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오래 전에 했어야 하는 말
2020.12.07.
"로아킨 쪽에서 보낸 사람이 오늘 중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저쪽에서 눈치챈 것 같나?"
"슈바르한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상인단에 섞여 함께 움직이고 있어서, 쉽게 눈치채진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군."
카벨레누스는 펼쳐놓은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에는 붉은 색으로 몇몇 장소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거래가 이루어지고 곧장 움직일 수 있게 대비해둬."
"바로 움직이실 겁니까?"
"괜히 시간 끌 거 없지. 저쪽에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움직이는 게 나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똑! 똑! 말을 끊는 노크 소리에 가제프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벌써 로아킨이 도착하진 않았을 텐데……."
"내가 부른 거야."
"전하께서요?"
"꼬마에게 할 말이 있어서."
"꼬마라고 하면, 도련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제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미카엘이 먼저 카벨레누스를 찾아오는 일은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갑자기 미카엘을 집무실로 부른 까닭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눈이지?"
"아무래도 전하께서 도련님을 먼저 찾으셨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내가 그랬나?"
카벨레누스는 턱을 괬다.
"네. 그러셨습니다."
가제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이미 은근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하긴,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미카엘이 먼저 오긴 했지."
"가끔은 전하께서 먼저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다가가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할 참인데."
"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가제프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하지만 정작 카벨레누스는 태연해 보일 뿐이었다.
"사과하기로 약속했거든."
"누구와 그런 약속을……."
가제프는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카벨레누스에게 사과 같은 걸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 * *
"할 말이 있다면서요. 할 거면 얼른 해요."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미카엘은 눈에 힘을 콱 줬다. 하지만 재촉에도 카벨레누스의 입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저씨."
"잠시 기다려봐."
"아저씨가 먼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카엘에게 사과를 하기로 했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어차피 알리시아의 배 속에 있을 때 있던 일이었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일을 사과한다는 건, 막막한 일이었다.
"할 말 없으면 저 그만 갈 거예요?"
"기다려봐. 곧 할 거야."
"그 말은 아까부터 계속 했잖아요."
"……."
"진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맞아요?"
미카엘의 양 눈썹이 추켜올라갔다. 카벨레누스는 누굴 닮은 건지, 유난히도 집요한 시선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해."
"네?"
"미안하다고."
"……."
"내 멋대로 판단해서 널 위험에 빠트릴 뻔했어. 사과할게."
외형이 알리시아를 닮아서 그런 걸까. 미카엘이 저런 식으로 빤히 바라볼 때면 괜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고작 말일 뿐인데, 미안하다는 짤막한 말을 뱉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곤 했다.
"……아저씨, 미쳤어요?"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낼 뿐이지만.
"누가 미쳤다는 거지?"
"당연히 아저씨죠."
"……."
"아저씨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리 없잖아요."
미카엘은 대놓고 질색하며 소름 돋은 양팔을 쓱쓱 쓸어내렸다.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러는 거지?"
"엄마요."
"네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
카벨레누스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고, 미카엘은 그와 동시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는 걸요."
"네 어머니가 너보단 훨씬 낫지."
"아저씨, 나한테 사과하러 날 부른 게 아니었어요?"
미카엘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할 생각이었지. 네가 미쳤냐는 말만 안 했다면."
"아저씨 평소 행동을 생각해봐요. 아저씨가 이제 와서 사과하면 누가 좋다고 받아들여요. 그래서 아저씨는 안 되는 거예요."
미카엘은 소파에서 내려와 카벨레누스 앞에 섰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저씨.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
"솔직하게 말해봐요. 아저씨, 사과 몇 번이나 해봤어요? 혹시 한 번도 안 해본 거 아니에요?"
"……해보긴 했어."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삼키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머릿속을 굴려도 누군가에게 사과해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안 해봤어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딱 봐도 사과랑은 거리가 멀게 생겼잖아요."
미카엘이 선심 쓰듯 카벨레누스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지만, 아이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잘 알려줄게요.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엄마가 그랬는걸요."
"……너 무지가 무슨 말인지나 알아?"
"음, 아마도 좋은 말이겠죠."
"……."
"그건 됐고, 얼른 이리 와 봐요. 내가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줄 테니까요."
미카엘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카벨레누스를 향해 손짓했다. 카벨레누스는 깊게 한숨을 쉬면서도 미카엘에게 맞춰 몸을 굽혔다.
"어떻게 하는 건데?"
"일단 뭘 잘못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야죠."
"그건 말 못 하는데."
"왜, 제대로 말 못 해요? 아저씨, 진짜 미안한 거 맞아요?"
말간 눈은 마치 거울 같다. 카벨레누스는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부터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것을 앗아가는 기생충 같던 아이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건 꽤 오래 전부터였다.
"……네가 왜 거슬렸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군."
"거봐, 역시 아저씨는 나한테 사과하려던 게 아니었다니까요?"
"네가 날 자극해서 그런 거였어."
"나는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 너는 날 자극한 게 맞아."
네가 내 부끄러웠던 순간이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아이의 존재가 껄끄러웠던 건, 결국 8년 전의 시간과 아이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부끄러워요?"
언제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금세 꼬리를 말고 눈치를 살피는 아이의 모습에 카벨레누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은 정말로 영락없이 아이의 것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네가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럼요?"
"내 자신이 부끄러운 거지."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아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미안했어, 정말로."
아주 오래 전에 했어야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 * * 미카엘은 연신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아닌 척해도 목에 찬 목걸이를 보며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림으로 감춰진 펜던트 안쪽에는 예전과 다르게, 슈바르한 성에서 펄럭이는 깃발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미카엘, 뭐가 그렇게 좋아?"
"삼촌!"
미카엘이 환하게 웃으며 제임스의 품에 안겼다.
"뭘 하고 있길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었어?"
"웃고 있었던 건 아닌데."
"그럼?"
"그냥 좀 본 거죠."
미카엘은 애써 덤덤한 척 고개를 추켜세웠지만, 끝까지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감추진 못했다.
"삼촌도 볼래요?"
"이건……."
아이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제임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번에 잃어버린 목걸이, 찾았어요."
"……잃어버린 걸 찾았다고?"
"정확히는 원래 것이 망가져서 비슷하게 만든 거라고 했지만요."
비슷하다고? 이게? 제임스는 순간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이 나 보였지만, 예리한 화가의 눈에는 차이가 분명히 보였다. 목걸이는 미카엘이 하고 다니는 것과 얼핏 보면 비슷해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달랐다. 속이 텅 비어 쉽게 무르는 기존의 목걸이와 다르게 단단했고, 세공도 무엇 하나 흠 잡을 것 없이 섬세하게 들어가 있었다. 딱 봐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산품이 아니라, 장인이 정성껏 만든 물건처럼 보였다. 못해도 집 한 채 값은 거뜬히 나올 것이었다. 그것만 봐도 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빤히 보였다.
"미카엘은 그 아저씨와 꽤 친해진 것 같네."
"안 친해요."
"정말?"
"내가 놀아주는 거죠. 그 아저씨는 성격이 나빠서 친구가 없을 것 같잖아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정작 미카엘의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제임스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로켓형 펜던트를 열었다. 안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알리시아 모친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저 뒤에는 그 남자의 그림이 있겠지.'
제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향해 이죽거리던 오만한 사내의 미소가 잊히지 않았다. 무엇도 반박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감정에 솔직했고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지난 8년을 운운하며 으스댄다 한들, 딱 그뿐이었다. 지켜보던 시간은 익숙함을 주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예 아무것도 없다면 모를까, 이미 쌓아 올린 관계를 잃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미카엘은 그 아저씨가 좋아?"
"음, 솔직히 싫진 않아요."
"……싫지 않다고?"
"아저씨는 뭐든 다 이루어주는 동화 속의 마법사 같거든요. 말은 못되게 해도 내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죠."
카벨레누스는 끝끝내 집은 사주지 않았지만, 사탕은 잔뜩 사줬다. 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선뜻 고개를 끄덕여줬고 귀찮아하는 티를 내면서도 막상 잡은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아저씨는 성격만 좀 좋았어도 친구가 많았을 거예요. 그렇게 잘하는 게 많으면서 친구가 없다는 건 아무래도 성격 탓이 큰 것 같거든요."
"잘하는 게 많아?"
"네. 그것도 짜증날 정도로 무지 많아요."
"……."
"그래서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한 거예요. 아저씨가 우리 엄마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제임스의 손에 있는 펜던트를 가져왔다. 펜던트는 조명 아래에서는 빛을 반사해 반짝거렸지만, 손으로 가리자 더는 빛나지 않았다.
"그럼, 미카엘은 그 아저씨가 아빠가 되어도 상관없어?"
"상관 없진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싫은 쪽에 가까운 걸요."
미카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제임스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엄마를 빼앗기는 것 같거든요."
"……."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은데, 아저씨도 그런 것 같아서 싫어요. 아저씨가 나한테서 엄마를 빼앗아갈 것만 같거든요."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해도 엄마가 될 순 없었다. 미카엘에게 있어서 알리시아는 전부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 엄마를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켜봐? 싫다면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치만, 엄마가 좋아하잖아요."
"……."
"엄마가 그랬어요. 사랑이란 건 그런 거라고. 나보다 그 사람의 행복을 더 생각하게 되는 거라고요. 그래서 내가 조금만 마음을 넓게 쓰기로 했어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엄마를 사랑하거든요. 미카엘은 가슴을 쭉 핀 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차마 미카엘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럼 나는?"
"네?"
"내가 아빠가 되는 건, 어떨 것 같은데?"
"삼촌이요? 그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미카엘이 당황해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저씨보단 내가 아빠가 되는 게 나을 거라고 했었잖아."
"그치만, 삼촌은 삼촌이잖아요. 삼촌이 어떻게 아빠가 돼요."
제임스는 절 보는 시선에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내가 진짜 삼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둘이 거기서 뭐 해?"
"엄마!"
알리시아를 발견한 미카엘이 곧장 뛰어갔다.
"미카엘, 뭐 하고 있었어?"
"오늘 아저씨가 선물을 줬어."
"선물?"
"내 목걸이! 잃어버렸던 거, 아저씨가 새로 만들어서 줬어. 이것 봐. 엄마가 그린 그림도 똑같이 들어 있어."
"진짜로 똑같이 들어 있네. 우리 미카엘은 좋겠다."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끌어안으면서 제임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옆에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은 아이의 진심과는 달랐다. 아무리 예쁘게 포장하고 둘러 말하려고 해도 한 꺼풀 벗겨놓으면 결국 그 안에는 욕심이 숨겨져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수치를 모르는 사내와 다르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이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수치도 모르는 사내의 것이었으니까. 부러웠다, 정말로. 모든 걸 가졌으면서도 기어코 알리시아까지 가져버린, 모든 게 쉽고 간단한 사내가. 그리고 그만큼 미웠다. 원망한다고 말했으면서 결국 카벨레누스에게 미소를 지어준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