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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81)화 (81/164)
  • 81화. 새로운 손님

    2020.12.10.

    "처음 뵙겠습니다, 슈바르한 대공 전하. 저는 로아킨의 재상, 체르 세잔타. 그리고 제 뒤에 있는 녀석은 제 호위인 펜릴입니다."

    머리가 군데군데 희끗한 중장년의 사내, 체르가 예를 갖추며 먼저 카벨레누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벨레누스는 내밀어진 체르의 손을 맞잡으며 선뜻 그의 인사를 받았다.

    "먼 길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군."

    "전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그건 앞으로 우리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아킨은 상대가 한 만큼 하는 민족입니다. 신뢰는 로아킨의 자랑이거든요."

    체르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는 없겠군.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좋아하지 않거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체르는 카벨레누스의 손짓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이미 서신으로 서로의 목적을 어렴풋이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로의 이득을 분명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저희가 황제의 편인 척, 제국의 민심을 흔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죠."

    "그 후?"

    "로아킨은 여러 부족들이 하나로 모여 세운 일종의 동맹 국가입니다. 맹주가 절대적인 힘을 유지하지 않는 이상, 제후들의 알력다툼에 내부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죠."

    "로아킨은 풍족한 땅이 아니니 더 그러겠지."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슈바르한이 얼어붙은 땅이라면, 로아킨은 메마른 땅이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메마른 사막의 땅 역시, 생명이 살기 버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하께서는 로아킨에 대해 잘 아시나봅니다."

    "슈바르한도 비슷한 고충이 있었으니까."

    "비슷하지만 결과는 다르지요. 슈바르한은 훌륭하게 이겨냈지만, 로아킨은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마법이라도 나눠달라는 건가?"

    "원한다고 해도 주시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체르가 호탕하게 허허 웃었다.

    "내가 줄 수도 있다면?"

    "……진심이십니까?"

    "물론. 다만, 날 만족시킬 정도의 성과를 얼마나 내주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마법이 달라질 뿐이지."

    카벨레누스가 오만하게 웃었다.

    "이런, 이런. 전하께서는 꽤나 저희와 손을 잡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이번 싸움을 끝내고 싶거든. 굳이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아."

    "슈바르한의 늑대가 할 말 같진 않군요."

    "로아킨이 아니더라도 내 사냥감들은 충분히 널려 있거든."

    카벨레누스가 느긋하게 턱을 어루만졌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사내는 여유롭다 못해 자신만만해 보였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신다면야 저희 쪽에서도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이야기가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군."

    "다만, 저희가 원하는 건 마법이 아닙니다."

    "마법이 아니다? 그럼 뭐지?"

    "바이젠을 기억하십니까? 8년 전, 전하께서 함락시키셨던 땅 말입니다."

    그 땅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그곳은 바이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카벨레누스는 그보다 더 익숙한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노이슈타인을 말하는 건가?"

    "옛 이름을 꺼내면 전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이름 같은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로아킨의 속내일 뿐이지."

    마법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닌 뿐더러, 슈바르한의 마법은 특별했다. 척박한 환경에 맞춰 생존에 직결된 마법들이 많았고, 그만큼 로아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속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노이슈타인이 필요한 거지?"

    "제 조국이 로아킨이기 때문입니다."

    체르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무슨 뜻이지?"

    "미래를 염두하면 마법을 선택하는 것이 옳겠지요. 하지만 현재의 로아킨에는 미래로 나아갈 힘조차 없습니다."

    "……."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다룰 수도 없는 마법이 들어온다면, 오히려 제후들의 욕심만 사 분란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미래보다는 현재를 위하겠다는 건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두가 순간을 내다볼 때, 그보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지배자의 역할이었지만, 로아킨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로아킨의 현 맹주는 제후들의 오랜 반목을 제지하고 겨우 통일에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맹주는 제후들의 알력 다툼을 중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하고 있었다. 제대로 싸울 힘을 기를 때까지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나, 현재의 로아킨은 주도적으로 동맹을 이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노이슈타인을 달라?"

    "정확히는 제국의 속국에서의 해방과 노이슈타인의 동쪽 땅, 벨타인을 원합니다."

    주름진 눈매 사이로 녹색 눈이 일순간 빛났다. 카벨레누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으레 턱을 괬다.

    "벨타인 정도로 되겠나?"

    "충분하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습니다. 벨타인은 로아킨과 인접한 땅이고, 풍부한 식량을 자랑하는 곡창지대니까요. 그것만으로도 로아킨에게는 이득입니다."

    체르가 두 팔을 벌리며 가슴을 쭉 폈다. 스스로가 무해하다는 걸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몸짓이었다.

    "물론 전하께도 이득이고 말입니다."

    별반 반응 없는 카벨레누스의 표정에 체르는 슬쩍 벌린 팔을 다물었다. 좋다, 싫다하는 반응도 없이 턱을 괴고 있는 카벨레누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생각해보지."

    "……생각 말입니까?"

    "아무리 급해도 먼 길 온 손님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카벨레누스는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정작 그의 시선은 체르가 아닌, 그의 뒤에 선 젊은 청년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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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만만치 않은 상대군요."

    "네 속셈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지."

    체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카벨레누스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진짜 결정권자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내 속셈이 뭐가 어때서 그럽니까."

    "어떻긴! 네 속셈은 항상 시커멓지.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말이야."

    "그 시커먼 놈을 대동한 건 당신 쪽이었잖아요."

    "적어도 네놈은 로아킨을 위해서 움직이니까."

    "과찬이시네요."

    청년의 능청스러운 몸짓에 체르는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데려오긴 했지만, 가벼워 보이는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냐?"

    "뭘 말입니까."

    "대공이 다 아는 눈치였다고."

    "상관없어요. 어차피 알아차리라고 붙인 이름인 걸요. 펜리르. 펜릴. 로아킨과 블랑셰의 발음 차이일 뿐인데, 누가 알아차리지 못하겠어요."

    펜리르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보이며 키득거렸다.

    "설마 들킬 거라는 걸 알고 한 거야? 나한테는 들킬 리 없을 거라고 했잖아!"

    "슈바르한의 늑대가 로아킨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잖아요."

    "그게 목적이었다고?"

    "네. 그게 목적이었어요."

    펜리르는 커튼을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눈밭 투성이인데, 슈바르한은 누구의 도움없이도 자립하고 있었다. 로아킨에겐 꿈과 같은 일이 슈바르한에는 실존했다.

    "왜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한 건데?"

    "슈바르한의 늑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그냥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미친 살인마인지, 아니면 머리가 존재하는 권력자인지."

    "그게 우리에게 중요해?"

    "중요하죠."

    다들 어떤 인간이 황위에 앉든 제르페누스보다 나을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펜리르의 의견은 달랐다. 카벨레누스는 상황에 따라선 얼마든지 제르페누스보다 악질적인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현 황제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슈바르한 대공은 다르죠. 그가 가진 정통성과 무수히 많은 승리들로 인정받은 힘은 제국을 결집시킬 겁니다."

    "지금보다 제국의 힘이 막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인가?"

    "대공이 야심가라면 대륙 통일도 노릴지도 모릅니다."

    펜리르는 우스갯소리처럼 뱉었지만 체르는 웃지 못했다. 그 말이 단지 장난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겐 최악이 될 수도 있단 소리군. 지금처럼 속국으로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제가 여기 온 거죠."

    펜리르는 몸을 돌리고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그의 두 눈에선 로아킨의 자랑인 녹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건데?"

    "제가 본 대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가 있어 보이더군요. 소문대로 피에만 미친 놈이었다면, 제 이름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 아닙니까."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데?"

    "의미는 많죠. 저와 영감님은 복수심에 눈 먼 자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날 띄워주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체르는 웃었지만, 그의 미소에는 씁쓸함이 엿보였다. 로아킨이 벼랑 끝까지 내몰린 데에는 제국의 영향도 컸다. 거래하던 상인들조차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등을 돌렸고, 겨우 물건을 들여와도 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몇 배나 비싸 매번 속을 끓어야 했다. 아무리 감정을 배제하려 해도 이제와서 제국의 손을 빌린다는 것 자체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띄워드리려는 게 아니라, 부탁을 드리려는 겁니다."

    "부탁? 무슨 부탁?"

    "우리만이라도 자존심 좀 버려보자는 뜻이죠. 멍청한 내 형제들처럼 감정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로아킨을 위해 뭐든 해보자는 겁니다. 설령 비굴해져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하아?"

    체르가 어이없다는 듯이 펜레르를 흘겨봤지만, 펜리르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대공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손해를 감내할 생각이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웬만하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거라는 거죠."

    "그러기에는 선을 긋는 느낌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요?"

    "무슨 이유?"

    "노이슈타인이 언급되자, 대공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던 걸요."

    카벨레누스는 표정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공들여 신경 쓰지 않는 이상,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가끔 보이는 동요가 크게 보이는 법이었다. 미묘한 변화를 예리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훨씬 유리했다.

    "대공의 표정이 변했다고? 언제? 나는 못 봤는데?"

    "그야, 아무래도 영감님은 나이가 있으시-."

    "뭐?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이 진짜!"

    "잠깐! 잠깐!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펜리르는 달려드는 체르를 급하게 달래며 제자리에 앉혔다. 성난 곰처럼 눈을 부릅 뜨고 씩씩거리는 체르는 조금이라도 펜리르의 말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앞발을 날릴 기세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공이 수상하다는 말입니다."

    "수상하다고?"

    "이상하지 않나요? 왜, 대공은 노이슈타인을 그렇게 신경쓰는 걸까요?"

    "그야, 노이슈타인은 식량 수급이-."

    "슈바르한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 가능합니다. 굳이 멀리 떨어진 노이슈타인에서 식량을 수급할 이유는 없어요."

    펜리르는 누그러진 체르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슈바르한 북쪽에는 바다가 있으니 우리처럼 항구를 노릴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교역을 즐겨하지도 않습니다."

    "더 말해봐."

    체르가 펜리르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펜리르는 그제야 다시 환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공은 예전부터 노이슈타인에게 후했죠. 전쟁 피해를 복구한 것 외에는 노이슈타인에 깊게 관여해본 적이 없습니다."

    "……."

    "처음에는 노이슈타인을 로아킨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여겨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거군?"

    "네. 그럴 확률이 큽니다."

    "좋아.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했어. 그런데, 그게 우리가 신경 쓸 문제인가?"

    "당연히 신경 쓸 문제죠."

    펜리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에게 노이슈타인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설마 그 정도일까. 솔직히 마법보다는 땅을 조금 떼어주는 편이 낫잖아."

    "그건 저희의 판단일 뿐, 대공의 입장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인데."

    체르는 깊게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 문제가 복잡해지기 전에 미리 한 번 알아보자는 거죠."

    "괜히 들쑤셨다가 문제가 커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영감님을 실망시켜드린 적이 있습니까?"

    펜리르가 느긋하게 잠긴 목 단추를 풀었다. 대공 앞이라서 자제하긴 했지만 역시, 묶여 있는 감각은 딱 질색이었다.

    "자만하지 마. 아무리 노련한 낙타도 사막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는 법이야."

    "길을 잃어도 노련한 낙타는 다시 길을 찾는 법이죠. 노련하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요."

    "하여간, 말은 잘하지."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할 겁니다."

    곧 영감님 앞에 대공의 비밀을 가져다드리죠. 펜리르의 양 입꼬리가 자신만만하게 위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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