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7)화 (87/164)
  • 87화. 개와 주인

    2020.12.31.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알리시아는 벽에 기댄 채, 심호흡을 뱉었다. 몸 상태가 부쩍 안 좋아졌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릿해질 때가 있었다.

    '문제 없다가 왜 하필 지금…….'

    알리시아는 두 손바닥으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생명을 깎아먹는 힘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것도, 그래서 카벨레누스보다 자신의 삶이 일찍 끝나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야 좀 행복해지는 것 같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희망을 무너트리는 건 잔혹한 일이었다. 늘 그랬듯 신은 자신에게 잔인했다.

    '……원망해봤자, 무의미한 일이야. 정말로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원망할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얼굴을 감싸쥔 알리시아의 손이 떨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새하얀 손등 위로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죽음이 두려웠지만 그것보다는 남겨진 자들이 더 걱정이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도 카벨레누스는 아직 부모로서의 자각이 미숙했고, 미카엘도 여전히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부모가 필요했다. 자신의 부재가 어떤 후폭풍을 불러일으킬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최대한 버티자. 버틸 수 있는 한, 버티다가 정 안 되면 마지막 순간에는 그 사람의 족쇄라도…….'

    뜨거운 숨이 달구는 게 손바닥인지, 아니면 까맣게 타들어간 자신의 속인지 알 수 없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영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펜리르가 자신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펜리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런 것치곤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조명 탓이겠죠."

    "전에도 이런 일이 있던 걸로 기억해서요."

    펜리르가 넉살 좋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리시아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땐 피곤해서 그랬을 뿐이에요. 별 일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다.

    "……."

    "이쪽 방향으로 가시는 걸 보시니, 전하를 만나러 가시는 것 같은데 얼른 가보세요. 늦으면 곤란하시잖아요."

    "네, 그래야지요."

    펜리르는 머뭇거리다가 짧게 묵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상대는 카벨레누스의 여자였다.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이대로 지나쳐가는 편이 옳았다. 카벨레누스와 손을 잡게 된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슬러봤자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펜리르는 도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전하를 뵈러 가는 길이니, 전하께 의사를 보내달라고 청해두겠습니다."

    "괜히 번거롭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안 아파요."

    "말 몇 마디 하는 것뿐인데 번거로울 리가요."

    "정말로 아프면, 제가 알아서 의사를 부를게요."

    알리시아는 최대한 조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픈 걸 들키면 안 되는 겁니까?"

    "들키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프지 않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의사를 불러도 문제 없지 않나요? 검진을 받는 건, 치료보다는 예방의 목적이 크니까요."

    "굳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번거로운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죠. 저는 영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거든요."

    "제 안전이 경께 중요한가요?"

    "네. 중요합니다. 그게 전하께서 내건 조건이셨거든요."

    "……전하께서 그런 조건을 거셨다고요?"

    "네. 영애를 위해서라면 뭐든 아깝지 않으시다더군요. 그리고, 저는 제 조국을 위해 뭐든 아깝지 않은 사람이고요."

    "……."

    "저는 사소한 것 하나도 영애의 안전을 위해선 뭐든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펜리르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도로 입을 뗐다.

    "그것이 제 의사와 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요?"

    "동정을 구하려는 겁니다. 이 일로 전하께 호감을 살 수 있다면, 분명 로아킨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동정이요?"

    "로아킨은 메마른 땅입니다.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죠."

    "제게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동정을 품으란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영애에게서 베푸신 작은 호의가 로아킨에게는 단비가 될 테니까요."

    펜리르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지만 알리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동정을 베풀 만큼 여유로워 보이나보군요."

    "슈바르한 대공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그건 편견이죠."

    "편견이요? 영애께서는 본인이 입고 계신 드레스 한 벌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알리시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당하시군요."

    "모르는 걸 안다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렇다고해서 경께서 저를 다그칠 이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지그시 펜리르를 올려다봤다. 펜리르의 입매가 떨렸다. 감정이 섞일 만도 한데, 정작 알리시아의 눈빛은 잔잔한 호수만큼이나 고요해 괜히 숨이 막혔다.

    "저는 호의는 주는 자가 원할 때 선심을 베푸는 거라고 생각해요. 가졌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멋대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

    "저는 성자가 아닌 걸요. 그리고 제가 처한 상황 역시, 누군가를 배려하고 위할 정도로 좋지 않죠."

    "……좋지 않다고요?"

    "슈바르한 대공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건, 결국 경의 판단이실 뿐이잖아요. 일부만 보고 전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죠."

    여자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곧다. 펜리르의 목울대가 울렸다. 겉보기에는 분명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가냘픈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에선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졌군요."

    펜리르는 손바닥이 보이게끔 두 손을 올려보이며 항복을 표했다.

    "제게 지신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른 거죠."

    "……영애께서는 절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제가요?"

    "네. 저는 솔직히 영애를 쉽게 생각했습니다. 몇 마디면 설득하고 저희 편으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여겼죠."

    펜리르는 투박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모습이 귀족답진 않아보였지만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보조개가 움푹 파일 정도로 환하게 웃는 청년은 덩치는 컸지만, 앳된 모습이 남아 있어 천진난만한 아이를 연상케 했다.

    "너무 솔직하신 걸요."

    "저는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늘 솔직합니다."

    "네?"

    "제가 하는 일이 세치 혀를 놀리는 일이라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어렵거든요. 일종의 습관이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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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그랗게 눈을 뜬 여자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건 너무 나간 걸까. 펜리르는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알리시아를 보며 배실배실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노이슈타인 공주와 닮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더욱 호감이 갔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눈이 좋은 편이거든요. 시커먼 속내를 가진 이들은 금방 알아보죠."

    "……."

    "물론 그 판단에 영애께서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는 사심이 섞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전에……."

    알리시아의 매끄러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영애께서는 제 정혼자를 닮았습니다."

    "정혼자요?"

    "사실 제대로 된 정혼도 아니었고, 솔직히 그쪽에서 절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펜리르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냥 웃었다. 다음 말은 그냥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카벨레누스와 손을 잡은 이상, 노이슈타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어린 공주와 닮은 여자라 해도 결국 그뿐이니까. 괜히 들쑤셔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진의를 의심하며, 그걸 핑계 삼아 노이슈타인 공주의 흔적을 되짚었지만, 그건 기대라기보다는 희망이었다. 이미 공주의 죽음은 오래 전에 확인했고, 애당초 노이슈타인의 막내 공주가 살아 있단 생각 자체가 자신의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희망조차 슬슬 접을 때였다. 구석에 버려두었던 희망만 쥐고 있기에는 자신은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애당초 죄책감이란 소리를 운운하기엔 그녀를 죽인 살인자의 손을 잡은 것부터가 모순이지.'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으면 끝이었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죽은 자와 달리, 산 자는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펜리르는 애써 양 입술을 끌어올렸다.

    "아,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영애의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제 이름이요?"

    "전에 제 이름만 알려드리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

    "아니면, 이렇게 할까요? 영애께서 이름을 알려주시면, 전하께는 따로 언급하지 않는 걸로요."

    펜리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하께 호감을 사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영애께도 호감을 사고 싶거든요."

    "제게 호감을 사봤자, 좋을 일은 없을 텐데요."

    알리시아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영애께서 굳이 침묵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는 제 욕심 때문이죠."

    "욕심이요?"

    "영애께는 잘 해드리고 싶거든요."

    "제가 그 정혼자 분을 닮아서요?"

    "네."

    곧장 돌아온 대답에 알리시아는 빤히 펜리르를 응시했다. 자신을 통해 누군가를 보는 시선은 익숙하기에 쉽게 알았다. 사내의 눈동자에 짧게나마 스쳐지나간 건,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알리시아."

    "알리시아요?"

    "제 이름이요. 알리시아라고 해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파장은 컸다. 펜리르는 순간 소리를 내지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이름은 분명……."

    당신이 정말 노이슈타인 공주라고? 펜리르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몇 마디만 물으면 그녀가 정말로 노이슈타인 공주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진실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모를 확률이 컸고, 무엇보다 이제와서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카벨레누스와의 관계를 쌓는 게 중요한 시점에서 케케묵은 이야기를 끄집어봤자, 그의 반감만 살 뿐이었다. 오래된 것은 세월에 묻히게끔 두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이 갔다. 하도 쥐고 있어서 손때가 가득 묻은 기억은 스스로도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도 흔들리고 헛된 희망을 품었는데,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두들겨 맞던 아이를 봤음에도 차마 나서지 못하고 숨었던 그 시절. 펜리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훌쩍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건만, 자신은 여전히 미숙해서 예나, 지금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

    그 순간,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늦어지는 것 같아서 나와봤는데, 여기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모양이군."

    "하인이 아닌, 대공 전하께서 직접 오시니 영광이로군요."

    카벨레누스를 발견한 펜리르가 뒤늦게나마 표정을 고쳤다.

    "이 김에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펜리르를 지나 당연하게 알리시아에게 꽂혔다.

    "저는 보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그대만 있었다면, 하인을 불렀겠지."

    카벨레누스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정말로 감출 생각이 조금도 없으신 모양이군요."

    "감출 필요를 못 느껴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몸은 이미 나와 있으면서. 펜리르는 어느샌가 자신과 알리시아의 사이에 끼어든 카벨레누스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는 수치를 모르는 건지,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감추려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기꺼이 여자를 향한 감정을 표현하기 바빠 보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슈바르한의 늑대가 아니라, 제 주인을 발견하고 꼬리를 흔드는 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공이 개라면, 반대로 개의 주인인 쪽은…….'

    펜리르는 슬쩍 카벨레누스를 밀어내는 알리시아를 보며 슬쩍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아무리 알리시아가 힘을 쓴다 해도 카벨레누스를 밀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녀는 쉽게 사내를 옆으로 치워냈다. 평소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오만하던 사내가 여자 앞에서는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둘의 관계가 뻔히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복잡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저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옛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건, 결국 자신의 욕심이었다.

    '솔직히 욕심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만.'

    노이슈타인 공주인지 몰랐음에도 묘하게 끌렸던 상대였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가까워진다면 생각 이상의 관계로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정리해야지.'

    펜리르는 주머니 속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노이슈타인 공주를 만나고 싶었던 건 오래된 감정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세상의 어떤 문제든 정답을 찾아야 제대로 끝맺음을 낼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감정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면, 억지로라도 저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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