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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77)화 (77/164)
  • 77화. 그저 좋았다

    2020.11.26.

    "……족쇄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거야?"

    알리시아는 시선을 돌려 카벨레누스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미카엘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카벨레누스에게선 이상한 구석이 조금도 보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건강해 보였다.

    "족쇄는 시전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그럼, 전하께서는……."

    "전하께 족쇄를 걸었던 건 선황제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하께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간접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거야?"

    "네. 유일하게 딱 한 명, 가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자는 고작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죠."

    알리시아의 반듯한 이마 위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가제프가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선황제의 죽음과 함께, 족쇄의 비밀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전하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족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하께서 황제의 족쇄에 걸렸다는 거야?"

    "불행 중 다행으로 아직 전하에게 걸린 족쇄는 선황제의 것뿐입니다."

    "……."

    "하지만, 방심할 순 없습니다. 족쇄가 만들어진 이상, 황제는 어떻게서든 전하께 새 족쇄를 채우려고 할 테니까요."

    전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요. 가제프의 얼굴 위로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어. 힘이 목적이라면 굳이 전하를 황제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흑발과 금안을 가지고 있지만, 현 황제의 눈동자는 녹안이죠. 그 사실은 항상 황제의 약점이었습니다."

    "……설마 그래서, 전하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거야?"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녹안이 문제 되지 않고, 족쇄만 완벽하다면 뒤에서 조종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까요."

    가제프는 다소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제르페누스의 애정은 카벨레누스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게 말이 돼?"

    "황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족쇄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고요."

    "……."

    "아가씨께서는 보지 못하셨지만, 저는 아직도 크리스티 공주의 죽음이 생생합니다."

    그날, 벨로아는 죽을 때까지 병사들을 상대했다. 온몸이 난도질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계속해서 공격을 반복하다가 끝끝내 자결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도, 죽음도 무엇 하나 그녀가 진심으로 원한 건 없었다. 수도 없이 비명을 내지르고 살려달라며 괴로움에 몸부림쳤음에도 벨로아의 몸은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팔다리가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와 다를 바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아가씨께 부담을 드리고자 함은 아닙니다. 다만, 한 번만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족쇄가 있다는 건 그만큼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이니까요."

    "……."

    "전하께서 족쇄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있다면-."

    "엄마! 여기 봐! 렉스는 엄청 큰 뼈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

    불쑥 끼어든 낭랑한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알리시아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고 있는 아이는 여전히 카벨레누스의 목마를 타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그래서 더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막상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놓은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여 괜히 목이 메었다. 보면 볼수록 자꾸만 저 풍경을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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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족쇄를 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대가가 필요할까.'

    알리시아는 멍하니 펼쳐진 책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의 책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시아?"

    "……."

    "알리시아."

    불쑥 눈앞에서 흔들어지는 커다란 물체에 알리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앞엔 서류를 든 카벨레누스가 서 있었다.

    "……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잠을 못 자서 그런 건 아니고? 어제도 밤을 새운 모양인데."

    "아무래도 읽을 책이 많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라서요."

    실은 책보다는 다른 생각 때문이었지만. 알리시아는 가제프의 부탁을 떠올리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는데, 간절한 시선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분명 무리하는 모습이 보이면 아무것도 공유해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할 거고."

    "……."

    "이 부분은 양보 못 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니까."

    알리시아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어 보였지만,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전하께서도 자주 밤을 새우시잖아요."

    알리시아의 양 눈썹이 위를 향했다. 그녀는 카벨레누스의 집무실 불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나니까. 마물의 피 덕분인지,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어도 문제없으니까."

    "전하."

    "무리하는 건, 순간에만 효과적이야. 오래, 그리고 제대로 싸우려면 제대로 쉬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나아."

    알리시아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반박하고 싶지만,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알아들었다면 됐어. 사과할 필요까진 없어."

    필요 이상으로 엄하게 굴 필요는 없었는데, 축 처진 여자의 어깨가 신경 쓰였다. 카벨레누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보고서를 알리시아에게 건넸다.

    "슈바르한 성 인근을 전부 수색한 결과,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어. 이곳에 마물은 없어."

    "정말인가요?"

    "어쩌면, 미카엘의 힘이 사라지면서 그들도 포기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좋겠지만……."

    보고서를 확인한 후에도 알리시아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카벨레누스는 그녀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도로 가져가면서도 알리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한가보군."

    "저는 직접 마물을 만났으니까요. 그들이 얼마나 미카엘을 간절하게 원했는지 알고 있고, 그들이 쉽게 포기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쉽게 불안을 놓을 수가 없네요."

    "그럼, 불안하지 않게 노력해봐야겠군. 믿을 만한 결과를 보여주면 좀 나아질 거 아냐."

    막연한 희망을 말했다면 와닿지 않았을 텐데. 사내의 말은 묘하게 안심이 됐다. 카벨레누스는 단 한 번도 기적을 운운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제 손으로 성취하고 이뤄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책상에 다 올려놓지 못해 바닥에까지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수색 외에 더 필요한 건 없나?"

    "그게……."

    알리시아가 살짝 입술을 달싹거렸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어 조심스러웠다.

    "아. 다른 서류를 보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읽어도 좋아."

    "네?"

    "범위가 포괄적이라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을 수도 있긴 해도 한 번 정도 읽어둬도 나쁘진 않을 거야."

    알리시아의 시선을 오해한 카벨레누스가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가려져 있던 남은 서류 더미들이 있었다.

    "……."

    "왜?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

    "아뇨, 아무것도."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기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

    "……."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말해."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내 이야기?"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돌이켜보면, 저는 전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서요."

    "……."

    "함께 노력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좀 더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알리시아는 더 말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뺨을 누른 손바닥의 열기가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가제프가 무슨 말을 한 거지?"

    "……."

    "그래서, 날 동정하려는 건가?"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가볍게 까닥거렸다.

    "동정이라뇨! 그런 거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발끈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당신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어요."

    "마물의 피가 흐르는 몸이 정상일 리 없지."

    "마물의 피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알리시아의 두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었나보군."

    카벨레누스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야."

    "제가 당신과 같은 처지였다 해도 그렇게 말했을 건가요?"

    "……."

    "저는 지금 당신을 동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걱정하는 거라고요."

    차분하게 말할 참이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격앙됐다. 알리시아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감추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요. 당신,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 거예요?"

    "말한다고 해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괜한 고민만-."

    "그건 배려가 아니에요. 저는 그런 배려는 원하지 않아요."

    "……."

    "8년 전, 당신은 그랬죠. 내가 괜한 걱정을 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그런 당신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쉽게 입을 떼지 못했죠."

    알리시아의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돌이켜보면, 우린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멋대로 서로를 판단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저는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과오를 반복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잖아요."

    알리시아는 두 손을 모았지만, 그 정도로는 몸이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죽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때론 두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알리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소원의 힘이 있다 한들, 오랫동안 전장에서 뼈 굵은 사내를 이길 수 없었다. 미카엘을 위협하는 적들을 좀 더 완벽하게 상대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닌, 카벨레누스였다. 만약의 상황이라면, 자신이 아니라 카벨레누스가 살아남는 편이 나았다.

    "먼저 말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가 먼저 할까요?"

    "……."

    "제겐 특별한 힘이 있었어요.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죠."

    "……."

    "그런데 미카엘이 태어난 후부터 제게 다시 힘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그동안 상황에 따라 힘을 사용해오면서 위기에서 벗어났어요."

    힘을 쓰면서 깨달았던 사실은 힘을 쓸 때마다 소진되는 생명력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가볍게 뱉은 소원이 오히려 더 많은 생명력을 앗아갈 때도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깨우쳐왔다.

    "저는 타인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어요."

    "……."

    "어쩌면, 제 힘이 전하에게 걸린 족쇄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달랠 때 그러하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시답잖은 소원에 많은 생명력을 빼앗긴 건, 소원을 애매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소원의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라서 결과적으로 바라는 것 이상으로 더 큰 것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그 경험을 대가로 소원의 대가를 줄이는 방법을 배웠다. 소원은 정확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대가를 줄일 수 있었다. 아직 낯설게만 느껴지는 족쇄가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할지 모르니, 족쇄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마법을 푸는 건, 처음이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하지 마."

    "그게 무슨 소리세요. 하지 말라뇨."

    "그렇게 쉽고 간단한 힘이 있을 리 없어."

    카벨레누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힘이 어떤 건지 모르시잖아요."

    "맞아. 몰라. 하지만 뻔하잖아. 그 힘이 원하는 걸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거였다면 그대는 가장 먼저 미카엘을 위협하는 자들부터 처리했을 테니까."

    "……."

    "그대가 비장한 얼굴을 할 이유도, 며칠 간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말이야."

    다 안다는 듯한 시선에 온몸이 꿰뚫린 것만 같았다. 알리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해줄 수 있어. 하지만 그게 그대를 몰아붙이는 거라면 안 돼."

    "……."

    "내가 끝까지 버티고자 하는 건, 결국 그대가 있기 때문이니까."

    어깨를 감싸 쥔 손이 유난히도 단단하고 뜨거웠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8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속삭여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저 눈만큼은 한결 같이 자신을 좇고 있었으니까.

    "신기할 정도로 금세 빠져들었어. 실험에 참여한 후, 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대는 항상 날 흔들었어."

    "……."

    "이런 적 없었는데, 그대의 존재가 언제나 날 초조케 해.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온 신경이 그대에게 가고, 끊임없이 그대를 탐하고 싶고, 그대의 전부를 원하게 돼."

    "전하……."

    "그대에게 해가 될 만한 여지가 보이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어. 나는 그래."

    카벨레누스가 힘없이 알리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작은 여자가 뭐라고 이 앞에만 서면 이토록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지, 언제나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좋았다. 우연이라도 한 번 더 눈을 마주치고 싶어서 시선을 쫓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괜한 말을 걸게 될 만큼.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쥐여주고 싶다가도, 그녀가 가진 것이 자신만이었으면 할 때가 있을 만큼. 그리고, 동정이라도 좋으니 그저 그녀의 시선이 오롯이 제게만 머물기를 바라게 될 만큼.

    "내게 족쇄 채운 건 내 아버지였어. 아버지는 이복형에게 금안을 넘겨주기 위해 마물들을 이용해 실험을 시작하다가 마물의 힘에 매료됐거든."

    "……."

    "마물의 힘을 이용해 제국 건립 설화를 재연하고, 끊임없이 간섭하는 신전을 누를 셈이었지만, 실험쥐로 써먹기엔 자신도, 자신의 아들도 위험에 빠트리게 하고 싶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선택된 거야."

    황가의 피를 이었으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견제하던 어머니의 핏줄인 내가.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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