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7)화 (67/164)
  • 67화. 또 다른 재회

    2020.10.22.

    "참 신기하죠. 따로 말해준 것도 아닌데 미카엘은 당신을 참 좋아해요. 내 말이라면 거역해본 적 없던 아이가 처음으로 내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당신을 찾아갔죠."

    "……."

    "당신 눈에는 그런 아이가 괴물처럼 보였나요?"

    알리시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뗐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지만 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참았다. 한 번쯤은 제대로 시선을 맞추고 따지고 싶었다.

    "카벨레누스, 당신이 틀렸어요. 내 아이는 괴물이 아니었어요. 그냥 아이였죠. 그뿐이었어요."

    "미안해, 나는-."

    "미안하다는 말로는 안 돼요. 그걸로 못 끝내요. 만약, 제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결국 내 아이를 죽였을 거잖아요."

    울음을 참아내는 알리시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카벨레누스는 입을 떼려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걸 알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거봐요, 지금도 부정하시지 못하잖아요."

    "……."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세요. 8년 전 그 아이는 죽은 거예요."

    "이제와서 부모의 권리를 운운하진 않을게. 내게 그럴 자격 없다는 거 알아. 그저, 지키게만 해줘."

    카벨레누스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누가 누굴 지켜요?"

    "아이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

    처음에는 알리시아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년 전의 아이가 살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제르페누스가, 그리고 헤르만이 노리는 건 알리시아가 아니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미카엘이었다.

    "제 아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해요."

    "그대가 아이를 지키고 싶다는 거 이해해.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현실적이요?"

    "아이를 노리고 있는 자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대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어."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앙상한 손목에 닿았다. 그녀는 여전히 지금껏 어떻게 버텨왔을까 싶을 정도로 가냘퍼 보였다. 저 작은 몸에 많은 짐을 지게 할 순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몇 배 더 짊어지는 편이 나았다.

    "아뇨. 지킬 수 있어요.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알리-."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흔들리는 시야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드디어 약효가 도나보네요."

    "약효?"

    "전하의 음식에 수면제를 탔어요."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의 텅 빈 그릇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카벨레누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를 잡아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군."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은 눈에 힘을 준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벨레누스가 헛웃음을 뱉으며 슬쩍 테이블에 있는 포크를 집어 감췄다.

    "죄송해요.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최선? 뭐가 최선이라는 거지?"

    "그냥, 전부 다요."

    알리시아는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카벨레누스가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이 모나지는 않았으면 했다.

    "우린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이었잖아요."

    그런 마음과 별개로 입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지만.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계속 모진 말을 해서 미안해요."

    "……."

    "실은 계속 보고 싶었어요."

    "……."

    "당신을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많이. 사실은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입안을 맴돌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마지막을 핑계로 슬쩍 꺼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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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안은 채, 서둘러 오두막 뒤쪽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미리 떠날 준비를 한 제임스가 말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 끝냈어?"

    "혹시나 했는데, 미카엘의 펜던트가 그 사람한테 있었어."

    "그 말은……."

    "미카엘이 누군지 알고 있어."

    "바로 떠나야겠군. 미카엘은 내가 안고 갈 테니 바로 출발하자."

    제임스가 재빨리 미카엘을 품에 안고 말에 올라탔고, 알리시아도 남은 말에 서둘러 올라탔다.

    "전하의 말은 일부러 풀어놨어. 말이 없으면, 정신 차려도 바로 쫓아오지 못할 거야."

    "고마워, 신경 써줘서."

    "감사 인사는 여기서 벗어난 후에 들을게. 완전히 추격에서 벗어나려면 반나절 안으로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해."

    "알았……."

    알리시아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니, 방금 저쪽에서 빛이 보였던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지금 시간에 무슨 빛이야.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렇겠지?"

    "시간 없어. 얼른 출발해야 해."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대로 굳었다.

    "……착각이 아니야. 뭔가 오고 있어."

    "알리시아."

    "하나가 아니야."

    "알리시아!"

    제임스가 고삐를 당겨 알리시아의 앞을 막아섰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서 뭐하는 거야."

    "그들일지도 몰라."

    "그들?"

    "미카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고 했어. 그들이 찾아왔을지도 몰라."

    알리시아의 시선이 잠든 미카엘에게 향했다. 미카엘에겐 더 이상 특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저들이 그 사실을 순순히 반아들여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더 빨리 도망쳐야지."

    "그럼, 그는?"

    "전하께서는 충분히 강해. 얼마든지-."

    "잠들었잖아. 무방비한 상태야. 습격이 맞다면, 저 상태로 두고 갈 순 없어."

    알리시아가 다시 고삐를 잡아끌었지만, 그녀의 말은 얼마 가지 못해 제임스에게 막혔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건데?"

    "그 후?"

    "새로 시작할 기회를 네 손으로 버리지 마."

    "……."

    "한 번 사용했던 수를 다시 쓸 순 없어. 그리고, 한 번 당했던 만큼 경계도 더욱 치밀해지겠지. 어쩌면, 강제로 널 슈바르한까지 끌고 갈지도 몰라."

    제임스의 목소리가 경고하듯 낮게 울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미카엘을 최우선으로 해야지. 미카엘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면서."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알리시아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적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면서 카벨레누스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알리시아,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더 빨리 해야-."

    히이잉-! 순간, 알리시아가 타고 있던 말이 거칠게 날뛰었다. 알리시아는 고삐를 단단히 잡으며 말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다가 말의 목을 관통한 상처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알리시아!"

    제임스가 날뛰는 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알리시아는 거칠게 날뛰는 말 위에서 겨우 균형을 잡다가 이내 그대로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떨어진 충격에 몸이 욱신거렸지만 풀숲에 떨어져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며 눈에 힘을 줬다. 거리가 있었음에도 적의 공격은 정확하게 말의 목을 꿰뚫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부탁 좀 할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망설일 시간 없어."

    알리시아가 제임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제임스는 차마 그녀의 손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순간, 머리 위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

    "우리 구면이지?"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흉터로 가득한 얼굴도, 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도, 무엇 하나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한 눈에 알아봤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기억은 8년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하기만 했다.

    "……크리스티 공주."

    "그 이름 참 오래간만에 듣네."

    벨로아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당신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거지."

    그쪽 덕분에. 벨로아는 몸을 감춘 망토를 펼쳐보이며 보란듯 드러난 살을 내보였다. 주렁주렁 레이스 달린 드레스 대신, 팔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경갑옷을 입은 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흉터투성이였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라기보다는 억지로 기워놓은 누더기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무슨 일? 그게 네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 생각해?"

    벨로아가 으르렁거리다가 이내 목덜미를 꽉 쥐었다. 목 부근이 욱신거렸음에도 그보다는 저 말간 얼굴이 더 신경쓰였다. 자신의 인생은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정작 원흉인 노예 계집은 멀쩡해 보인다는 사실에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서 자신처럼 만들어주고 싶어 벌써부터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너 같은 노예 계집은 그때 찍소리도 못 하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

    "뭐, 나도 바쁜 사람이니 다른 말은 길게 안 하겠어. 그 아이나 내놔."

    제르페누스의 수작만 아니라면 앞뒤 안 가리고 죽여버렸을 텐데. 벨로아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애써 분을 삼켰다. 정해진 명령을 어기면 온몸이 썩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으니, 말 잘 듣는 개처럼 고분고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내 아이, 손가락 하나 못 대."

    "하여간 나약한 것들이 입만 살아가지곤."

    벨로아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와 함께 땅 속에서 뼈만 남은 스켈레톤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시아는 이를 꽉 문 채, 다시금 제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임스, 얼른."

    제임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달려든 스켈레톤에 그대로 알리시아의 몸이 뒤로 나뒹굴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수집해야 하는 목록 중 하나거든.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잘 챙겨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벨로아는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알리시아,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는 미카엘을……!"

    몸이 닿아야 하는데. 알리시아는 이를 악 물며 스켈레톤을 밀어냈다. 오래된 유골로 만들어진 스켈레톤은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멋대로 엉겨붙으며 앞을 나아가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죽이지 못 하는 건 아쉽지만, 필사적인 얼굴을 보니 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네."

    "닥쳐."

    "그 화난 얼굴도 꽤 마음에 들고."

    벨로아가 느긋하게 입술을 쓸어내리며 눈매를 휘었다. 지금 막 나쁜 장난이 생각났다.

    "아, 그렇지. 노예 계집.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예를 들면, 아이 뿐만 아니라, 너도 잡아오라고 한 이유 같은 거 말이야."

    "그딴 것에도 이유가 있나?"

    "그 인간 더럽게도 악질적이거든. 나쁜 일에는 지독할 정도로 완벽하게 특화되어 있어. 네 아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널 통해 새로운 아이를 더 얻을 궁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미쳤구나."

    "맞아. 그 작자는 미쳤지. 그리고, 그런 작자 밑에 있던 나도 덕분에 미쳐버렸고 말이야."

    벨로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알리시아를 방해하던 스켈레톤이 방향을 바꿔 제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일이지 않아? 노예 출신인 네년조차 멀쩡하게 잘 살아 있는데. 공주인, 그것도 촉망 받던 마법사였던 나는 살아도 죽은 듯, 실험쥐 신세로 전략했다는 게?"

    "지금 뭐 하는 거야!"

    "뭐하긴, 개 같은 명령을 수행하는 김에 살짝 즐겨보자는 거지."

    벨로아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 번 더 거칠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스켈레톤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제임스는 한 손으로는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미카엘을 잡으며 최대한 버티려했지만,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면서 밀려드는 스켈레톤까지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임스! 미카엘!"

    난동을 이기지 못한 제임스가 미카엘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사, 삼촌!"

    어느새 잠에서 깨어 제임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미카엘이 다급하게 제임스를 불렀다. 나무에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제임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눈가에 눈물을 단 채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미카엘!"

    알리시아는 어쩔 줄 몰라하는 미카엘에 이를 악 물었다. 어떤 순간이든 지켜야 했다. 제 아이를 시커먼한 손아귀에 떨어지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알리시아는 거칠게 스켈레톤을 밀어내며 팔을 뻗었다. 그 반동으로 스켈레톤의 부러진 뼛조각이 살갗을 스치며 상처를 만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얼굴뿐이었다. 그것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버둥거리던 알리시아의 손끝이 떨렸다.

    "엄마!"

    그제야 엄마를 발견한 미카엘이 울먹거리며 알리시아를 따라 손을 뻗었다.

    "아."

    살짝이지만 닿았다. 알리시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손을 뻗어 작은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곧장 눈에 힘을 준 채, 미카엘을 똑바로 바라봤다.

    "미카엘. 엄마 봐. 엄마 보고 소원을 빌어."

    "어, 엄마……."

    "어서 엄마한테 지켜달라고 말해! 얼른!"

    "엄, 엄마, 지, 지켜……."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미카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때였다. 강한 바람이 훅 불었다. 그와 함께 억지로 몸을 잡아당기던 힘이 약해졌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 금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지금 누굴 건드리는 거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알리시아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흉흉한 시선을 한 채, 검을 뽑아든 사내는 굶주린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두렵다 말하는 슈바르한의 늑대, 그 자체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안을 바싹 마르게 하고 오금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의 눈에 들어온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도대체 왜……."

    알리시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벨레누스의 허벅지에는 붉은 얼룩이 선명하게 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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