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5)화 (85/164)

85화. 아군

2020.12.24.

"전하, 저희 도련님께서는-."

"됐습니다. 영감님. 굳이 날 옹호해줄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전하께서는 불쾌해 보이시지도 않으시니까요."

펜리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체르의 옆자리에 서서 다시금 예를 갖췄다. 머리와 뺨, 그리고 가슴을 연이어 가볍게 친 후 고개를 숙이는 건 로아킨만의 인사법이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슈바르한 대공 전하. 제 이름은 팔라마르의 여섯 번째 아들, 펜리르 로아킨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하는군."

"전하께서 저희를 야만인으로 취급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받았거든요."

"중요한 건 그대들이 얼마나 제 몫을 할 수 있느냐니까."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손을 움직여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펜리르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카벨레누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대가 가진 결정권은 어디까지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애당초 전하의 제안을 듣고 호기심을 가진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거든요."

"제국에 대한 원한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현 황제의 모친께서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한 이후, 로아킨은 극한에 몰렸으니까요."

"그럼 그대는 왜 이곳까지 온 거지? 그대는 제국을 원망하지 않나?"

"원망합니다."

두 사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펜리르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저는 그동안 무수히 많은 원망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뿐?"

"원망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약자는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값싼 동정이라도 받으면 다행일 뿐입니다."

"……."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구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쟁취해야겠다고."

펜리르의 양 입술이 말아올라갔다. 서글서글한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그간 숨겨왔던 탐욕이 짙게 서려 있었다.

"내 앞에서 지나치게 솔직한걸."

"전하께서 제 무례를 용인하실 거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눈치가 빠르군."

"안타깝게도 제 위로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거든요. 눈치를 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죠."

"그 중 셋은 이미 몰락 직전이던 걸."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머지 둘도 조만간 몰락할 겁니다."

펜리르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대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 수준은 어느 정도 되지?"

"로아킨의 병사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다들 체력이 튼튼하고 몸놀림이 민첩해 잘만 활용하면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군. 움직일 수 있는 수와 수준을 내 부관에게 알려주도록 해. 확인해보고 작전에 투입시키지."

"그러면 벨타인은 저희 쪽에 넘겨주시는 겁니까?"

"내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수행해준다면 얼마든지 내주지."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선 가제프가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에는 벨타인을 비롯한 노이슈타인의 지도가 있었고, 그 위에는 바다를 중심으로 붉은 선들이 여러 가닥 그려져 있었다.

"이건……."

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펜리르의 표정이 굳었다. 지도 위의 붉은 선은 단순히 그어놓은 게 아니었다. 그건 항로였다.

"그대들은 벨타인을 기점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게 목적이겠지."

"……."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할 수만 있다면 로아킨의 상황이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펜리르는 급히 표정을 고쳤지만 그때는 늦은 후였다.

"그대들의 시도 자체는 나쁘진 않지만,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건 꽤 어려울 거야. 그 바다에는 변수가 많거든."

"전하께서 뭘 말씀하고 싶으신지 모르겠군요."

"벨타인에 있는 항구를 타국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이유를 아나?"

"아무래도 노이슈타인은 폐쇄적인 국가였고-."

"노이슈타인은 소국이라 무역할 만한 대단한 물건이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쪽 바다는 암초가 심하거든. 괜히 잘못 들어왔다간 침몰되기 일쑤지."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지도 위 붉은 선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항로는 총 열 개. 하지만, 그 중 무사히 도달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지. 그 지역에는 암초 같은 게 많아서 배가 자주 침몰하거든."

"……."

"깊이 생각해도 소용없어. 어차피 나오는 결론은 로아킨은 손해 볼 게 없다는 거니까."

"그렇다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 같아서?"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현 황제와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하면서 손을 빌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건, 권력이 아니거든."

"그러면 왜 굳이……."

"내겐 지켜야 하는 것이 있거든."

순간 카벨레누스가 장난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진심이었다. 펜리르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겨졌다.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요?"

"나는 이번 일에 무엇도 아낄 생각이 없어.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완벽하게 지키고자 할 거고, 그걸 위해선 뭐든 할 셈이지."

"뭘 지키고자 하시는지 물어도 됩니까?"

"이미 보지 않았나?"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미롭다는 듯이. 그건 온갖 악명을 뒤집어쓴 사내와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사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선량한 사내는 아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하고 버릴 수 있지."

단 하나, 그녀만 제외하곤. 짐승을 닮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카벨레누스는 지금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선 이득을 따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대는 알겠지?"

"원하는 바를 얻고 싶다면, 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지키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은 모양이야."

카벨레누스는 느긋하게 펜리르 쪽으로 지도를 내밀었다.

"나는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을 좋아해. 절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져야 하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걸 잘 알거든."

"제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럼 전하께서는 어떤 사람이십니까?"

"나는 욕망을 알아보고,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지."

카벨레누스의 손끝이 천천히 지도를 쓸었다. 커다란 손 아래로 보이는 붉은 선을 바라보는 펜리르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만약, 제가 전하의 생각 이상으로 성과를 낸다면 이것 이상으로도 주실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대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전하께서는 로아킨의 성장이 두렵진 않습니까? 로아킨이 굳건해지면 가장 먼저 제국부터 노릴 텐데요."

체르가 급하게 펜리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펜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에게는 듣고 싶은 답이 있었다.

"두려울 리가. 로아킨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려면 수십 년이 걸릴 텐데, 머리가 제대로 달렸다면 먼저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겠지."

"그 말씀은……."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먼저 싸움을 걸 일은 없을 거야. 내게 로아킨은 별 의미가 없거든."

"……."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이군."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펜리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빤히 보였다.

"제국의 압력만 없어져도 로아킨의 삶은 훨씬 나아질 테니까요."

"그건 그대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 외세가 없다 해도 안쪽에서 곪아 터지면 그만이거든."

"충고로 듣겠습니다."

펜리르가 능청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카벨레누스는 혈기로 가득 찬 청년을 보며 눈가를 느긋하게 훑었다. 아직은 젊고 경험이 부족해 어설픈 티가 묻어나긴 하지만, 반질거리는 두 눈에선 기질이 엿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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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대체 콩 같은 건 왜 먹는 거예요? 이건 맛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그러는 아저씨도 콩은 하나도 안 먹었잖아요."

미카엘은 포크로 카벨레누스를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카벨레누스의 그릇에는 손도 되지 않은 콩들이 수북했다.

"나는 콩 같은 거 안 먹어도 크잖아."

카벨레누스는 예의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고기로 콩을 가렸다. 하지만 불만으로 가득 찬 미카엘의 표정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나도 콩 같은 거 안 먹어도 클 거거든요?"

"큰 후에나 말하라니까."

"두고 봐요. 내가 아저씨가 괘씸해서라도 클 거예요. 아주 거대하게 커버릴 테니까 그때 가서 무서워하지나 마요."

"퍽이나."

카벨레누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다가 마주친 시선에 슬쩍 눈을 굴렸다. 어느샌가 알리시아가 식기를 내려놓은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미카엘. 편식하면 못 써."

"그치만, 아저씨도 안 먹잖아."

"그건-."

"엄마가 전에 그랬잖아! 자기도 안 하는 걸 하라고 하는 건 나쁜 짓이라고!"

"그거랑 이거는-."

"그리고, 원래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거라고도 했잖아!"

아이의 논리에 할 말이 없다.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리다가 이내 카벨레누스 쪽을 바라봤다. 카벨레누스는 모종의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먹지 말라고 해. 콩 같은 거, 안 먹어도 문제는 없잖아."

"성장기 아이는 골고루 먹어야 해요."

"다른 걸 더 먹이면 되지."

"……."

"……알았어."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으며 수저로 접시의 콩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주방장이 최고의 솜씨를 부렸다곤 하지만 맛이며, 식감이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차라리 돌을 씹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봤지? 너도 얼른 먹어."

"접시에 있는 거 다 먹어야죠."

"……."

"아저씨가 다 먹으면 나도 다 먹을게요."

미카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카벨레누스를 골릴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내가 먹으면, 너도 바로 먹어."

"네?"

"네가 갑자기 못 먹겠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잖아."

"아저씨. 우리 사이에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

미카엘이 애써 웃며 몸을 배배 꼬았지만 그런 것에 넘어갈 카벨레누스가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수저로 미카엘의 접시를 가리켰다.

"있을 리가."

"……."

"잔말 말고 너도 한 수저 떠."

"맞아. 그러면 되겠네. 미카엘, 얼른 수저 들어."

아저씨에 이어서, 엄마까지 합세하니 더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미카엘은 울상이 된 얼굴로 콩 한 수저를 입에 넣었다.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 알았지?"

"으응……."

"다 씹었으면 또 떠."

"아직 다 안 씹었거든요."

이제 입안에 남은 게 없음에도 미카엘은 모른 척하고 씹는 흉내를 냈다.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이의 접시에는 콩이 한 가득 남아 있었다.

"아저씨."

"왜?"

"콩 맛없죠?"

"맛없어."

"그쵸? 막 그만 먹고 싶어지죠?"

미카엘은 수저로 콩을 뒤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계속 먹긴 할 거야."

"왜요? 맛없다면서요!"

"요즘 착실하게 노력 중이거든."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수저로 남은 콩들을 모았다. 이제와서 못하겠다고 하기에는 그를 바라보는 기대 어린 시선이 있었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는 것으로 기대에 화답했다.

"봐, 미카엘. 엄마랑 아저씨는 다 먹었잖아. 이제 미카엘만 남았어."

"그치만……."

"콩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야 멋진 어른이 되지."

"……."

"아저씨와도 약속했잖아."

"……치이, 알았어."

미카엘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다시 수저를 들었다. 알리시아는 오물거리는 아이의 뺨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카벨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알리시아가 미카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자,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밥 다 먹었으면 렉스나 보러갈까?"

"……."

"오늘은 털도 직접 만지게 해줄게."

"……진짜요?"

"물론 그 콩들만 다 먹으면 말이지."

카벨레누스가 턱짓으로 절반 남은 콩을 가리켰다. 미카엘은 한껏 우울한 얼굴로 콩을 한 수저 더 입에 밀어넣었다.

"어차피 오늘은 렉스 못 봐요."

"왜?"

"볼 일이 있거든요."

"네가 볼 일이 어딨어."

"어딨긴요. 나도 무지 바쁜 사람이거든요?"

미카엘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맨날 놀기만 하면서."

"이번에는 노는 거 아니에요."

"그럼?"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요."

"중요한 일? 그게 뭔데?"

"비밀이라서 말해줄 수 없…… 아니다! 아저씨도 껴줄게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게 좋겠어요!"

세상 다 산 것처럼 울적해하던 미카엘의 얼굴이 불현듯 밝아졌다. 카벨레누스는 지나치게 들뜬 아이의 눈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불안하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미카엘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럴수록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아이에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엄마한테도 비밀이야?"

"그게…… 엄마한테는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왜?"

알리시아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리자, 미카엘의 표정이 단박에 어색해졌다.

"나중에 말해야 더 재밌는 거라서 그래!"

"정말?"

"응! 정말로! 진짜 나중에 알아야 좋은 거야! 완전! 진짜!"

마치 고장난 장난감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말투는 대놓고 수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언뜻 봐도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미카엘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표정은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봐도 되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모른다고?"

"미카엘이 말 안 해줬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죠."

알리시아가 웃으면서 턱을 괬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알리시아는 모른 척할 뿐이지 이미 다 안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미카엘뿐이었다.

'도대체 둘 다 무슨 생각인 거지?'

카벨레누스는 꼭 닮은 잿빛 눈들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는 어느 쪽도 선뜻 먼저 속내를 이야기해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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