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눈물의 값
2021.01.14.
알리시아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눈앞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잠든 미카엘이 보였고 그 뒤로 마찬가지로 잠이 든 카벨레누스가 보일 뿐이었다.
'어제 미카엘을 기다리다가 잠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카벨레누스가 잠든 자신을 옮긴 것까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셋이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이유는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아침이네.'
알리시아는 깊게 생각하길 그만 두고 가만히 두 부자를 바라봤다. 카벨레누스 특유의 날카로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세상 모르게 잠든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닮아 보였다.
'매일 이런 날만 있으면 좋을 텐데.'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헛된 희망이라는 거 알지만…….'
자신은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몸 상태는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고, 그렇기에 덤덤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도무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일부러 짜맞춰놓은 것도 아닌데, 잠자는 버릇조차 빼닮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흔들렸다. 강한 척, 마음을 다 잡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욕심이 났다. 어떻게서든 살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카벨레누스를 살폈다. 카벨레누스는 작은 인기척에도 쉽게 깨는 편이었지만, 평소답지 않게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클라우드 경?"
"아가씨?"
문을 열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알리시아는 입술에 검지를 댄 채,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전하께서는 주무시고 계셔."
"……전하께서요?"
잠이 든 카벨레누스가 낯선 건 가제프도 마찬가지였다. 카벨레누스는 지나칠 정도로 잠이 적은 편이었고 깊게 잠드는 법도 없었다. 지금까지 자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급한 일이라면 깨워야겠지만-."
"아닙니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니고, 전하께서 집무실에 오시는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져 와본 것뿐입니다."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가제프가 알리시아의 등 뒤로 보이는 풍경을 흘끔 살폈다. 침대에는 잠든 카벨레누스와 미카엘이 보였다.
"제가 괜히 눈치 없게 끼어들었군요."
"아니야. 어차피 경에게 할 말이 있었는 걸."
"제게요?"
"괜찮다면, 잠깐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을래?"
알리시아는 싱긋 웃고는 잠이 든 부자를 돌아봤다. 이제 슬슬 욕심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 * *
"차는 뭐로 드릴까요."
"차는 괜찮아. 사실 지금은 뭘 먹어도 체할 것 같거든."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가제프가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앞에 앉았다.
"예전에 내게 전하의 족쇄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 있지?"
"네, 그랬었죠."
가제프가 멋쩍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짧게 하고는 가제프를 바라봤다. 가제프는 그날 이후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알리시아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돌려서 말하지 않을게. 나는 경이 추측대로 소원을 이루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 말씀은……."
"내가 전하의 족쇄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이십니까?"
가제프의 얼굴에 환희가 서렸지만 반대로 알리시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 힘은 완벽하지 않아."
"힘을 쓸 수 있는 조건이 있는 겁니까?"
"맞아."
"하긴,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을 멋대로 쓸 수 있다면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 테니까요.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건 예상했으니 편히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가제프가 가슴을 앞으로 쭉 뺐다. 카벨레누스와 함께, 무수히 많은 전장을 승리로 이끌어온 부관은 자신만만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건 생명이야."
"생명이요?"
"시전자의 수명 말이야."
"설마……."
가제프의 초점이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 힘으로 미카엘을 지켜왔어. 그리고,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나는 몇 번이고 미카엘을 위해서라면 힘을 썼을 테니까."
"……."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알리시아는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미소 짓는 얼굴과 달리, 그녀의 손등 위로는 핏줄이 돋아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린다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원이 아닌 이상 대가를 치를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소원을 이뤄줄 수 있어."
"그럼, 치를 수 있는 대가 이상의 소원을 빌게 된다면……."
"죽게 돼."
"그런 거라면, 더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제가 드렸던 이야기는 그냥 못 들은 거라고-."
"이제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
가제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지금껏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어."
"슈바르한의 의술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졌습니다."
"어떤 대단한 의사도 정해진 수명을 바꿀 수 없어."
"아가씨."
가제프가 다급히 알리시아를 불렀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나는 빠르게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 힘으로 아가씨의 수명을 되돌릴 순 없는 겁니까."
"그건 불가능해."
"시도는 해보셨습니까."
"해볼 필요도 없어. 이 힘은 날 위한 게 아닌 걸."
"아가씨를 위한 게 아니라고요?"
가제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소원의 힘을 쓰기 위한 전제 조건은 두 가지야. 시전자를 제외한 누군가의 소원과 그것을 이루어주고 싶어 하는 시전자의 의지."
"그럼에도 시전자의 수명을 앗아가는 겁니까?"
"덕분에 내 부친이 아무런 손해도 없이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었던 거지."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제 목에 칼을 겨누고 어머니를 향해 힘을 쓰라고 윽박지르던 부친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는 내 몸이 안 좋다는 걸 느끼자마자, 가장 먼저 전하와 미카엘이 걱정됐어. 전하께서는 미카엘과 가까워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미카엘도 마찬가지잖아."
"아가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나는 그저 계기일 뿐이야. 결국 미카엘에게 마음을 연 건 전하셨지."
"……."
"지금의 관계가 완벽하다곤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전하께서는 노력하고 계시고, 미카엘도 전하를 많이 따르잖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야."
"……."
"잘할 거야, 두 사람 모두."
나는 그렇게 믿어. 알리시아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가제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이마를 짚었다.
"전하께서 버틸 수 있는 건 아가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쭉 전하의 옆을 지킬 수 없어."
"……안 되겠습니다. 전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하지 마."
알리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가씨."
"전하의 족쇄를 풀고 싶다고 했잖아."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입니다."
"무작정 죽겠다는 게 아니야. 그저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나를 마지막 보루로 여겨줬으면 싶은 거야."
알리시아의 두 눈이 곧게 빛났다.
"그렇다하더라도 전하께서 아가씨의 목숨을 대가로 사용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경의 도움이 필요한 거지."
"……."
"잔인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믿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경뿐이야."
"……제가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드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최악의 순간이 오면 그렇게 하겠지. 결국 경은 슈바르한 대공의 사람이잖아."
가제프는 알리시아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다 안다는 시선이 괴로웠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 * *
"아저씨, 진짜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거 맞아요?"
"머리 울리니까 그만 떠들어."
"머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아침부터 누가 떽떽 우는데 머리가 안 울릴 리 없잖아."
"누가 떽떽 울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정당한 항의를 하는 것뿐이거든요!"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미카엘은 지지 않겠다는 듯 까치발을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정당한 항의?"
"아저씨가 분명 괴물이 오면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는 건 괴물이 와도 그럴 수 있다는 거잖아요."
"오늘만 그런 거야. 평소에는 안 그래."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리시아가 사라질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도 충격이었다.
'가만히 들어앉아 있다보니 무뎌진 건가.'
카벨레누스는 테이블에 놓인 알리시아의 쪽지를 집어 주머니에 넣고 곧장 외투를 걸쳤다. 격식과는 먼 옷차림이었지만 지금은 알리시아의 얼굴을 보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성 안에서 슈바르한 대공에게 옷차림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에이,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원래 오늘이 내일 되고 내일이 모레 되어서 습관이 되는 거랬거든요?"
"그딴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엄마가 알려줬어요."
"……."
카벨레누스는 뿌듯해하는 아이를 보며 입을 굳게 닫았다. 경험상 저때의 아이를 건드려봤자 좋은 일은 없었다.
"네 방은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곧장 나오니까 거기로 가든, 아니면 여기서 더 자든 네 마음대로 해."
"싫어요."
"싫어?"
"아저씨, 지금 엄마 보러 가는 거잖아요. 나도 갈래요. 나도 엄마 보고 싶어요."
미카엘이 잽싸게 카벨레누스의 옆에 붙어 외투 끝을 잡았다. 카벨레누스는 당겨지는 옷자락에 미간을 찡그렸다.
"어차피 이따가 볼 거잖아. 왜 굳이 찾아가겠다는 거야."
"그건 아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
"정 날 말리고 싶다면 아저씨도 가지 말아요. 그럼 나도 안 갈게요."
미카엘이 얄궂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불만스레 양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도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외투나 챙겨 입고 와."
"외투는 방에 있는데요."
"그럼 입고 와."
"그건 안 돼요."
미카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왜 안 되는데."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길게 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외투를 입고 오는 사이에 아저씨가 먼저 가버릴 수도 있잖아요."
"내가 그럴 것 같아?"
"네."
"……."
저 작은 꼬마 녀석은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카벨레누스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정작 미카엘은 해맑게 카벨레누스의 옷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아저씨, 먼저 가버리면 안 되니까 아저씨도 같이 가서 외투 가져와요."
"하아……."
"한숨 쉬지 말고요."
"한숨도 못 쉬는 건가?"
목줄 잡힌 개처럼 외투가 잡혀 끌려가는 것도 어이가 없건만, 이제는 한숨까지 참견한다.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아이에게 맞춰 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출까 말까 고심했다. 물론, 고심은 복도 반대편에서 보이는 곱상한 얼굴에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버렸지만. 카벨레누스는 제임스를 바라보며 눈매를 굳혔다. 제임스 역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
뒤늦게 제임스를 발견한 미카엘이 잡고 있던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놓고 그대로 내달렸다. 하지만 평소 같았으면 다정하게 웃어주며 안아줬을 제임스는 미카엘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제임스가 보고 있는 건 오직 카벨레누스 뿐이었다.
"……삼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제임스를 건드렸다. 그때였다. 거칠게 휘둘러진 손이 아이의 손을 쳐냈다.
"사, 삼촌……."
당황한 미카엘이 입을 뻐금거렸다. 하지만 제임스는 여전히 미카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팍 쓴 채 성큼성큼 걸어가 제임스 앞에 섰다.
"분명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참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
"참지 마십시오! 누가 참으라고 했습니까? 전하께서 알리시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혼자 개처럼 꼬리를 흔드-."
제임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흉흉한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혔다. 보면 볼수록 슈바르한 대공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았다. 방심하면 그대로 목이 물어 뜯겨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면 내 앞에서 그딴 헛소리를 뱉진 못할 텐데."
"……."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카벨레누스는 짧게 조소하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평생 운동이라곤 해보지 않은 화가의 목 정도야 한 손으로도 충분히 꺾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얌전히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미카엘. 너 먼저 엄마한테 가있어."
카벨레누스는 사냥을 목전에 둔 맹수처럼 느긋하게 제임스와 미카엘 사이를 갈랐다. 알리시아의 손님에게 함부로 할 수 없기에 웬만한 일은 참아줬지만 어제의 일은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흘린 눈물의 값은 제대로 갚아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