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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76)화 (76/164)
  • 76화. 어느 평범한

    2020.11.23.

    "아저씨! 아저씨!"

    "미카엘, 뛰지 마. 넘어져."

    카벨레누스는 녹슨 기계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들었다. 복도를 신나게 내달리는 미카엘과 그 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오늘 개 보여주기로 한 거 맞죠?"

    달려온 미카엘이 대뜸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개?"

    "저번에 보여준다고 하고 그냥 넘어갔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아저씨가 다른 소리 못 하게 엄마랑 같이 왔어요."

    "보면 울 것 같은데."

    "안 울거든요."

    미카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작은 손이 남긴 구겨진 흔적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도 모르겠는데."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설마 이번에도 말만 하고 넘어가려는 거 아니죠?"

    "미카엘, 그만해. 전하께서 곤란해하시잖아."

    "그치만, 저 아저씨가 자꾸 말만 하고 약속을 안 지키는 걸.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우는소리를 냈다. 알리시아는 훌쩍거리는 조그마한 머리통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를 만난 후로 아이는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제야 비로소 미카엘이 또래 아이들처럼 구는 것 같아 쉽게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어른인 척 굴면서 눈치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떼쓰는 편이 나았으니까.

    "개가 보고 싶으면 보여주지."

    알리시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카벨레누스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품으로 파고 들면서도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번에는 거짓말 아니죠?"

    "대신, 이리와봐."

    "왜요?"

    "잔말 말고. 얼른."

    미카엘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 쪽으로 다가갔다. 카벨레누스는 다리를 굽혀 미카엘과 비슷하게 시선을 맞췄다.

    "아빠라고 한 번 해봐."

    "……."

    "……."

    "……아저씨, 어디 아파요?"

    침묵 속, 미카엘이 혼자 이맛살을 구겼다.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일단 한 번 불러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나는 싫어요."

    "싫어도 딱 한 번만 불러봐."

    "이런 식으로 나와도 소용없어요. 나는 아저씨를 우리 아빠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니까요?"

    미카엘은 대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친부가 아니라고 했던 건 카벨레누스가 먼저였다. 그런 사람을 향해 다정히 아빠 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불러줄 건데?"

    "말했잖아요. 우리 아빠가 될 자격이 있는지 나한테 확인 받으라고요."

    "하아?"

    "싫으면 말고요. 나는 아쉬울 거 하나도 없거든요."

    미카엘은 요란스럽게 콧방귀를 끼며 보란 듯 고개를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카벨레누스는 조막만한 머리통을 보면서 손끝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알리시아는 저렇지 않은데, 왜 아이는 저토록 뻔뻔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확인이 되는 건데?"

    "시험 받을 거예요?"

    "네가 뭘 요구하는지 들어나보고."

    카벨레누스는 아이의 빛나는 눈을 무시하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아이의 장단을 맞추는 게 성가시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겪어본 미카엘은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본인이 원하는 걸 이뤄야 뜻을 굽힐 것이었다.

    "일단 개를 보여줘요."

    "고작 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 소원을 세 개 들어줘요."

    미카엘이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면서 으스댔다.

    "왜 세 개지?"

    "아저씨는 동화도 안 읽어봤어요? 원래 소원은 세 개 비는 거라고요."

    "……."

    "왜요? 싫어요?"

    "일단은 시도는 해보지."

    이런다고 해서 뭘 알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카벨레누스는 미묘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 * *

    "엄마, 저기 개 보여? 완전, 으아앗!"

    "네 어머니가 힘드니까, 적당히 해."

    알리시아의 품에서 미카엘을 들어올린 카벨레누스가 쯧 혀를 찼다. 미카엘은 허공에 덜렁 들린 채 발만 동동 구르다가 높아진 시야만큼 잘 보이는 개의 모습에 금세 배실배실 웃었다.

    "아저씨, 이왕 안은 김에 목마도 태워주면 안 돼요?"

    "목마?"

    "그러면 개가 더 잘 보일 것 같단 말이에요."

    "요구하는 것도 많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미카엘에게 어깨를 내줬다. 미카엘은 넓어진 시야에 소리 내며 좋아하다가 끝없이 올라가는 높이에 급하게 카벨레누스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손 떼."

    당겨지는 두피에 카벨레누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카엘은 손에서 힘을 풀 줄 몰랐다.

    "손, 손 떼면 떨어지잖아요!"

    "네가 태워달라고 해놓고 무서워하면 어떡해."

    "아저씨가 너무 키가 커서 그, 으아악! 움직이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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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거면 내려와."

    "아니, 아니! 지금 내려가면 겁쟁이가 되잖아요!"

    "이미 겁쟁이처럼 보이거든."

    카벨레누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이런 식으로 머리채를 잡혀본 건 처음이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소리 지를 바엔 그냥 내려와."

    "조금만 더 참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안 괜찮아. 당장 손 안 떼면 그대로 내려놓을 거야."

    참다못한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미카엘은 더욱 손에 힘을 주며 좀 더 카벨레누스에게 밀착했다.

    "손을 어떻게 떼요! 그러면 떨어지잖아요!"

    "절대 안 떨어져. 떨어지게 안 한다고."

    "내가 아저씨를 어떻게 믿어요!"

    "……."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카엘은 제 허리를 잡으려는 카벨레누스에 급하게 목소리를 높혔다.

    "취소! 취소! 손 놓을게요! 놓으면 되는 거죠?"

    "……."

    "나, 손 놓는다니까요?"

    "손이나 놓고 말해."

    카벨레누스는 짜증을 내면서도 미카엘을 내려놓진 않았다. 미카엘은 손을 놓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제 다리를 잡고 있는 카벨레누스의 손이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다는 걸 깨닫고서야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있잖아요. 아저씨."

    "왜."

    "쟤 진짜 개 맞아요?"

    "이제야 개가 눈에 들어오나보지?"

    카벨레누스는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개 보려고 목마를 탄 거니까, 개를 보는 거죠."

    "하여간 말은 잘 하는군."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쟤 진짜 개 맞아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 몰래 눈치껏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개가 아니면 뭔데."

    "무슨 개가 곰 같이 생겼잖아요. 저렇게 큰 개가 세상에 어딨어요."

    "여깄잖아."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요."

    "원래 슈바르한의 개들은 몸집이 커. 털 때문에 거대해 보이기도 하고."

    혹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진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 땅에 사는 생명들은 모두 살기 위해 진화하고 강해져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큰 걸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쟤는 진짜 책에서 본 곰같이 생겼어요."

    "제 형제들과 함께, 곰을 잡은 전적이 있긴 하지."

    "진짜요?"

    미카엘이 입을 쩍 벌렸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거대한 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럼 쟤 이름은 뭐예요?"

    "렉스."

    "어? 방금 봤어요? 귀 쫑긋거리는 거! 쟤 자기 이름을 아나봐요!"

    "당연히 알아듣지."

    카벨레누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 다가온 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카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뱉었다. 처음에는 무섭게만 느껴졌는데, 카벨레누스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풍성한 털을 직접 만져보면 기분 좋을 것만 같았다.

    "나도 만져봐도 돼요?"

    "아니. 안 돼."

    "왜요?"

    "네가 너무 작아서 렉스가 사냥감으로 착각할 수 있어."

    "그렇게 안 작거든요!"

    "그런 소리 하려거든 대충 이 정도는 크고선 와."

    카벨레누스는 제 가슴 높이의 허공에서 성의없이 손을 휘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조만간 커줄 테니까! 나는 꼭 아저씨보다 훨씬, 아주 훨씬 커질 거예요!"

    "크고 나서 말해."

    "그러는 아저씨는 태어났을 때부터 컸어요?"

    "태어날 때부터 컸는데?"

    "거짓말."

    "나는 한 번도 또래보다 작아본 적이 없거든. 항상 또래 중에서 늘 제일 컸지."

    "아저씨, 진짜 짜증나는 거 알아요?"

    카벨레누스는 툴툴거리면서도 미카엘을 내려놓지 않았고, 그건 미카엘도 마찬가지였다. 가제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슬쩍 알리시아의 옆에 섰다.

    "걱정하신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시죠?"

    "응, 그러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려."

    알리시아는 옅게 웃었다. 본인들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투닥거리는 부자의 모습은 어느 평범한 일상의 모습처럼 자연스러웠다.

    "문제없이 잘 지내실 겁니다. 지금보다 시간이 흐르면 더 좋아질 테고요."

    "……클라우드 경은 내가 계속 남아 있었으면 하는 거지?"

    "저는 어쩔 수 없는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가제프는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면서 웃었지만, 그 모습이 나쁘게만 보이진 않았다. 알리시아는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아가씨께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내게 묻고 싶은 것?"

    "도련님께선 아무런 힘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힘이 있었는데 사라졌다고요."

    "맞아. 이제 미카엘은 평범한 아이야."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어떻게 힘이 사라진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왜 궁금한 건데?"

    "혹시, 그게 전하를 구하는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전하를 구하는 해답?"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예전에 말씀드렸던 족쇄, 기억하십니까?"

    "응. 기억해."

    "그 족쇄는 기본적으로 마물의 힘에 반응합니다."

    "……."

    "다시 말해, 마물의 힘을 없앨 수만 있다면 족쇄를 풀 수도 있는 겁니다."

    가제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카벨레누스를 지독하게 괴롭혀오던 족쇄의 해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미안해. 나도 미카엘의 힘이 왜 사라졌는지는 몰라."

    "그렇습니까?"

    "다만, 의심 가는 게 있긴 해."

    "정말이십니까?"

    가제프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최근에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교단에 대해서 찾아봤어."

    "네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에 대해 알아보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이상한 점이요?"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교단과 관련된 책들을 모두 읽었지만, 솔직히 낯선 이야기가 더 많았다. 오랫동안 제국령에서 살긴 했지만, 교단의 이야기는 관심이 없으면 모를 만한 이야기로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프라임 교단은 제국 공통어를 쓰지 않더라고."

    "네. 맞습니다. 교단은 신의 의지를 잇는다는 의미로 신이 쓴다는 고대어를 쓰거든요."

    "고대어?"

    "말 그대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오래된 언어입니다만, 교단에서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하죠."

    가제프가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솔직히 보여주기 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독자적인 언어는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긴 했다.

    "……그럼, 내가 그 언어를 알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아가씨가요?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분명 남부 출신이시고 제대로 된 교육을……."

    가제프가 말을 하다가 아차 싶어 급하게 입을 막았다.

    "괜찮아. 나는 그런 걸로 상처입지 않아. 다만, 찜찜한 건 내가 교단에서만 가르치는 고대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잖아."

    "……괜찮으시다면, 누구에게 고대어를 배우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 어머니."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항상 잊을 수 없었던 존재가 이런 곳에서 부각될 줄은 몰랐다.

    "아가씨의 모친이요?"

    가제프는 헛숨을 뱉었다. 알리시아가 모친의 존재를 언급하는 순간, 잊고 지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소원을 이뤄주는 힘. 과거 알리시아에 대해 조사했을 때, 분명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소원을 이뤄주는 힘은 프라임 교단에서 언급되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알리시아는 평범했다. 적어도 과거에 가제프가 봐왔던 알리시아는 그랬다. 대단한 힘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하기엔 그녀는 너무 작고 가녀려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있는 거라면?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잊고 지냈던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저는 예전에 아가씨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기 힘든 이야기를 알게 되었죠."

    "……."

    "아가씨의 모계 혈통은 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불리고, 그들에겐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다고 하더군요."

    "……."

    "당시에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소원을 이루는 힘도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가씨께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면……."

    전하께 걸린 족쇄를 풀어주실 순 없나요? 가제프의 목소리는 어느덧 울음으로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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