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90)화 (90/164)
  • 90화. 같이 자요

    2021.01.11.

    "……아, 아저씨?"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카벨레누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미카엘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금안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이 순간, 손에 쥔 빳빳한 옷감의 감각이 더할 나위없이 기꺼웠다.

    "나, 나는 어, 엄마를, 찾…… 흐으읍……."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잖아."

    카벨레누스의 손이 미카엘의 얼굴을 쥐었다. 미카엘은 똑바로 마주보게 된 시선에 겨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 울음 그치고, 심호흡해."

    "그, 그치만-."

    "울기만해선 네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진정하고 제대로 말해."

    미카엘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뚝뚝한 사내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울어도 다정하게 안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래서 안심이 됐다. 뿌옇게 번진 시야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눈빛은 곧아서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보며 그가 시킨대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한참 심호흡을 반복하고 꺼낸 미카엘의 목소리는 아직도 물기가 서려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제대로 내용을 전달했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미카엘의 얼굴을 놓아줬다.

    "이상한 소리? 무슨 소리?"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하지만 복도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미카엘이 말한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못 들었어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이 카벨레누스를 향했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전까지 비슷한 눈으로 울던 여자를 달래고 왔던 참이라 발갛게 물든 아이의 눈가가 더욱 신경 쓰였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냐?"

    "그, 그치만 되게 이상한 소리였어요! 지금도 들리…… 어?"

    미카엘이 눈이 커졌다. 언제부턴가 더는 기괴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왜?"

    "……이젠 안 들려요."

    미카엘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는 듯 연신 곁눈질을 했다.

    "안 들려?"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미카엘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 거짓말 한 거 아니에요. 진짜 들렸단 말이에요."

    "누가 뭐래."

    "……."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믿어. 애당초 너한텐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미카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카벨레누스를 흘겨봤다. 별 표정 없는 사내는 여러모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진짜, 내 말 믿어주는 거예요?"

    "싫으면, 안 믿고."

    "아뇨! 믿어요! 나, 진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미카엘이 다급하게 두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이상한 소리라는 게 어떤 건데?"

    "그, 그게 진짜 이상한 소리였는데……."

    미카엘의 콧잔등이 다시금 구겨졌다. 막상 소리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이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대충 흉내내기라도 해보면…… 키이익?"

    "……."

    "킥킥?"

    "……."

    "크르르?"

    "……."

    설명을 하면 할수록 아래로 처지던 미카엘의 양 어깨가 한계까지 내려왔다. 미카엘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차라리 무슨 반응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끝까지 덤덤했다.

    "그게 다야?"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어요. 분명 들을 때는 진짜 이상했는데, 표현이 잘 안 돼요."

    "아무래도 넌 표현에는 재능이 없나보군."

    "아니거든요!"

    발끈 하는 아이의 얼굴은 제법 혈색이 돌아와 아까보다 확연히 좋아 보였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도 아이의 등 뒤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미카엘이 괜한 소리를 할 이유는 없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정말 뭔가 들었을 확률이 있었다.

    '어쩌면…….'

    카벨레누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미카엘이 말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다.

    "아저씨, 뭘 보는 거예요? 거기 뭐 있어요?"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이의 얼굴에는 도로 걱정이 서려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카벨레누스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알리시아는 더는 미카엘에게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오던 힘이었다. 쉽게 사라졌다고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아이에게 힘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가 없어서 나온 거지?"

    "아, 맞아요! 엄마! 아저씨, 우리 엄마 어딨는 줄 알아요?"

    엄마 소리만 들어도 좋다는 듯, 미카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알아."

    "진짜요?"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이리와."

    카벨레누스는 살짝 몸을 낮춰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솔직히 자신이 아이를 지키는 입장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괴물의 아이는 결국 괴물이니까. 어차피 불행한 인생을 살 바에는 없애버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봐온 아이는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리는 정말 뭐였을까요?"

    "귀신인가보지."

    "자, 장난하지 말아요!"

    미카엘이 버럭 소리를 쳤다. 카벨레누스는 좀 더 자신 쪽으로 다가온 아이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고성에 귀신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진짜, 여기 귀신 있어요?"

    "밤마다 새하얀 부유물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하지 말아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왜? 설마 귀신이 무서운 건가?"

    "무섭긴요!"

    "그럼?"

    "아, 아저씨가 무서울까봐 그러죠!"

    이 와중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내도 떨리는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으며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올렸다. 얼떨결에 카벨레누스에게 안기게 된 미카엘이 눈만 껌벅거렸다.

    "나는 안 무서운데."

    "거짓말. 귀신이 어떻게 안 무서울 수 있어요."

    "내가 이겨."

    "……진짜요? 정말 귀신도 이길 수 있어요?"

    미카엘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귀신 따위가 뭐 무섭다고."

    "아저씨가 아무리 세도 귀신은 못 이길 걸요. 귀신이 얼마나 강한데요."

    "내가 못 이기는 건 없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대답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럼 이상한 소리를 내는 괴물이 나타나면 아저씨가 쫓아줄 거예요?"

    "물론."

    "진짜 무서운 괴물일지도 몰라요."

    미카엘은 중얼거리면서 카벨레누스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카벨레누스가 놀릴 걸 생각하면 우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한 번만큼은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로 했다. 괜찮은 척했지만, 아직도 아이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상관없어."

    "왜 상관없어요? 아저씨는 무서운 것도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키기로 했으니까."

    "아저씨가 뭔데, 날 지켜요?"

    미카엘의 물음에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와서 아버지이기 때문이라는 뻔한 소리를 운운할 수 없었다. 사내는 여전히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었다.

    "아저씨는 엄마만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엄마 때문에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

    "거봐, 아니라고 말 못 하잖아요."

    미카엘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없이 미카엘을 응시했다. 아이의 작은 습관에서조차 알리시아가 보였다. 하지만 미카엘을 안아든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오기로 버티던 아이를 봤기 때문이었다.

    "아저씨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지만, 나는 아저씨가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아빠로 인정해주진 않을 거예요."

    "……."

    "아저씨는 가진 게 많지만 나한테는 엄마 하나뿐이니까요."

    "……."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아저씨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아빠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무엇보다 아저씨는 너무 늦게 왔잖아요. 미카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벨레누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근육질 몸은 딱딱했지만, 그만큼 크고 안락해서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품에 안겨 있는 순간만큼은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하루만 엄마 얼굴 안 봐도 못 참을 것 같은데, 아저씨는 안 그랬어요?"

    "……보고 싶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느릿하게 뱉은 사내의 소리는 잠겨 있었다.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묻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조금만 더 일찍 올 수도 있었잖아요."

    "내 아집 때문이었지."

    "아집? 그게 뭔데요?"

    가끔씩 카벨레누스는 어려운 말을 썼다. 미카엘은 새 부리처럼 입술을 삐쭉 내민 채 카벨레누스의 옷을 잡아당겼다. 카벨레누스가 뜻을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너는 네 어머니와 닮았어."

    "언제는 안 닮았다면서요."

    "아니. 닮았어."

    그럼에도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 카벨레누스는 뒷말은 삼키며 미카엘을 고쳐 안았다. 알리시아도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훨씬 더 가벼웠다. 한 팔로도 거뜬히 들 정도였다.

    "……나는 널 싫어하지 않아.”

    "……."

    전혀 다른 색의 눈동자들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닮지 않은 듯해도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는 묘하게 서로를 닮아 있었다.

    "오히려 나누자면, 미워한다기보다는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고 생각해."

    "가, 갑자기 아저씨답지 않게 무슨 소리예요. 혹시, 뭐 잘못 먹었어요?"

    "뭐, 그랬을지도."

    "아저씨."

    볼멘소리를 모른 척하며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렸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지 않은 지 벌써 몇 십 년이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은 자신의 것임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뒤늦게야 제대로 바라보게 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카엘이 떠올랐다. 아이는 알리시아를 닮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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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엄마, 나-."

    "쉿."

    "……엄마, 자요?"

    "피곤했나보지."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카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알리시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비켜봐."

    "왜요?"

    "불편해 보이잖아. 침대에서 재워야지."

    미카엘을 기다리다가 잠든 모양인지, 알리시아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에 눕혔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웅크리고 자는 여자의 잠버릇은 여전해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여기서 자도 돼요? 이 방 주인한테 허락 받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이 방 주인이야."

    "아저씨가요?"

    "그래."

    "나는 엄마랑 같이 잘 거예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잽싸게 침대로 올라왔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 옆자리를 차지한 미카엘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그러던지."

    "……."

    "왜?"

    "아저씨가 날 쫓아내려고 할 줄 알았거든요."

    "쫓아낼 생각이었다면 널 찾으러 가지도 않았겠지."

    "아, 그건 그렇…… 어? 그럼 아저씨, 나 때문에 나온 거였어요?"

    미카엘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럼 내가 왜 그 시간에 거기 있었겠어."

    "흐음……."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자. 꼬마는 잘 시간이야."

    "꼬마 아니라니까요."

    미카엘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불만을 토했다.

    "꼬마가 아니고 싶으면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와야지."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말하며 서류를 집어들었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저씨는 안 자요?"

    "하루 정도는 안 자도 돼."

    카벨레누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잠은 제때 자야 한다고 했는걸요."

    "그럼 조금 있다가 소파에서 잘 테니 너도 그만 자."

    카벨레누스가 대충 손을 휘저었다.

    "소파에서 자면 불편하다면서요."

    "다른 방에 가서 자도-."

    "그건 안 돼요. 아저씨가 없어진 사이에 괴물이 나타나면 어떡해요.."

    미카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턱을 괬다.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같이 자요."

    "……."

    "아저씨가 지나치게 크긴 하지만 그만큼 침대도 넓잖아요. 그럼 같이 자도 되죠."

    대단한 명안을 낸 것처럼 미카엘이 으스스댔다. 카벨레누스는 얼른 오라는 듯 침대를 툭툭 치는 미카엘을 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아저씨도 나 안 싫어한다면서요. 실은 나도 아저씨가 그렇게 싫진 않거든요."

    미카엘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시선 끝에는 목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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