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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78)화 (78/164)
  • 78화. 편견과 오만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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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뿐만 아니라, 당신도 같은 아들이었잖아요."

    "아버지에게 나는 어머니의 아들일 뿐이었거든.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서워했으니, 내가 어머니의 권력을 유지케하는 존재로만 보였던 거지."

    카벨레누스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젖 한 번 물려본 적, 따뜻한 품 한 번 내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황후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멜타 공작 가의 영애로 태어나, 당연하게 황후가 된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위치를 잊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모습이 짜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완벽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했어."

    "……."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가 두려웠던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황자로 태어나 손위 형제들의 권력 다툼에서 얼떨결에 황좌를 차지하게 된 그는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멜타 공작의 사위라는 이유로 권력을 유지하긴 했지만, 그만큼 장인을 두려워했고, 장인을 꼭 빼닮은 아내를 부담스러워 했다. 공물로 바쳐진 무희, 제르페누스의 모친에게 빠져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웃긴 건,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거야.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그것도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말이야."

    "……."

    "예견된 비극이었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자신의 연인과 아들을 지키고자 했으니까."

    어머니는 유약한 아버지가 금세 굴복할 거라 여겼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만의 세력을 길러 연인을 황후로, 그리고 연인의 아들을 미래의 황제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솔직히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내 이복형을 황제로 만들고 싶었던 마음만 앞섰지, 그 마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까맣게 몰랐지."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물어도 되나요?"

    "이복형의 모친이 본보기로 희생당했지."

    "……."

    "그때부터였을 거야. 아버지가 금안에 집착하고, 실험을 시작하게 된 건."

    신전은 녹안의 황제를 용납하지 않았고, 제르페누스의 모친을 희대의 탕녀로 몰아 끝끝내 사형대에 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형을 내린 건 다름 아닌 아버지 본인이었다. 아버지는 폭군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인을 제 손으로 죽음으로 내몰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미쳐갔다. 그리고 광기는 살아남은 자들을 향했다. 카벨레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그날을 떠올려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지만,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게 있었다.

    "마물의 피를 몸속에 주입하는 실험이었어.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으로 시작해서 점점 양을 늘려 내성을 키우는 방식이었지."

    "내성을 키운다고요?"

    "그래.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그중에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하는 자들도 있었지. 그래서 만들어진 게 족쇄였어."

    "……."

    "족쇄가 완성되자마자, 아버지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무너트렸지. 힘이 폭주한 자들은 오래 살진 못했지만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카벨레누스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물 먹은 종이처럼 흐릿해진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나를 내줬어."

    "방금 뭐라고 했어요? 누구를 내줬다고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확연히 떨렸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어.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나 하나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던 셈이잖아."

    "……."

    "그날부로 나는 실험체 중 하나가 되었어. 그리고, 유일하게 마물의 피를 품고도 살아남은 자로 남았지."

    정작 어머니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죽었지만.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어머니의 가까운 자들을 하나둘 쳐내가며 어머니의 피를 말려갔다.

    "아버지 나름의 복수였던 거지."

    "복수라뇨. 그건 복수도 아니에요. 무엇보다 복수할 상대가 잘못되었잖아요."

    "그 와중에도 신전은 이기지 못했으니까. 화를 풀 만한 대상이 필요했던 거겠지."

    "……."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어차피 지난 일인 걸."

    알리시아의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타인의 이야기를 말하듯 덤덤한 사내의 얼굴에 숨이 턱턱 막혔다.

    "지난 일이라고 해서 괴롭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괴롭지 않아. 실험이 끝난 후, 감정을 거의 느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예전에 느꼈던 감정을 되짚어가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야."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라도 맹세를 요구하던 어머니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니까.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럽게 알리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는 손끝에 살짝 스친 속눈썹은 젖어 있었다.

    "노이슈타인 성에서 봤던 그대는 내 어머니를 연상시켰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는 남편의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사내를 향해 몇 번이고 검을 내리꽂고 있었다. 우아한 황후의 모습은 내던진 채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외형은 전혀 다르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던 그 모습이 꽤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가 내 어머니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카벨레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를 죽인 건, 내 어머니였어."

    "……."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건 나였지. 그게 내가 한 최초의 살인이었어."

    "……당신이 죽였다고요?"

    "내게 새겨진 족쇄라는 건 그런 거거든.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이라서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것."

    카벨레누스의 양 입꼬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시절에는 실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이 남아 있던 터라,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핏물로 뒤덮인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려도 슬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슬픈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인지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괴롭지도 않고, 오히려 이 이야기가 그대의 동정심을 사길 바랄 뿐이야."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뎌진 감정 속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알리시아뿐이었다. 어떻게서든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정하지 말라는 건 배부른 소리야. 동정이든, 연민이든 간에 결국 그건 계기에 불과한 걸."

    "……."

    "나는 그대가 날 외면할 바에는 동정해주길 원해.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길 테니까."

    "……저는 당신을 동정하고 싶지 않아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내가 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전 항상 당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다 가지고 있고, 뭐든 쉽게 해내는 그런 사람."

    알리시아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편견이었던 거죠. 당신도 결국 사람이었는데, 내 멋대로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생각해왔어요. 그걸 이제야 깨달아요."

    "……."

    "당신의 잘못을 옹호할 생각은 없어요. 여전히 당신이 했던 말은 내게 상처로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후회가 돼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았을 거라고. 알리시아는 떨어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다급히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젖어드는 옷자락을 전부 감출 순 없었다.

    "이제는 제대로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어요."

    "……."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기엔 당신도, 저도 너무 미숙했으니까요. 누군가에는 당연한 것들이 우리에겐 참 어려워서 각자의 감정을 제멋대로 부었던 것뿐이에요."

    알리시아는 결국 차오르는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이제야 카벨레누스를 잊을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이라서 그랬던 거였다. 감정만 앞섰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본 것이 없어서.

    "……8년 전의 당신은 제게 있어서 항상 버거운 상대였어요. 당신에 비해서 전 가진 것 없고 초라하게만 느껴져서 그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죠."

    "……."

    "당신이 언제 변심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며, 저보다 당신을 더 생각했죠. 이렇게 굴면 당신이 내게 질릴 거야. 또 저렇게 하면 당신이 내게 싫증을 낼지도 몰라, 그렇게요."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당신이 아니라 해도 저는 몰랐는걸요. 제가 기댈 수 있는 건 당신의 말과 행동뿐이었잖아요."

    알리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젖은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은 어땠나요? 그때의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초조했어."

    "당신도 초조했나요?"

    "처음에는 어머니를 연상시켜서, 두 번째는 죽음을 갈망하는 모습에서 나를 봐서, 그리고……."

    "괜찮아요. 말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당신을 완전히 손에 넣고 싶어서."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이 와중에도 마주친 시선이 달갑고, 그녀의 눈물 한 방울에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8년 전, 내게 안아달라 말하던 그대를 보고 있을 때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저 거슬리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라도 갖고 나면 그 감정도 금세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카벨레누스의 다물린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지금의 나였다면 그대를 안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후회하세요?"

    "늘 후회했지, 그대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날부터 쭉."

    지금이야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쉽게만 생각했다. 자신이 이끌어온 무수히 많은 전장처럼 금방 정리하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초라한 망국의 공주를 향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게 먼저였으니까.

    "저와는 다르네요. 저는 한 번도 그날을 후회해본 적이 없거든요."

    "……."

    "그날, 저는 마음껏 울었거든요. 당신을 핑계 삼아 억지로 눌러뒀던 감정을 모두 쏟아냈죠.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울어본 건요."

    "그대는 정말……."

    "참 신기하지 않나요.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알리시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차마 그녀를 따라 웃지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사내의 눈가는 어느덧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그때, 그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서 들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후회가 돼. 내게 그대는 항상 그랬어. 되돌릴 수 없는, 그래서 생각해봤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라 해도 후회하고, 또 후회할 수밖에 없었지."

    "……."

    "그대를 떠올리면 웃는 얼굴보다 우는 얼굴이 더 많이 생각나서."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손등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그대는 욕심이 항상 없었어. 뭘 주든 간에 덤덤했고 포기가 빨랐지."

    "제 것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거든요."

    "나는 그게 참 무서웠어. 그만큼 그대가 내게 쉽게 등을 보일까봐 초조했고,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바를 이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지."

    "당신이 원하는 바가 뭐였는데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아들을 향해 복수를 요구하고, 함께 죽어가던 남편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제르페누스에게 모든 것을 안겨주라고, 그리고 그가 그것에 취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을 앗아버리라고.

    "부모님이 죽고 모든 것이 없었던 일처럼 정리되었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랐어. 모든 게 허무했고, 또 무엇이 옳은 건지 알 수 없었지."

    "……."

    "그래서 어머니와의 약속이라도 지키고자 했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추모라고 생각했으니까."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던 아이의 몸은 약했다. 검을 드는 건 버거웠고 전장에서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검을 휘두르는 나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비린내가 익숙해졌고 무수히 많은 악명을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어머니와의 약속, 하나만 바라보고 그렇게 살았을 뿐이었다. 사내가 배워온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평범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긴 어렵겠지.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정의는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니까."

    "……."

    "하지만 노력하고 싶어.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대가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를 잡았다. 알리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랜 침묵 끝에 손가락을 움직여 카벨레누스 손과 깍지를 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가슴이 뛰는 것조차 어찌하진 못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밤을 보내고, 그간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많았지만 정작 서로에게 제대로 닿았다고 생각했던 건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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