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6)화 (86/164)
  • 86화. 아이의 얼굴

    2020.12.28.

    "그래서 그 비밀이라는 게 뭐지? 네 멋대로 내 집무실을 차지할 정도의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면 오늘 간식은 없을 줄 알아."

    얼떨결에 미카엘의 손에 이끌려 온 카벨레누스가 여과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언제는 아저씨가 챙겨준 것처럼 말하네요. 내 간식은 항상 예쁜 누나들이 가져다주는데."

    "이 성에 내 것이 아닌 건 없으니까."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여간 아저씨는 어른이면서 모르는 것투성이라니깐요."

    미카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말해봐. 그 비밀이라는 게 뭔데?"

    "당연히 엄마의 생일이죠."

    "……뭐?"

    "왜 그렇게 놀라요? 아저씨, 설마 우리 엄마 생일도 모르는 건 아니죠?"

    "……."

    카벨레누스는 대답 없이 미간만 찌푸렸다. 되짚어봐도 딱히 알리시아의 생일을 물어본 기억은 없었다.

    "진짜 모르는 거예요? 와, 진짜 아저씨 나빴네요."

    "……그래서, 네 어머니의 생일은 언제인데?"

    "안 알려줄 건데요."

    "왜."

    "우리 엄마 생일도 모르는 아저씨가 괘씸해서요."

    미카엘은 얄궂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왜, 나한테 비밀을 공유해준다고 한 건데?"

    "아저씨가 우리 엄마 생일을 알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죠.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러는 넌 선물을 준비했나보지?"

    카벨레누스가 미카엘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운을 뗐다. 아이를 살살 구슬려서 원하는 답을 나오게 해야만 했다.

    "당연히 준비했죠. 내가 아저씨처럼 엄마 생일도 모를 줄 알아요?"

    "생일을 알려주면 오늘 간식은 두 배로 주지."

    "아저씨가 많이 줘도 어차피 엄마가 다 못 먹게 하는 걸요."

    미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슬쩍 눈썹을 올렸다.

    "그럼 여기서 먹고 가는 건?"

    "그건……."

    "사흘 내내 그렇게 해도 좋아."

    "일주일로 해요. 사흘은 너무 짧잖아요."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카벨레누스가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나도 바쁘거든요!"

    미카엘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바짝 힘을 줬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붙었다.

    "……좋아. 대신, 한 시간만 먹고 가."

    "대신, 엄마한테 걸리면 아저씨가 혼나야 해요."

    "그건……."

    "왜요? 싫어요?"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떤 식이든 알리시아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아이는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겠으니, 생일이 언제인지나 말해봐."

    "다음달, 9일이요."

    "그럼 한 달도 안 남은 거잖아."

    "그러게 누가 우리 엄마 생일 모르래요?"

    "……."

    미카엘은 혀를 낼름 해 보이고는 총총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말했잖아요. 나 바쁜 사람이라고."

    "하아?"

    성가시다는 듯 손을 펄럭이는 미카엘에 카벨레누스는 혀를 찼다. 저런 모습을 보면 아이가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 약속 있으니까, 아저씨는 우리 엄마 선물이나 준비해요."

    "……."

    "물론 뭘 준비하든 내 것보단 별로겠지만."

    미카엘은 의기양양하게 말하곤 방에서 쏙 나가버렸다. 방에 남은 건, 어이없는 표정의 카벨레누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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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임스는 멍하니 텅 빈 캔버스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철 들기 전부터 당연하게 들어왔던 붓이었는데,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랐고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마치 누군가 모든 영감을 앗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냥 이대로 침묵하는 게 가장 좋겠지. 어차피 내가 침묵하면, 알리시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제임스는 벽에 기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서든 사내를 흠집 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짜증날 정도로 뭐든 잘한다는 미카엘의 말처럼 카벨레누스는 정말로 모든 게 완벽해 보여서 그를 깎아내리려고 할수록 오히려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자신은 어째서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 예전에 용기 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온갖 잡념들이 스스로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모른 척하려다가 집요한 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삼촌!"

    마주친 시선에 아이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마치 작은 반달 두 개가 아이의 얼굴에 소복이 내려앉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제임스는 닿지도 않는 팔을 휘휘 저으며 자신에게 반가움을 표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억지로 입술을 올렸다.

    "미카엘.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요. 오늘 같이 그림 그리기로 했잖아요."

    "그림?"

    "조금 있으면 엄마 생일이니까, 같이 그림을 그려서 선물해주기로 했잖아요."

    "……맞아. 그랬었지."

    제임스는 미카엘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계속해서 아이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얼굴에는 원망스러운 사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미카엘, 오늘은-."

    "얼른 그려요.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줘야죠!"

    몰래라기보다는 그저 알리시아가 모른 척해주고 있는 것뿐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미카엘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제임스는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며 다시 표정을 고쳤다. 아이에게까지 괜한 마음을 갖는 건 추한 일이었다.

    "그래. 그림 그리자."

    "네! 네! 얼른 그려요!"

    "그렇게 좋아?"

    "그야 당연하죠. 나도 엄마랑 삼촌처럼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걸요."

    제임스는 미카엘이 그리던 캔버스를 꺼내왔다. 캔버스에는 어설프게 그린 알리시아의 얼굴이 있었다.

    "이제 이 위에 바로 채색만 하면 되겠다."

    "……."

    "왜?"

    "지금 보니까 그림이 이상한 것 같아서요."

    평론가처럼 턱을 괸 미카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보기엔 좋은데? 저번에 미카엘도 만족했잖아."

    초보자답게 어설픈 구석이 있지만 나이를 고려하면 충분히 괜찮은 그림이었고, 애당초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할 사람이었다.

    "그땐 그랬는데 지금 보니까 아니에요. 이대로라면 분명 아저씨에게 지고 말 거예요."

    "진다고?"

    "솔직히 너무 하지 않아요? 그 아저씨 우리 엄마 생일도 모른데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엄마 생일도 모르는 아저씨한테는 안 질 거예요. 내가 엄마한테 가장 멋진 선물을 해줄 거라고요!"

    미카엘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벨레누스라면 분명 대단할 걸 준비할 게 분명했지만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 되겠어요. 역시 다시 그릴래요. 그래도 돼요?"

    "네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역시, 삼촌이 최고예요!"

    미카엘은 방긋 웃으며 연필을 쥔 채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해보자."

    "네! 네!"

    제임스의 지도에 맞춰 미카엘은 연필을 쥐었다. 캔버스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은 걸작의 완성을 앞둔 예술가처럼 진지했다.

    "지금은 윤곽만 잡는 거니 조금 손에 힘을 빼봐."

    "이렇게요?"

    "옳지. 그렇게 하면 돼. 잘하고 있어."

    "진짜요?"

    미카엘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그려봐. 이상하다 싶은 거 있으면 삼촌이 봐줄게."

    "네, 알겠어요!"

    미카엘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필을 고쳐 쥐었다. 제임스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미카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경험이 부족해도 보고 자란 게 그림이라서 그런지 미카엘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굳이 지적할 필요 없이 스케치가 끝나고 조금만 손봐주면 될 것 같았다. 제임스는 가만히 미카엘의 스케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있잖아, 미카엘."

    "왜요? 이상한 부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뭔데요?"

    "네 엄마 말이야."

    제임스가 멋쩍게 웃음을 흘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알리시아와 어설프게 이야기가 끊긴 후, 한 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관계가 무너질까봐 두려웠고, 그렇다고 침묵하기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게 싫었으니까. 결국 자신이 선택한 건, 알리시아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엄마요?"

    미카엘이 스케치를 멈추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엄마는 요즘 어때?"

    "엄마는 평소랑 같죠. 책을 읽거나, 나랑 놀아주고, 아저씨를 만나기도 하죠."

    "……아저씨랑은 오래 있어?"

    평온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제임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완전히 오래 있어요."

    "확실히 사이가 좋아졌나보네."

    "그래도 아저씨는 나보다 못 해요. 엄마는 날 가장 많이 사랑한댔는 걸요. 물론 나도 엄마를 가장 많이 사랑하고요."

    미카엘이 뿌듯하게 웃었다. 제임스는 아이를 따라 억지로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뗐다.

    "그밖에 몸 상태는? 아픈 곳은 없어 보여?"

    "아픈 곳은 모르겠는데, 요즘 들어서 엄마가 덜렁거리는 것 같긴 해요."

    "덜렁거려? 알리시아가?"

    "며칠 전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치마를 밟아서 넘어질 뻔했다니깐요?"

    "……치마를 밟을 뻔했다고? 몇 번이나?"

    "으음, 이번 주에만 벌써 두 번 봤어요."

    제임스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알리시아는 걸음이 느린 편이었고 자세도 곧았다. 매일 같이 입던 치마를 밟고 넘어질 뻔한 일이 그렇게 자주 있지 않았다.

    "다른 건 없었어? 엄마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거나, 아니면 피곤해 보였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제임스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단지 기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원래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았을 뿐더러,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은 거겠지?'

    생명을 소진해 힘을 사용해왔음에도 알리시아는 지금껏 멀쩡했다. 이제와서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괜찮았던 게 아니라, 지금까지 버텨온 거라고. 어쩌면 알리시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럴 리 없잖아.'

    제임스는 잡념을 지우기 위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리시아와 같은 색을 지닌 눈동자를 바라볼수록 오히려 생각이 깊어질 뿐이었다.

    "왜 그래요? 혹시 우리 엄마 아픈 거예요?"

    미카엘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아냐. 그런 거."

    "진짜요?"

    "그럼. 물론이지."

    "……."

    "삼촌, 못 믿어?"

    제임스가 웃자, 미카엘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 말은 믿어요.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잖아요."

    "……."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아파해도 나는 모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건 싫은데. 미카엘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겠죠? 무엇보다 지금은 아저씨도 있으니까요!"

    "아저씨가 무슨 상관인데?"

    "그야, 아저씨는 짜증나는 구석이 있어도 뭐든 잘하잖아요.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분명 아저씨가 다 해결해줄 거예요."

    "……내게 도움을 청해도 되잖아."

    제임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삼촌은 안 돼요."

    "왜?"

    "뭔가를 부탁하기엔 삼촌은 너무 힘들어 보이는 걸요. "

    잿빛 눈동자에 빤히 제임스를 응시했다. 아이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다. 눈치 빠른 아이는 어른들끼리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오고간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힘들어 보여?"

    "삼촌도 엄마를 좋아하잖아요."

    "……."

    "괜찮아요. 난 삼촌 마음 이해되거든요. 삼촌도 나처럼 엄마를 빼앗기는 것 같은 게 싫은 거죠?"

    미카엘이 이가 드러날 정도로 씨익 웃었다. 제임스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뱉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내가 느끼는 건, 네 것과는 다를 거야."

    "뭐가 다른데요? 삼촌도 엄마가 행복하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

    "삼촌은 착하잖아요. 마음씨도 넓고. 그러니까, 우리가 좀 봐주는 걸로 해요. 그 아저씨 성격은 별로라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무엇보다 엄마를 웃게 해주는 사람이잖아요. 미카엘은 자신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아이를 따라 미소를 유지하려다가 결국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삼촌은 착하지 않아."

    "그럴 리가요. 삼촌은 착해요. 나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좋은 걸요."

    미카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보다는 그 아저씨를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저씨는 좀 더 지켜봐야죠. 엄마를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혼자 뒀는데, 이제와서 조금 잘 해준다고 받아줄 순 없는 거잖아요."

    "오랫동안?"

    "네, 오랫동안."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제임스가 헛숨을 뱉었다. 어쩌면 미카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원체 눈치가 빠른 아이니, 이미 제 친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지도…….'

    제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자신이 잘 아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말갛게만 느껴지던 아이의 눈동자가 이제는 영악하게만 보였다. 결국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에게 너그러운 건, 그가 자신의 친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아이의 얼굴 윤곽에서 더욱 짙게 카벨레누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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