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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82)화 (82/164)
  • 82화. 원하지 않는다면

    2020.12.14.

    "어때요? 로아킨 쪽에서 협조해줄 것 같아요?"

    "조건만 맞으면, 충분히 진행 가능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앉은 그녀의 무릎에는 두툼한 책이 놓여 있었다.

    "다만, 그 조건이 좀 애매해서 말이야."

    "그들이 무리한 요구라도 하던가요?"

    "아니."

    "그럼요?"

    "그게……."

    카벨레누스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말끝을 흐렸다. 알리시아의 입장에선 충분히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구였다.

    "로아킨이 노이슈타인이라도 요구하던가요?"

    "……어떻게 알았지?"

    "로아킨은 노이슈타인과 국경이 인접한 이웃국가였으니까요."

    "로아킨에 대해 잘 아나? "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요."

    알리시아는 대답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에게 닿지 않는 여자의 시선에 아쉬워하며 좀 더 상체를 기울였다. 이럴 거면 맞은 편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을 걸 그랬다.

    "조금이 어느 정도지?"

    "로아킨의 도적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모습을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예전에 정혼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정혼이라고?"

    알리시아는 태연하게 다음장을 넘겼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눈매는 이미 굳은 지 오래였다.

    "……누구의 정혼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정혼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정혼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돼요."

    "그대의 정혼이었다는 이야기군."

    카벨레누스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봤다.

    "오해는 마세요. 정말로 정혼 같지 않은 정혼이었는걸요.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을 정도였죠."

    "그럼에도 불쾌하다면?"

    "설마 질투하시는 거예요?"

    "맞아. 질투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라 해도 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유로 그 사내를 질투하고 있어."

    카벨레누스는 애써 표정을 풀고자 했지만 질투로 얼룩진 얼굴을 전부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저는 어땠을 것 같아요?"

    "……."

    "저도 질투했었는데."

    "……."

    카벨레누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알리시아는 피식 웃으면서 도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정혼 같지도 않은 정혼이었어요. 제 힘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절 헐값에라도 팔아보겠다는 심산이었거든요."

    "……감히, 누굴 헐값에 팔아?"

    "옛날 일이에요. 말만 나왔을 뿐이지,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못했고요."

    헐값이라도 벌 것인가, 아니면 사라진 힘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부친은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했고 결혼 이야기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비웃으려고 왔던 엘레나가 아니었다면, 알리시아는 자신의 혼담이 오고갔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제게 노이슈타인은 특별하지 않아요. 노력하지 않아도 그곳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죠."

    "……."

    "노이슈타인 문제로 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미카엘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일이라면 해야죠."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대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어머니와의 기억도 그곳에 있잖아."

    "……."

    "내 앞에서까지 굳이 강한 척할 필요 없어.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거야."

    알리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 올려다본 사내의 눈빛이 다정해 괜히 코가 찡했다.

    "솔직히 노이슈타인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많은 일이 있었던 곳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곳은 땅일 뿐이에요."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제가 가지고 있고, 그걸 추억하는 것도 저니까요."

    "……진심이야?"

    "네. 진심이에요. 제가 아는 어머니라면, 분명 제 선택을 응원해주셨을 테니까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뺨에 닿았다. 카벨레누스는 잠자코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손바닥을 통해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저는 지금 기분이 꽤 좋은 걸요."

    "왜, 기분이 좋은데?"

    "당신의 노력을 봐서요."

    "……."

    "그게 참 기뻐요. 우리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서요."

    알리시아의 손이 천천히 카벨레누스의 뺨을 스쳤다. 다소 거친 손바닥이 여린 살을 스칠 때마다 사내의 속눈썹이 떨렸다. 들어올려진 눈꺼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금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여자의 얼굴을 비췄다. 꿀꺽-.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흘러내린 사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살짝 올려다본 시선에는 거칠게 울리는 목울대가 보였다.

    "로아킨은 노이슈타인의 땅 중에서 벨타인을 원하고 있어."

    "왜 하필 벨타인이죠?"

    "어차피 로아킨은 다른 영토를 통치할 여력이 되지 않으니, 도움이 되는 땅만 갖자는 거지. 현명한 선택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자꾸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카벨레누스는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다음 말을 이었다.

    "벨타인의 북쪽은 곡창지대인데다가 남쪽에는 항구가 있어서 멀리 보면 무역까지 넘볼 수 있거든."

    "혼혈이 많은 것도 이유일 거예요."

    "그렇겠지. 문화가 섞여 있으면 확실히 통치하기도 쉬울 테니까."

    역시 참을 수 없다. 꽉 다문 잇새로 날 것 그대로의 숨이 토해졌다. 카벨레누스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겨우 몸을 도로 일으켰다. 펼쳐진 사내의 손바닥에는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다음 번에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더 하다간……."

    카벨레누스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무조건 순종만 하기에는 포악스러운 본성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귀한 대접만 해주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탐하고 오롯이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게 입을 맞추고 싶으신 거예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카벨레누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알리시아의 뺨은 저런 말을 해도 예전처럼 새빨갛게 물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귓불에는 붉은 기가 미약하게 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사내를 미치게 했다. 그것이 여자에게 사내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반증 같아서.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서 문제인 거지."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 와중에도 절 보는 알리시아의 시선이 달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

    "그러실 거죠?"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차마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의 모든 것을 배 속으로 우겨삼키고 싶은데,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롯이 절 위한 미소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니까. 결국, 그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 * *

    "방까지 데려다줄게."

    "매번 이러시면 다들 욕할 거예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품에서 도로 책을 가져왔다. 책 정도는 얼마든지 들 수 있는데도 사내는 그마저도 큰일이 난 것처럼 굴었다.

    "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로-."

    "그대로 어떻게 하시게요?"

    "음, 그게 말이지……."

    카벨레누스는 슬쩍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알리시아는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책을 카벨레누스의 시야에서 감춰버렸다. 카벨레누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그녀의 품 속 책을 빼앗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 그렇게 안 약해요."

    "그건 나도 알지. 다만, 워낙 그대가 작고 말랐으니까……."

    "저 하나도 안 작아요."

    "나보단 작잖아."

    "전하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죠. 전하보다 큰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잖아요."

    알리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다른 제국의 사람들보다도 평균 키가 큰 슈바르한에서도 독보적으로 컸다. 알리시아는 지금껏 카벨레누스보다 키가 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내게 그대가 작아 보인다는 거지."

    "미카엘에겐 작다고 놀리셨으면서."

    그새 가서 일렀단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살짝 삐뚜름해졌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앞에서 섰다.

    "역시 안 되겠어요. 같이 가는 건 여기까지만 해요."

    "왜, 설마 내가……."

    차마 미카엘을 놀려서 그러는 거냐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는다. 카벨레누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간만 구겼다.

    "전하께서는 좀 더 저를 믿으실 필요가 있어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가 왜 이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잃어봤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것만이 아니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었지만, 불안함을 놓진 못했다. 감각이 예민한 탓인지, 그는 본능적으로 힘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내가 그대를 얼마나 믿는데."

    "절 믿으신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셔야죠."

    "행동?"

    "절 믿고 여유 있게 행동해주세요. 저는 만지면 깨지는 유리가 아니잖아요."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선 넘어오면 화낼지도 몰라요."

    덧붙여진 알리시아의 말에 카벨레누스는 급하게 발을 뺐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바닥의 선이 지금은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다.

    "저는 모든 걸 다 해주는 것보다는 상대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알리시아는 미소와 함께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카벨레누스는 이번에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저 초조한 얼굴로 알리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하께서 먼저 등을 돌리세요. 그리고, 집무실로 돌아가세요."

    "뒷모습이라도 보면 안 되나?"

    "안 돼요."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저는 전하께서 절 기억할 때, 뒷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

    언젠가 카벨레누스에게 자신이 가진 힘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에게 맹목적인 사내에게는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했다. 힘을 사용하든, 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끝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끝은 카벨레누스에게 찾아오는 것보다 이를 테니까. 알리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카벨레누스는 우두커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조명에 반사된 잿빛 눈동자는 오색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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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영감님."

    "왜."

    "나 말이에요. 오늘 여자 하나를 봤거든요?"

    "이놈이 타국까지 와서 계집질을 하려고-!"

    "잠깐! 진정해요, 영감님! 나 아직 본론도 아직 안 꺼냈단 말입니다!"

    달려들려는 체르에 펜리르가 다급하게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외쳤다.

    "본론은 무슨! 네놈이 여자 소리를 할 때는 뻔하지!"

    "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없었어요? 이것 참, 섭섭합니다!"

    "네놈이 신뢰 있는 짓을 해봤어야 알지!"

    "그건 다 편견이라고요!"

    휙휙 휘둘러지는 체르의 주먹을 피하며, 펜리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진심이 섞인 주먹에서는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편견은 무슨. 바람둥이 소리가 괜히 나오냐? 응?"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아니. 그건 됐고. 어쨌든 내 말이나 좀 들어봐요!"

    "보나마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겠지. 네가 여자 이야기할 때는 뻔하잖나."

    "그 여자가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어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봅시다."

    펜리르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체르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하녀인가보지."

    "하녀치곤 옷이 너무 좋았는 걸요."

    "그럼 시녀이던가."

    "시녀치고도 옷이 좋았어요."

    멀리서 보긴 했지만,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드레스는 예사품이 아니었다. 고위층이나 쓸 법한 고급 천으로 만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보통 그쯤 되면, 다른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여자가 대공의 애인이라고 해도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다."

    체르가 성가시다는 듯 두툼한 손을 펄럭거렸다.

    "그 여자가 적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라고 해도요?"

    "아. 네놈이 왜 눈이 돌아갔는지 알겠군. 딱, 네놈 여자 취향이잖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펜리르는 두 손을 내보이며 고개를 저었지만, 체르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노이슈타인의 막내 공주 말입니다."

    "그 소리라면 더 듣기 싫은데."

    "그래도 들어봐요. 노이슈타인에 민감한 슈바르한 대공과 막내 공주의 외형을 가진 여자. 듣기만 해도 수상하지 않나요?"

    "노이슈타인 왕족들은 전부 죽었어."

    "전부는 아니죠. 막내 공주는-."

    "그녀도 죽었지. 그리고, 그녀를 죽인 건 슈바르한 대공이고."

    체르는 턱을 괸 채로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미리 말해두는 건데, 네가 말하는 대공의 비밀이 그런 거라면 진작에 그만 둬."

    "……."

    "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냐.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자고. 우리는 복수심에 눈 먼 자들이 아니라고 말이다."

    "내가 왜 복수를 하겠어요. 나는 항상 로아킨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인 걸요."

    "나도 네가 그러길 바라기에 데려온 거다. 네 형제들 중에서 네놈이 가장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딱,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곤. 체르는 검지로 테이블 위 거울을 툭툭 건드렸다. 거울 속에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들뜬 얼굴의 사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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