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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79)화 (79/164)
  • 79화. 수컷의 몫

    2020.12.03.

    "밤이 늦었으니, 방까지 데려다줄게."

    "그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래."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향해 선뜻 손을 내밀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다 그리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만큼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저번에 마신 차는 괜찮았나? 숙면에 도움이 되는 차라고 하는데, 괜찮으면 오늘도 올리라고 말해둘게."

    "배려는 감사하지만, 그 정도는 제가 하녀에게 부탁할 수 있어요."

    "그럼 간식은 어때?"

    "간식도 마찬가지고요."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굳이 제게 뭘 해주려고 하실 필요는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대신 하실 필요는 더욱 더 없어요."

    "하지만……."

    "전 죽지 않았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걸요."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그대는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있지."

    카벨레누스도 알리시아를 따라 웃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나봐."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데요?"

    "한 번 그대를 잃어봤잖아. 나는 아직도 차갑게 식은 그대의 시신을 안았을 때의 감각이 잊히지 않아."

    "그건 제가 아니었잖아요."

    "그때는 몰랐으니까."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알리시아는 애써 모른 척했다. 사내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많이 괴로우셨어요?"

    "더 없을 만큼."

    달라진 공기는 확실히 어색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걸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색해도 최대한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사내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것 같으세요?"

    "그대는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

    "아직도 악몽을 꾼다고 했잖아."

    내가 했던 그 말들 때문에.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무너졌다.

    "……사과를 해주셨으면 해요."

    "사과라면 얼마든지-."

    "저 말고, 미카엘에게요."

    알리시아는 똑바로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미카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당신이 뱉은 말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사과해주셨으면 해요. 당신이 뱉었던 말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가 들어야 했던 말이 아니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듣기엔 아직 어리지 않나."

    "전부를 말해줄 필요는 없지만, 사과는 할 수 있잖아요."

    카벨레누스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곧았다.

    "저희 어머니는 항상 사람의 말에는 무게가 있다고 하셨죠. 말을 할 때에는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넘어갈 순 없어요. 제대로 사과해주세요.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알리시아는 양 입꼬리를 올렸다. 카벨레누스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노력해볼게."

    "……."

    "왜?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카벨레누스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뇨. 그보다는 좀 신기해서요."

    "어떤 점이?"

    "전하께선 한 번 결정내린 건 쉽게 바꾸지 않으시는 줄 알았거든요."

    "말했잖아. 노력해보고 싶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진 않아."

    카벨레누스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알리시아는 조금 더 걸음을 늦추면서 카벨레누스를 흘끔 바라봤다. 지금 모습을 보기 위해서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마저도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인데도 안심이 됐다. 슈바르한에서 온 후부터 항상 초조했던 마음이 처음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임스?"

    아무리 걸음을 늦춰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법이었다. 알리시아는 제 방문 앞에서 제임스를 발견하고 급히 손을 풀었지만, 이미 제임스의 시선은 두 사람의 손에 닿아 있었다.

    "이 밤에 어쩐 일이야."

    "미카엘이 잠들었는데, 멋대로 네 방에 들어가기 좀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다 봤음에도 제임스는 웃었다. 알리시아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급히 앞으로 나섰다.

    "설마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야? 무겁겠다. 얼른 이리줘."

    "아냐. 내가 데리고 갈게."

    "내가 안도록 하지."

    아이는 하나인데, 뻗어진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금 미카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내가 안고 갈게. 그게 제일 나아."

    "그냥 내가 들게. 무겁잖아."

    카벨레누스가 급히 손을 내밀었다. 잘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늦은 성장을 하려는 건지 미카엘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었다. 예전에는 비교적 쉽게 안았던 아이는 더는 알리시아의 팔로는 오래 안고 있지 못할 만큼 무거워져 있었다.

    "그래도 제가 할래요. 아직은 저도 충분히 안아줄 수 있는 걸요."

    알리시아는 아이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미카엘은 잠결에도 익숙한 손길에 배시시 웃었다.

    "이리와, 미카엘."

    "우웅, 웅, 엄마아……."

    잠투정을 할 때에는 영락 없는 애인데. 알리시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미카엘을 받아 안았다. 미카엘은 칭얼거리면서도 알리시아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는 제 엄마라면 귀신 같이 알아보곤 했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그럼 내일 봐."

    제임스는 서둘러 알리시아를 위해 방문을 열어줬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에 입매를 삐뚜름하게 세우며 남은 방문을 열었다.

    "내일은 로아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마침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왔거든. 그대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어."

    "로아킨이요?"

    "원래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던 건데, 알다시피 오늘은 그럴 경황이 없었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봐요."

    "그래. 내일 보지."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임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둘 사이의 공기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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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카벨레누스는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제임스가 서 있었으나,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애당초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다소 인사가 늦긴 했지만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 그쪽이 내게 감사할 게 있었나?"

    "알리시아와 미카엘을 구해주신 거 말입니다."

    억지로 분을 삼키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긴. 붉으락푸르락 물든 제임스의 얼굴을 보며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었다.

    "그건 그쪽에게 감사 받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제 가족 일이니까요."

    제임스는 유려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가족?"

    카벨레누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삐딱해졌다.

    "네. 가족이요."

    "재미있는 소리를 잘도 하는군."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손이 희게 질렸다. 짐승의 눈을 한 사내가 두려웠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친부라는 사실은 달라질 수 없었지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지난 8년간의 시간.

    "저는 미카엘이 태어나던 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그 애가 살아온 순간들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걸로 내 앞에서 유세라도 떨 셈인가?"

    "네."

    "웃기는군."

    카벨레누스가 짧게 조소했지만, 제임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똑바로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8년 전, 제가 알리시아와 다시 만났을 때의 그녀는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폭설을 뚫고 마을까지 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

    "제가 살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냈죠. 그녀가 이 성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미카엘의 안전이 확보되는 대로 곧장 떠날 겁니다."

    제임스는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뻣뻣하게 세웠다.

    "떠나? 누구 마음대로?"

    "이제 그만 그녀를 놓아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헛소리를 하는군."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카벨레누스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도, 미카엘도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냐."

    "아무리 전하께서 두 사람을 끌어안겠다고 한들, 세상은 차가울 겁니다."

    "세상의 눈 따위가 뭐 중요하다고."

    "전하께서만 괜찮을 뿐입니다. 황실의 상징이라도 이어받았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미카엘은-."

    "그딴 게 뭐 중요하다고."

    카벨레누스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잠자코 헛소리를 들어주기에는 사내는 성격이 좋지 못했다.

    "현 황제 폐하만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금안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황가의 핏줄을 의심받는데, 하물며 미카엘은 어떻겠습니까?"

    "말하는 것만 보면, 나보다 귀족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구는군.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네놈이 귀족인 줄 알겠어."

    카벨레누스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저는 상식을 말하는 겁니다."

    "상식이 아니라, 네놈의 편협한 생각이겠지."

    "편협한 생각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미카엘은 정식으로 혼인한 후에 태어난 것도, 황가의 상징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미카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카벨레누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미카엘이 원한다면 슈바르한 대공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었지만, 반대로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게 살게 둘 참이었다. 그뿐이었다. 머리색이니, 눈색이니 하는 건 하등 문제될 게 없었다. 정 필요하다면 조건에 적합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려온 황가의 비밀이라도 들춰내면 그만이었다.

    "쉽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네놈이야말로 쉽게 혀를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녀의 객이라고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당신이 뭘 참아줬다는 겁니까."

    "제 속내를 포장하느라고 급급해서 그녀와 아이 핑계를 대고 있는 네놈의 몰골."

    "……."

    "정작 속마음은 혹시라도 그녀가 내게 돌아올까봐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으면서 말이지."

    카벨레누스가 얄궂게 웃었다. 제임스는 나름대로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의 눈에는 초조해하는, 그리고 열등감에 물든 모습이 빤히 보였다.

    "저는 누구와 달리, 죽이려고 했던 아이의 앞에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진 않거든요."

    "그건 그쪽이 언급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일부러 제 방과 알리시아의 방을 떨어트려놓지도 않을 테고요."

    "머무는 객 주제에 방 한 칸 내주는 것도 감사히 여겨야지."

    "……전하께서는 죄책감도 못 느끼시는 겁니까?"

    "말했을 텐데. 그건 그쪽이 언급할 일이 아니라고."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가족 놀이를 하느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발악해도 그쪽은 제삼자야. 그녀와 내 일에 끼어들 자격 같은 건 없어."

    "……."

    "나는 과거를 부정할 생각은 없어. 네놈 말대로 나는 잘못을 했고, 지난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딱 그뿐이야."

    그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카벨레누스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흘끔 엿보였다. 구애하는 수컷은 본능적으로 연적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한다고 해서 빤히 보이는 욕심을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검술을 소양으로 배우지. 그런데 그거 알아? 정작 전장에 나가면 그딴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돼."

    "……."

    "전쟁터에 떨어지면, 고상 떨 여유 같은 건 없어지거든. 그냥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누군가를 짓밟은 대가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자신은 검 하나 들어본 적 없는, 머릿속이 꽃밭인 화가와는 달랐다. 충분히 바닥을 맛봤고 진흙탕을 굴러왔다. 고상 떠는 것도, 우아한 척 구는 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개처럼 빌빌 기더라도 알리시아의 관심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만족했다. 필사적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제 감정 하나 드러내지 못하고 예쁘게 포장하기에 급급한, 어설픈 사내는 감히 자신과 비교 선상에 놓일 수조차 없었다.

    "착각하지마. 어차피 내가 있든, 없든 간에 결국 너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

    "나는 뭐든 할 수 있지만 네놈은 그렇게는 못 하거든. 지금의 관계조차 잃을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인간이 뭘 하겠어."

    "지금 무슨 소리를-."

    "아무것도 못 한 주제에 뭐 마려운 개처럼 굴지 말고 깔끔하게 굴어."

    그녀에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니까. 동공이 도드라진 금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알리시아의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선택은 암컷의 몫이나,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 수컷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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