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네놈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아."

    내가 조금만 힘을 줘도 화가로서의 네 인생은 끝이거든. 카벨레누스의 발이 제임스의 손등 위로 옮겨졌다. 살짝 밟고만 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무게감은 제임스의 피를 말렸다.

    "손이 망가지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물론 헛소리만 지껄이는 그 입도 포함해서."

    "……."

    "내가 발을 떼면 곧장 방으로 돌아가. 그리고 짐을 싸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이, 이런 협박, 아아아악!"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8년의 시간만으로 모든 걸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참아? 당신이 뭘 참는다는 거야?"

    고통에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그보다는 속이 쓰렸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영원히 패배자로 남을 뿐이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보군."

    카벨레누스가 혀를 찼다. 어리석게도 발 밑의 사내는 뼈를 으스러트리는 것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편이 빨랐다.

    "알리시아는 곧 죽을 거야!"

    "평화롭게 끝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손을 봐줄 필요가 있겠군."

    "알리시아는 자신의 수명을 깎아먹으면서 미카엘을 키웠어!"

    "……그게 무슨 소리지."

    순간,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건 몰랐나봐?"

    제임스는 얄궂게 입술을 이죽거렸다. 그렇게도 오만하던 사내가 비로소 보인 틈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리시아는 소원을 이루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 힘의 대가는 그녀의 수명이지."

    "……수명이라고?"

    "당신이 잊고 지낸 8년의 시간동안 그녀는 수명을 깎아가면서 아이를 키운 거야."

    "……."

    "결국, 당신이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화된 거지."

    당신 자식이 그녀를 잡아먹는 괴물이 된 거라고. 제임스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카벨레누스를 지나쳐 절뚝거리며 방을 나섰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심장은 여느 때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삼촌, 괜찮아요?"

    인기척을 느낀 미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완연한 거절을 당했음에도 아이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껏 뒤틀린 사내의 시선에는 그마저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제임스는 미카엘의 얼굴에서 알리시아를 찾지 못했다. 미카엘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 오롯이 카벨레누스의 모습뿐이었다.

    "미카엘."

    제임스는 미카엘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어깨를 쥐었다.

    "혹시 아저씨가-."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

    "네 친부가 누군지 넌 이미 알고 있었잖아."

    제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 삼촌, 아파요……."

    "하긴, 그 인간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둘 리 없겠지. 누가 너 같은 아이를 자식으로 두고 싶겠어."

    제 어미를 갉아먹는 기생충 같은 너를. 일순간, 제임스의 만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카엘. 네 친부와 엄마가 왜 헤어졌던 건지 알아?"

    "……."

    "너 때문이었어. 네가 태어나서 네 엄마가 불행해진 거야."

    "……."

    놀라서 울지도 못하는 아이의 낯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제임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가지 못하게 아이의 어깨를 꽉 쥐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네 엄마는 앞으론 더 불행해질 거야."

    "엄, 엄마는-."

    "네가 괴물이라서."

    "……."

    "엄마의 불행을 밟고 자란 줄도 모르고 망아지처럼 날뛰고 다니던 너 같은 괴물 때문에 네 엄마가 불행해진 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새빨갛게 물든 미카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럴수록 미카엘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절대 잊지 마렴. 네 엄마가 불행해지는 건 모두 너 때문이라는 걸."

    미카엘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자식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에 있는 카벨레누스의 흔적을 보면 볼수록 깨달았다. 지금이야 아이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지, 결국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자식이었다. 카벨레누스가 그러했듯이 그의 아들인 미카엘도 카벨레누스의의 삶을 따라갈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고, 많은 땅을 정복해나가며, 또 하나의 괴물이 될 것이었다. 괴물의 자식은 결국 괴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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