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앞으로 네가 지낼 곳
2020.11.05.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나봐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
"……."
알리시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가 포기하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이제 와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니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때였다.
"엄마!"
저 멀리서 달려온 미카엘이 그대로 알리시아의 치맛단에 매달렸다.
"미카엘? 갑자기 왜 그래."
"엄마. 나, 나…… 일어났는데, 엄마가 없어서……."
미카엘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훌쩍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괜찮아. 미카엘. 엄마, 여깄잖아."
"흐윽, 흡, 엄, 엄마가, 날 두고, 간 줄 알았어……."
"그럴 리 없잖아. 엄마가 미카엘을 두고 어딜 가."
"정말?"
"그럼. 그러니까, 얼른 엄마한테 얼굴 보여줄래? 엄마는 우리 미카엘 얼굴이 보고 싶거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자, 미카엘의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든 아이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는 살짝 부어 있었다.
"우리 미카엘. 다 큰 줄만 알았는데, 아직 울보네."
"그, 치만…… 엄마가……!"
미카엘은 치미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도로 알리시아의 치마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미카엘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걱정하지 말래도. 엄마, 여깄잖아. 그렇게 꽉 안 잡아도 사라지지 않아."
"꿈, 꿈에서 엄마가 나왔어……."
"꿈?"
"사, 사람들이, 엄마한테, 막, 나쁜 소리를 하는데에…… 흐으윽!"
"진정해, 미카엘. 그건 꿈일 뿐이야."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뺨을 감싸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하도 울어 눈가가 발갛게 짓무른 채, 놀라 헐떡이는 아이의 모습은 가여울 지경이었다.
"엄마, 똑바로 봐."
"……."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엄마는 절대 미카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하자, 미카엘의 훌쩍거림이 그나마 나아졌다. 알리시아는 능숙한 손길로 미카엘의 심호흡을 유도하며,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할게. 미카엘은 항상 엄마가 지켜줄 거야."
"그럼, 엄마는? 엄마는 누가 지키는데?"
미카엘은 초조하게 손아귀에 힘을 줬다. 악몽이라는 걸 알면서도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이 휑하게 뚫린 해골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영영 엄마와 자신을 떼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만 울어. 네가 어머니가 곤란해하잖아."
무심하게 툭 던져진 말에 미카엘의 고개가 돌아갔다. 장대처럼 훌쩍 큰 사내가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무서웠다. 처음에는 그냥 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표정 하나 없이 사람을 베는 모습을 보고 나니, 새삼스레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카벨레누스가 왜 검이 무기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고 있었다. 결국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알리시아의 뒤로 모습을 감췄다.
"네 어머니를 지키고 싶다면서. 그러면, 이딴 일로 울면 안 되는……."
절 흘겨보는 알리시아에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눈빛이 백 마디 말보다 날카롭게 느껴져지고 있었다.
"……게이트가 준비되는 대로 떠날 거야. 가져가야 하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해줘."
"중요한 짐은 없어요. 다만……."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바라봤다. 슈바르한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신경 쓰는 일이 있나?"
"그게……."
말해도 되는 걸까. 알리시아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무작정 모든 걸 털어놓기에는 역시 조심스러웠다. 아직은 카벨레누스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짧게나마 퉁퉁 부운 눈을 한 미카엘을 스쳤다. 의구심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8년 전의 그날, 알리시아의 실종과 함께 마물들이 슈바르한에서 모습을 감춘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제르페누스가 괜히 그 점에 집착하고, 알리시아가 미카엘의 존재를 감추려고 애쓰는 게 아닐 테니까. 저 작은 아이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으로선 무엇도 선뜻 물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의심은 들지만 확신하고 싶지 않았다. 때론 들추지 않는 게 나은 진실도 있는 법이었다. 모를 수 있다면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자라는 편이 아이에겐 좋았다. 피비린내 나는 삶보다는 평탄한 삶이 훨씬 나은 법이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더 보지 못하고 다가오는 인기척을 핑계 삼아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어떻게 대화에 껴야 하나 고심하던 가제프가 서 있었다.
"게이트 준비는 다 끝났나?"
"네.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슬슬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해야겠군. 서둘러 움직이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카벨레누스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알리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함께 떠나기로 약속했음에도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가야 해."
"네. 그래야겠죠."
"……아저씨, 어디가요?"
알리시아의 뒤로 숨었던 미카엘이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카벨레누스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떠난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더 먼저 들었다.
"너도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요?"
"슈바르한."
"슈바르한?"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미카엘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거기가 어딘데요?"
카벨레누스는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네가 지낼 곳."
* * * 덜컹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마차의 흔들림이 멈췄다. 가제프는 슬쩍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문제없이 도착했군요. 슈바르한입니다."
"벌써요?"
알리시아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은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제프는 그런 미카엘이 귀여운지 싱긋 웃었다.
"이 마차에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마법이요?"
"도련님께선 마법에 관심 있으신가요?"
"도련님이 아니라, 미카엘이에요. 미카엘 누스."
미카엘이 가슴을 쭉 핀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미카엘 님."
"미카엘 님이 아니라, 미카엘이요."
"아, 그렇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미카엘."
가제프가 사과하자, 미카엘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구과 다르게 친절한 사내는 퍽 마음에 들었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까, 사과 받아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도착한 거 맞아요?"
"물론입니다."
가제프는 대답과 함께, 슬쩍 창문을 열었다. 미카엘은 불어오는 찬바람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진짜 마법이에요?"
"네. 마법입니다. 그리고, 슈바르한에는 이것보다 신기한 마법들이 많답니다."
"진짜요?"
"물론이죠. 분명 미카엘 마음에 들 겁니다. 성에 들어가면, 제가 하나씩 보여드리죠."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못 믿으시겠다면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가제프는 넉살 좋게 웃으며 미카엘의 장단에 맞췄다. 요령 없는 상관과 달리, 유능한 보좌관은 누굴 공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엄마! 엄마! 저거 봐! 여기 진짜 눈 많아! 우리 나가서 눈사람 만들까?"
"미카엘, 창문에 너무 가까이 붙지 마. 그러다가 떨어……."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말리려다가 불쑥 내밀어진 망토에 헛숨을 삼켰다.
"입어둬. 나가면 추울 거야."
"괜찮아요."
"바로 성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전까지는 추울 거야. 입어둬. 추위 많이 탔잖아."
"……."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알리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고작 외투인데, 차마 건네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
알리시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제임스가 먼저 카벨레누스의 외투를 건네받아 미카엘을 덮어줬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알리시아의 어깨에 걸쳐줬다.
"이러지 않아도 돼. 너도 춥잖아."
"나는 추위를 덜 타서 괜찮아. 걸치고 있어.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지금, 뭐 하는 거지?"
"아이가 추워하는 것 같아서요."
제임스가 태연하게 싱긋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어깨에 올려진 다른 사내의 흔적에 이를 꽉 깨물었다. 저 화가 나부랭이는 데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당연하게 알리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꼴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쪽은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되지 않나?"
성에 발을 딛기만 하면, 저딴 싸구려 외투는 던져버리고 최고의 것들만 안겨줘야지. 카벨레누스는 다짐을 곱씹으며 제임스를 노려봤다.
"전하께서 알리시아와 미카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떠납니다."
제임스는 눈에 바짝 힘을 줬다. 떠나라고 말하는 알리시아를 겨우 설득해서 이곳까지 쫓아왔다. 어설픈 각오로 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시라도 카벨레누스가 허튼 짓을 한다면, 어떻게서든 알리시아와 미카엘을 지킬 셈이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판단하지?"
"적어도 전하보다는 있을 겁니다."
"웃기는군. 너 따위-."
"그만하세요."
알리시아는 두 사람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미카엘, 너도 그만해."
제임스는 재빨리 알리시아에게 사과하면서 창문에 매달린 미카엘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한껏 올라간 아이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삼촌은 이렇게 많은 눈 본 적 있어요?"
"슈바르한에 머물면 항상 보게 되지."
"항상이요?"
"여긴 늘 겨울이니까. 무척 춥고 삭막하지. 볼 게 그렇게 많진 않은 땅이야."
제임스는 일부러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유치하다는 걸 알지만, 이왕이면 미카엘이 슈바르한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왜요? 나는 눈 좋은데.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또 뭐더라……, 아! 빙수도 먹어야죠!"
미카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잔뜩 신이 난 아이는 벌써 습격당한 충격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실컷 할 수 있을 테니까, 난리 그만 피우고 얼른 내리지 그래?"
"내가 언제 난리를 피웠어요!"
카벨레누스의 퉁명스러운 지적에 미카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여기서 뛰어다니는 건 너뿐이잖아."
"그, 그건……!"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다. 미카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조그마한 창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넓어졌다.
"뛸 거면 나가서 뛰어."
"아저씨가 재촉 안 해도 내릴 거거든요!"
미카엘은 혀를 날름 내밀고는 마차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맞지 않은 외투가 발에 걸려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졌지만, 눈이 잔뜩 쌓여 있어 넘어졌음에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엄마! 이것 봐! 눈이 진짜 많아! 엄마도 얼른 와!"
재미있는 건 엄마랑 해야 하지 훨씬 재밌다. 미카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리시아를 향해 두 팔을 휘휘 저었다.
"우리도 내리지."
카벨레누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마차에서 내렸고,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남은 건, 알리시아 뿐이었다.
"잡아."
"잡아줄까?"
알리시아가 문 앞에 서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사내들의 손이 내밀어졌다.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기대 어린 시선에 얼굴이 따가웠다.
"그냥 내가 안고 내려오는 게 좋겠군."
카벨레누스가 먼저 마차에 올랐다. 머뭇거리다가 선수를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알리시아는 가까워진 거리에 급하게 치마를 쥐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
"이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고는 카벨레누스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미카엘을 생각해 차츰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은 카벨레누스와 닿는 게 부담스러웠다. 시선을 맞추고, 살갗이 닿을 때마다 잊으려 애썼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감정을 갈무리할 때까지 잠시 여유를 두고 싶었다. 미카엘을 생각하면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어야 했다.
"엄마, 여기야! 여기!"
미카엘이 팔짝팔짝 뛰며 알리시아를 불렀다. 알리시아는 미카엘 너머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며 숨을 삼켰다. 결국, 돌아왔다.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혹한의 땅으로 결국엔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곳은 여전히 춥네.'
알리시아는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정리했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슈바르한은 변함없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저 어딘가에선 그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아무리 둘러봐도 시야에 들어오는 건 새하얀 눈뿐이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든지 저 눈밭을 해치고 빛나는 금안을 가진 마물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