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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68)화 (68/164)

68화. 나는 그거면 돼

2020.10.26.

"미안해. 늦게 와서."

단숨에 스켈레톤을 베어가며 성큼성큼 걸어온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앞에 섰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몸에 난 자잘한 생채기며, 찢어진 드레스는 충분히 눈에 거슬렸다. 카벨레누스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바드득 이를 갈며 벨로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알리시아는 그런 카벨레누스를 보며 미카엘을 품에 꽉 안았다.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거짓말."

알리시아는 울음을 참아내며 두 팔에 힘을 줬다. 여기서는 카벨레누스의 등만 보였기에 상처를 확인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한 번 눈에 들어온 상처는 잊히지 않았다.

"……스스로 찌르신 거죠?"

"……."

"왜 그랬어요. 도대체 왜……."

"……그대로 잠들면 놓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짓을 해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자해를 하다니 정말로 미쳤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사고 방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보고 싶었다면서."

"……."

알리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

검을 쥔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무하게 잃어버렸던 시간은 지난 8년이면 족했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그녀를 망가트린 제르페누스를 향해 분노하고, 심지어 흐르는 시간에게조차 부정하던 시절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수도 없이 고민했어. 나는 그대가 필요한데 그대는 아닌 것 같아서. 내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만 같아서."

"……."

"그런데, 여지가 남아 있는 거잖아."

"……."

"조금이라도 내가 당신한테 남아 있는 거잖아."

나는 그거면 돼. 카벨레누스의 검이 힘껏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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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의 족쇄는 어때? 잘 작동하나?"

"다행히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작동만 해선 안 돼. 그 이상을 해내야지."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현재의 성능만 본다면 선황제께서 만드신 족쇄, 그 이상입니다."

"그 답변은 마음에 드는걸. 더 말해봐."

제르페누스가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펠시온은 연구원에게 받은 일지를 제르페누스에게 건넸다.

"선황제 폐하의 족쇄는 사실상 복종이 아닌, 제약을 걸어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죠. 폐하께서 대공 전하를 완벽하게 휘두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럼, 이번 족쇄는 아니라는 건가?"

"저희 측에서 강화한 족쇄는 제대로 채우기만 한다면, 단순히 제약을 거는 게 아니라 의지를 조종하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의지?"

"폐하께서 바라시던 바를 드디어 얻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펠시온이 제르페누스에게 예를 갖추며 묵례를 했다. 하지만 정작 제르페누스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일지를 넘길 뿐이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로 벌써부터 축배를 들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지금은 내 어여쁜 개가 목줄을 뜯고 도망친 상황이지 않나."

제르페누스의 눈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준비한 계획이 완성되기 위해선 카벨레누스가 필요했다. 그가 없다면, 족쇄를 아무리 많이 채운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새로운 개를 구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특히, 그 아이는 황가의 핏줄에, 능력까지 있으니 가치관이 확립되기 전에 잘 구슬려 가르치면-."

"그 아이는 금안이 아니잖나."

"……."

"이용할 가치는 있지만, 카벨레누스를 대신할 순 없어. 흑발과 금안은 대대로 황가의 상징이었는걸. 실제 선대 황제들도 전부 흑발에 금안이었잖아."

나만 제외하곤 말이지. 제르페누스가 느긋한 손길로 제 눈가를 매만졌다. 펠시온은 불안한 시선으로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금안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황가의 피가 아니라고 계속 의심받아온 탓일까, 제르페누스는 유독 금안에 집착했다.

"난 잃어버린 개도, 새로운 개도 전부 원해."

"……."

"새로운 개를 들였다고 잃어버린 개를 포기하기엔 그동안 들인 공이 너무 아깝잖나. 무슨 수를 쓰든 간에 되찾아서 내 발밑에 무릎 꿇리고 내게 복종하게 만들어야지."

제르페누스는 피식 웃으며 일지를 책상에 대충 던져놨다. 새로운 족쇄가 완성되었으니, 남은 건 목줄을 채울 개를 되찾아오는 일뿐이었다. * * *

"이게 누구야. 슈바르한의 늑대 아니야?"

벨로아가 비아냥거리며 달려드는 카벨레누스를 피했다.

"살아 있었나보군."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켈레톤과 지팡이, 그것만으로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다. 죽은 자를 부릴 수 있다면 가짜 시체를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8년 전의 사건에는 저 여자가, 그리고 제르페누스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신도 어서 봐. 네 지독한 형님께서 날 어떤 꼴로 살려뒀는지."

"……."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안 된다면서, 얼굴을 찢기고 생살이 찢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목에 검을 겨누고 가짜 시체를 만들라고 협박당한 내 심정을?"

벨로아는 웃었지만 지팡이를 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제르페누스의 말을 수행하던 하녀보다 끔찍했던 건, 통신용 거울로 모든 상황을 구경하던 제르페누스의 시선이었다. 그 순간에도 사내는 웃고 있었다.

"그자가 내 인생을 다 망쳤어!"

"……."

"나는 공주였다고! 저딴 것과는 태생부터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공주!"

벨로아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거칠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땅이 거세게 울렸다. 카벨레누스는 갈라지는 땅을 가볍게 피하며 곧장 도약해서 벨로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검과 지팡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어디 한 번 말해봐! 왜, 나만 불행해야 해? 누구보다 특별하던 내가 왜 이딴 모습이 되어야 하냐고!"

"……."

"나는 황후가 되었어야 하는 몸이었어!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우아하게 앉아 있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당신은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날 보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들지 않냐고!"

벨로아는 벌겋게 물든 눈으로 씩씩거리며 카벨레누스를 노려봤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차라리 살기를 품고 정확하게 급소를 노리며 파고드는 검이 감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 더러운 살인마! 개자식!"

벨로아는 눈을 치켜뜬 채 거칠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난사해도 카벨레누스에겐 어떤 공격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상대는 오랫동안 전장을 맴돈 실력자였다. 기술도, 경험도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벨로아보다 익숙하고, 또 능숙했다. 벨로아의 공격을 그대로 흘러보내면서 역으로 빈틈을 파고 드는 건 카벨레누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카벨레누스의 칼날 끝이 벨로아를 향해 겨눠졌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대로 죽이는 건 아까웠다. 타의든 간에 제르페누스의 밑에 있었던 여자였다. 조사해보면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은 꼴을 볼지, 못 볼지는 두고 봐야지."

벨로아가 웃었다. 그녀의 지팡이 끝은 카벨레누스가 아닌,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팡이의 빛이 위로 솟구셨다. 퍼엉-! 펑! 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에서 불꽃이 터졌다.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요즘 제국은 인력이 남아도나보군."

"당신 형이 부대 하나로는 당신을 상대할 수 없다면서 병사들을 넉넉하게 챙겨줬거든. 그러니, 짐덩이들을 끌어안고 어디 한 번 잘 도망쳐봐."

벨로아는 얄궂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오만한 사내가 엉덩이에 불 붙은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할 것만 같았다.

"도망? 그딴 걸 왜 하지?"

"뭐?"

"그런 건 불리할 때나 하는 거잖나."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허풍도 작작 떨어.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많은 병사들을 혼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벨로아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는 내가 혼자라고 한 적 없는데."

"그래, 혼자는 아니지. 당신한테는 짐덩이들만 가득하잖아?"

"아직도 눈치 못 챈 모양이군."

"그게 무슨 소리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건 황제뿐만이 아니야.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 * *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가제프가 투구를 벗으며 카벨레누스에게 예를 갖췄다. 카벨레누스는 가제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잠든 미카엘을 안고 있는 알리시아가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

"……."

검을 휘두르는 건 간단한 일인데, 왜 저 시선을 보는 건 그렇지 않은 걸까. 카벨레누스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몸은 괜찮은 건가? 군의관도 와 있으니 상처를 한 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알리시아의 차가운 시선에 카벨레누스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말고, 전하의 상처부터 치료하세요."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른 피가 얼룩덜룩 묻은 바지만 봐도 사내가 얼마나 심하게 자해를 했는지 알 수 있어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카벨레누스의 상처에 쏠렸다.

"설마 걱정해준 건가?"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쓰며 미카엘을 더욱 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괜찮아. 괜히 힘들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도 그대가 보고 싶었어."

"……."

"다 들었어. 그대가 내게 했던 말. 그러니까, 모른 척하지 마."

카벨레누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며 알리시아에게 다가섰다.

"전하께서 착각하신 거겠죠.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알리시아는 차마 카벨레누스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도 해야만 했다. 못된 말을 하고 억지로 거리를 둬야만 흔들리는 마음을 막을 수 있었다.

"아직도 내가 못 미더운 건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아직도 꿈을 꾼다고."

"하지만 날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다면서."

카벨레누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원망해. 그래도 돼. 그대의 분이 풀릴 때까지 내게 욕을 하고 화도 내. 설령 내게 칼을 겨눈다 해도 나는 그대가 주는 거라면 뭐든 기꺼이 받을게."

"……."

"그대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

"……."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그냥 옆에만 있게 해줘.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알리시아의 두 손이 조개처럼 꽉 다물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알리시아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울지 마. 울리려고 한 거 아니야."

"안 울어요. 제가 왜 울어요."

모진 말을 꺼내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하게 굴어야 하는데. 자꾸만 감정이 치밀어서 목이 메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왜 그렇게 미련하세요. 그 정도면 이제 그만하고 끝내도 되는 거잖아요. 제가 뭐라고 그렇게 상처까지 내면서……."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계속 닿고 싶어도 바라만봐야 했던 그녀가 이제야 좀 가깝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설령 그대가 날 이용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

"그대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날 이용해. 그대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검을 들고, 기꺼이 방패가 되어줄게."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알리시아는 익숙한 온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상황을 다 떠나서 맞닿은 체온이 기껍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봤잖아. 내가 얼마나 강한지. 분명 그대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응?"

"……."

"만약 이것조차 부담스럽다면, 미카엘의 친부로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줘도 좋아. 그동안 못했던 의무를 한다고 생각해."

카벨레누스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우스꽝스러운 꼴이라는 거 알지만 이런저런 변명까지 하면서라도 잡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8년 전의 그 시선을 다시 마주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내줄 수도 있었다.

"……전하께서 해주실 수 있는 의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데요?"

알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의 경험으로 알았다. 자신의 힘은 절대적이지 않았고 허점도 많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지만, 카벨레누스가 없었더라면 미카엘을 빼앗겼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지금껏 미카엘을 위해서 수도 없이 버렸던 자존심이었다. 이제와서 한 번 더 버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대가 원하는 만큼."

카벨레누스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알리시아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금 카벨레누스와 시선을 맞췄다.

"미카엘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면요?"

"……."

"그래도 내 아이를 지켜줄 건가요?"

알리시아가 처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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