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9)화 (69/164)
  • 69화. 내게 명령만 해

    2020.10.29.

    "……그게 문제였나?"

    "……."

    "그대가 날 거절한 이유."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미카엘은 평범한 아이에요. 계속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저,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두려웠다. 혹시나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 아이를 해치는 칼이 될까봐.

    "나는 한 번 내린 결정은 쉽게 번복하지 않아."

    "……."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걸까. 알리시아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잠이 든 미카엘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카벨레누스가 미카엘을 외면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예전처럼 혼자서 아이를 지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목이 멨다. 자신도 모르는 새,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했잖아. 그대가 원하는대로 하겠다고."

    "아……."

    "나는 그대와 아이, 모두를 지키기로 했어. 그뿐이야."

    카벨레누스가 투박한 손으로 알리시아의 뺨을 만졌다. 혹여나 상처라도 입힐까, 조심스러운 손길은 매순간 변함없어 알리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믿을 수 없어요. 이제와서 그런 말 믿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믿지 마. 계속 의심해.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용당하고 망가지는 건 익숙해."

    "……."

    알리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돌이켜보면, 카벨레누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 채, 그저 어렴풋이 그의 삶을 추측해본 것이 전부였다. 문득 깨달은 사실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나는 괜찮아."

    "……."

    "그렇게라도 그대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 그대는 내게 명령만 해."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부 그대 손에 쥐여줄 테니까. 카벨레누스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사내의 두 눈은 어떤 순간에서도 알리시아를 향해 있었다. 알리시아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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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임스. 몸은 괜찮아?"

    "마음이 좀 다쳤을 뿐이지, 몸은 괜찮아."

    제임스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소리라면 더욱 듣고 싶지 않아. 애당초 내가 망설이지 않으면 되는 거였잖아."

    제임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습격 당했을 적에 망설이지 않고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네가 죄책감 가질 일이 아니야. 그저 내 능력이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는 거지."

    알리시아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제임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능력의 허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힘만 믿고 방심한 자신의 탓이 더 컸다.

    "그래도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망설이지 말아줘."

    "……어떻게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어."

    알리시아의 능력을 처음으로 봤을 땐 그저 기적이라고만 생각했다. 말로만 신의 뜻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농락하는 신관들보다 그녀가 훨씬 낫다고 그렇게만 믿었다.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주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신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능력은 힘이 아닌, 독이었다.

    "약속해줘."

    "……."

    "부탁할게."

    "……미카엘은 괜찮아?"

    제임스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알리시아는 뻔한 수를 알면서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놀라서 약을 먹고 재웠지만 몸에는 이상 없대.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행이네."

    "네가 떨어질 때, 미카엘을 보호해준 덕분이야."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으니까."

    제임스의 시선이 붕대로 감아둔 손목에 닿았다. 손목을 다쳐 당분간 그림을 그리지 못할 테지만, 욱신거리는 통증보다 무기력함에 더 괴로웠다. 검 대신, 붓을 든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당연하게 알리시아를 위해 검을 뽑아드는 카벨레누스와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충분히 고마워. 사실 그동안 도움 받은 것만 해도 갚으려면 한참 남았는걸."

    "고맙다면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해준 게 뭐 있다고 그래."

    "네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해준 게 없긴. 게다가 이번에는 나 때문에 손까지 다쳤잖아."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지."

    제임스의 눈매가 잔뜩 찌푸려졌다. 정작 해주고 싶었던 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돌려줄 수 있는 만큼만 받았고, 그 이상은 절대 받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선이 있었다.

    "제임스, 나는……."

    "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은혜를 갚을 거라는 둥 그런 소리는 더더욱 할 필요 없고. 지금도, 앞으로도 쭉."

    제임스가 다소 빠른 어조로 말했다. 현재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부쩍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카벨레누스였다. 슈바르한의 주인, 황가의 핏줄, 압도적인 힘, 많은 것들을 가진 사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켰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미카엘이 있었다. 알리시아를 쏙 빼닮은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뜯어보면 묘하게 카벨레누스의 모습이 남아 있는 아이. 제임스는 알리시아가 종종 잠든 미카엘의 얼굴을 보면서 카벨레누스를 그리워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을 잃어버려서 곤란해졌지만 일단 움직이자.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반대편 산기슭로 넘어가면 괜찮을 거야. 그쪽은 아는 사람만 다니-."

    "미안해, 제임스. 더는 날 도와주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도와줄 필요가 없다니."

    제임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와 미카엘은 수도로 가지 않을 거야."

    알리시아는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로 짧게 숨을 뱉었다.

    "나 혼자 수도로 돌아가라고? 너와 미카엘을 두고?"

    "널 위험에 빠트릴 순 없어."

    "나는 널 두고 못 가."

    제임스가 눈을 부릅 떴다.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알리시아를 두고 갈 순 없었다.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계속 함께 있을 순 없어."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래?"

    "걱정해서 그런 거야. 이번에는 손목을 삐는 것 정도로 끝났지만, 다음 번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면, 너는? 위험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알리시아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위험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미카엘을 지켜주겠대."

    "……."

    "그래서 그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알리시아."

    제임스가 성급하게 알리시아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녀의 눈가는 운 것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사람, 믿을 수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도움을 받겠다는 거야?"

    "솔직히 많이 조심스러워. 아직은 그를 완전히 믿을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다면 거절해. 그러면 되잖아."

    제임스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미카엘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미카엘을 지키려면 그 사람의 힘이 필요해. 그들과 대적할 만한 힘을 가진 건, 그 사람뿐이니까."

    "그들이 누군데?"

    "제국 황실. 그리고, 프라임 신전."

    알리시아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힘주어 깍지 꼈다. 모든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슈바르한에게는 마물들이 있었고, 카벨레누스의 진심도 완전히 믿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카벨레누스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오히려 화를 자처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방법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황실? 신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들이 왜 미카엘을 노린단 말이야?"

    "미카엘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제 미카엘은 평범하잖아. 아무런 힘이 없어. 오히려 노린다면, 미카엘이 아니라……."

    제임스는 말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건 쉽게 뱉어선 안 되는 말이었다.

    "미카엘에게 힘이 없다고 한들, 그들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리 없잖아."

    "그래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겠다는 거야? 왜, 네가 왜 슈바르한으로 돌아갈 수 없었는지 벌써 잊었어?"

    "잊지 않았어."

    아직도 눈을 감으면 자신을 내려다보던 금색 눈동자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짙은 감정을 품은 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미카엘이 평범하게 살길 원했잖아."

    "평생 이용당하는 도구로서의 삶보단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편이 낫잖아."

    "알리시아."

    "많은 생각을 했어. 모두가 무사한 최고의 상황부터, 모든 게 엉망이 되버릴 최악의 상황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부 떠올리고 곱씹은 후에 내린 결론이야. 번복하지 않아."

    알리시아는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카엘을 지키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감출 수 있다면 계속 감추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해졌어. 한 번 존재가 드러난 이상, 황실과 신전은 계속해서 미카엘을 노릴 거야."

    혹시라도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계속해서 경계해왔다. 미카엘의 나이조차 짐승의 모습으로 지냈던 시간을 제외하고 셌고, 일부러 한 마을에 정착하기보다는 여러 곳을 떠돌며 지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결국 그들은 아이를 찾아냈다. 그토록 집요한 자들이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미카엘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안 돼. 그렇게 된다면, 미카엘은 망가질 거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야."

    알리시아의 손끝이 잔뜩 힘이 들어가다 못해 새하얗게 질렸다. 필요에 의한, 도구 같은 삶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카엘에게 힘이 남아 있다면 도구로서 이용당할 뿐이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면 쓸모없다며 죽임을 당하거나, 혹시 힘을 되찾았을 때를 대비해 비참하게 사육당할 뿐이었다. 어느 쪽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거 알아? 난 슈바르한에 처음 왔을 때 너무 놀랐어. 흑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성은 내게 너무도 크게 느껴졌거든. 그렇다면 황궁은 또 어떻겠어?"

    "두렵구나."

    "응, 두려워. 너무 무서워. 그들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거대한 세력이고, 그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작기만 한 걸."

    카벨레누스가 다스리는 슈바르한이 아무리 대단해도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고, 황실과 신전은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력들이었다. 카벨레누스의 보호를 받는다해도 그들에게 대적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미카엘을 지키고 싶어.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알리시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미카엘은 힘을 잃었지만 반대로 자신은 사라졌던 힘을 되찾았다.

    "내가 언제까지 미카엘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 올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하잖아."

    "그런 말 하지마! 최악의 상황 같은 건 오지 않아, 절대!"

    제임스가 거칠게 외쳤지만, 알리시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알리시아."

    "그저 무수히 많은 변수들에 대비하고, 또 대비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애쓸 뿐이지."

    알리시아의 시선이 차갑게 빛났다. 잿빛 눈동자는 잘 갈린 칼날의 빛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니, 나는 슈바르한으로 갈 수밖에 없어. 내가 없는 세상에서 미카엘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줄 수 있는 건, 결국 그 사람뿐이니까."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한 번 방향을 정한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람은 쉽게 달라지지 않아."

    "알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할 수 없어."

    감정만 앞세우기엔 이미 한 번 미카엘을 잃을 뻔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 사람이 미카엘을 사랑하게 만들 거야. 설령,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가 미카엘을 지켜줄 수 있게끔."

    "그 변수에 미카엘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건 없어?"

    "……."

    "그 사람이 미카엘을 사랑하지 않으면? 미카엘을 지키기 위해 네가 희생한 걸 알면? 그런 순간이 와도 그 사람이 미카엘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단 이유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사내였다. 만약 자신이 미카엘을 지키다가 죽게 된다면, 카벨레누스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그를 믿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도 의미 없으면?"

    "그때는 마물의 손이라도 빌려야겠지. 적어도 마물들은 미카엘을 해치지 않을 테니까."

    "알리시아, 그건-."

    "사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끝도 없지. 모든 상황에 좋게 흐를지, 나쁘게 흐를지는 그때가 되어야 아는 거잖아."

    "……."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거야."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서. 알리시아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기껍게만 느껴졌다. 제겐 아직 불태울 수 있는 생명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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