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70)화 (70/164)
  • 70화. 특별한 마법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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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입니다. 아가씨. 저번에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었죠?"

    "클라우드 경."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가제프가 슬쩍 웃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오래간만에 본 얼굴이 반가웠지만 그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앞섰다.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모르코 부인 말이야. 혹시……."

    알리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정황상 그들이 모르코 부인을 살려두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컸다. 죽은 줄만 알았던 벨로아가 살아 있으니 모르코 부인도 그랬으면 해서.

    "이모님께서는 생전에 꽃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아……."

    "질레를 혼자서도 한 병 거뜬하게 해치우시는 분이셨으니까요. 찾아가보실 거면, 좋은 질레를 골라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역시, 돌아가신 거구나."

    알리시아의 잇새로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펜잔 산에 유골을 뿌렸습니다. 이모님께선 항상 자신이 죽고나면 슈바르한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 말씀하셨거든요. 죽고나서도 슈바르한에 간섭하실 거라면서요."

    "……."

    "참 이모님다운 생각 아니십니까."

    가볍게 웃어보인 가제프가 알리시아를 흘끔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알리시아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가제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가씨. 소리 내어 우셔도 됩니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문 채 고개를 저었다. 모르코 부인이 죽은 건,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에겐 그녀를 애도할 자격조차 없었다.

    "아가씨, 잘못이 아닙니다."

    "나를 지키려다가 그렇게 되신 거였어."

    알리시아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이미 차오른 눈물에 바닥이 젖어들고 있었다.

    "이모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아가씨가 무사하셔서 다행일 거라 말씀하셨을 겁니다."

    "……."

    "무엇보다 이모님을 죽게 한 사람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잠깐이지만, 가제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클라우드 경……."

    "시비를 가릴 때, 때린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지, 맞은 사람을 향해 잘못했다고 하진 않습니다."

    "……클라우드 경은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솔직히 이모님의 일로 아예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이모님은 제게 있어서 어머니나 다름 없었던 분이셨으니까요."

    "……."

    "하지만, 그건 이모님께서 바라시던 바가 아니었을 겁니다."

    "……."

    "이모님께서는 죽임당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모님께서는 원하시는대로 기사로서 주인을 지키며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 했다고요."

    알리시아의 고개가 들렸다. 가제프의 얼굴에는 원망 대신, 미소만이 보였다.

    "이모님께서는 그렇게 기억되길 원하실 겁니다."

    "모르코 부인이 정말로 그걸 원한다고 생각해?"

    "물론,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기에 이것도 결국 제가 그럴싸하게 말을 붙인 것에 불과하지만요. 하지만 제가 봐온 이모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신념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분이셨죠."

    "……."

    "아가씨께서 본 이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가씨께서 스스로를 탓하길 바라실 분 같으셨나요?"

    가제프가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알리시아는 차마 손수건을 받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분은 아니셨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좋은 분이셨지. 강하고, 다정하시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으셨지만요."

    가제프가 피식 웃었다. 알리시아는 어색하게나마 가제프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모님은 아가씨를 참 많이 좋아하셨다는 겁니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무사한 걸 이모님께서 보셨다면 정말로 기뻐하셨을 테죠."

    가제프가 다시금 알리시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맞아. 그러셨을 것 같아."

    알리시아는 이번에는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가제프는 눈물을 닦아내는 알리시아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도련님의 눈매가 전하를 닮으셨더군요."

    "……닮았어?"

    "네. 지금이야 젖살 때문에 티가 나지 않지만, 나이가 차서 이목구비가 또렷해지면 점점 더 닮아갈 것 같습니다. 몸집 또래보다 작긴 해도 골격도 좋아서 충분히 전하만큼 크실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 특유의 둥글둥글한 선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면 미카엘의 얼굴에는 카벨레누스가 엿보였다.

    "전하께선 모르셨는데."

    "전하께서는 사람을 주의 깊게 보시는 편이 아니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하께는 확신이 있으셨으니까요."

    "검은 머리와 금색 눈동자?"

    "네. 검은 머리와 금색 눈동자. 현 황실 혈통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가제프는 슬쩍 카벨레누스가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상처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알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카벨레누스에게 알리시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8년 전, 저는 솔직히 도련님을 해치려했던 전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모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알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전하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럴 수 있다고요."

    가제프가 멋쩍게 웃었다. 자신 역시, 한때는 카벨레누스를 보며 그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바라본 카벨레누스는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대단한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그 대단한 사내가 만들어지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실 저는 아가씨께서 계속 전하의 곁에 있어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 내가 전하의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건, 결국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함일 뿐인 걸."

    "그래도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아가씨께서 있으신 것만으로도 전하께서는 살아가실 수 있을 테니까요."

    "나 때문에 전하가 산다는 게 무슨 말이지?"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가제프는 잠시 고민했다. 섣부르게 말을 꺼냈다간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먼저 자신의 일을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침묵하면 카벨레누스는 끝까지 알리시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벨레누스가 슈바르한에 온 후부터 쭉 그를 보필해왔지만, 정작 카벨레누스의 과거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지난 8년간이었다.

    "8년 전, 아가씨께서 그렇게 사라지시고 전하께선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가씨께서 죽으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는 그저……."

    "아가씨께선 도련님을 지키고자 하셨던 거겠죠. 아가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도 모르셨을 테고요."

    "내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크리스티 공주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마법사가 아닌, 네크로맨서더군요. 죽은 자를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가제프는 벨로아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는 수식어는커녕, 정상 범주에 들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얼굴은 괴기했다. 예전의 고왔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죽은 자를 부리는 힘 같은 건 들어본 적 없어."

    "실제로는 금기시되는 마법입니다. 희귀한 재능이죠. 황제 측에서 공주를 살려둔 것도 그 재능 때문이었고요."

    시즈나를 포함한 제르페누스의 첩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의 계획이 일부 드러났다. 제르페누스는 원래 벨로아를 철저하게 이용하다 버릴 목적이었다. 서클 마법사는 귀한 편이었지만,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황실에도 충분히 있었으니까. 계획을 바꿔가면서 벨로아를 살려둔 건 그녀가 가진 네크로맨서로서의 재능 때문이었다. 제르페누스에게는 쓸모가 있다싶으면 철저하게 이용해먹는 습관이 있었다. 카벨레누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티 공주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특별한 마법이 새겨져 있더군요."

    "특별한 마법이라고?"

    "저희들은 족쇄라고 부르는 마법이죠."

    "그건 마법의 이름이라고 하기엔……."

    "정식으로 등록된 마법은 아닙니다. 성법, 주술 등 다양한 주박들로 이루어 있어 사실 순수한 마법으로도 볼 수 없고요."

    가제프는 턱을 괸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제르페누스가 족쇄를 부활시키기 위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족쇄를 변형시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의 것과는 달라진 족쇄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걸 누가 만든 거지? 황제인가?"

    "족쇄는 원래 선황제께서 만든 겁니다."

    "선황제라고 하면……."

    "전하의 부친이십니다."

    "……."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단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족쇄라는 단어부터가 불쾌하게 들렸다. 본래 족쇄는 통제를 위한 도구였다.

    "선황제께서는 전하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족쇄를 만드셨습니다."

    가제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어째서 그런 일을……."

    "원래 황위는 전하의 것이었거든요."

    "전하께서 황제가 되셔야 했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제국에서는 단 한 명의 배우자만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런데, 현 황제는……."

    "네. 현 황제는 사생아 출신입니다. 타국의 무희 소생에 심지어 눈동자조차 금안이 아닌, 녹안을 가지고 있죠.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제르페누스는 모든 것이 결함투성이었고,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누구도 그가 황위를 이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황제는 제르페누스를 황제로 만들었다.

    "……왜 그랬던 거야?"

    "그 이후의 일은 전하께 직접 물어봐주십시오."

    "……."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전하를 옹호하시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마음이 없진 않고요."

    가제프는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알리시아는 차마 그를 따라 웃지 못하고 애꿎은 손수건만 꽉 쥐었다.

    "과거가 있다고 해서 잘못이 용서되진 않아."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할 순 있겠죠."

    "……."

    "아가씨. 전하께선 원래 아가씨를 따라 죽으실 생각이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리시아가 헛숨을 뱉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방금 가제프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아가씨를 따라 목숨을 끊지 않았던 건 복수를 위해서였을 뿐, 그게 끝났다면 분명 전하께선 목숨을 끊으셨을 겁니다."

    "……."

    "그리고,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어도 그러셨을 겁니다. 전하께는 삶의 목표가 없었거든요. 그저 오래 전의 약속을 위해 지금껏 버티셨을 뿐입니다."

    가제프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치료를 마친 카벨레누스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알리시아가 어설프게 웃으며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가제프는 의문만 잔뜩 안긴 채 떠나버렸지만 차마 카벨레누스에게 물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했다고 하기엔 눈물이 고여 있잖아."

    "그게 모르코 부인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운 건가?"

    카벨레누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움찔거리는 알리시아에 미간을 찡그렸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놀란 얼굴을 보니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알리시아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했다. 카벨레누스는 한참 알리시아의 눈치만 살피다가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상처는 다 치료하신 거예요?"

    "금방 나을 거라고 했어. 애초부터 큰 상처도 아니었는걸."

    카벨레누스가 턱짓으로 붕대를 감아둔 허벅지를 가리켰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애쓰는 사내의 머릿속에는 이게 몇년만의 상처냐고 기겁하던 군의관의 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역시 걱정해주는 거지?"

    "……다신, 그러지 말아요."

    뭘 잘했다고 웃는 건지. 알리시아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지만 정작 카벨레누스의 미소는 진해질 뿐이었다. 걱정한다는 것도 결국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가 걱정해줘서 기쁜데."

    "……."

    알리시아의 냉정한 시선에 카벨레누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원망 어린 눈은 언제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슈바르한으로 가는 게이트가 준비될 거야. 그걸 알려주려고 왔어."

    "게이트가 뭐죠?"

    "슈바르한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동용 마법도구야."

    "그럼, 군대가 올 수 있었던 것도 게이트 덕분인가요?"

    "맞아. 혹시 몰라서 게이트 입구를 미리 설치해두었거든. 예비로 만들어둔 거라서 그리 오래가진 않지만 한 번 정도는 이동할 수 있어."

    카벨레누스는 떠오르지도 않는 말들을 억지로 끄집어내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썼다. 뭔가를 설명해주는 것도, 쓸데없는 말로 대화가 늘어지는 것도 질색인데, 이렇게라도 알리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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