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6)화 (66/164)
  • 66화. 당신이 한 말

    2020.10.19.

    "멧돼지 어떻게 잡은 거예요?"

    "……."

    "그 검으로 잡은 거예요?"

    "……."

    "아저씨?"

    미카엘이 슬쩍 카벨레누스 쪽으로 상체를 기댔다. 평소 같았다면 달라붙지 말라고 질색했을 사내가 오늘따라 잠잠하기만 했다.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슬쩍 검지로 카벨레누스의 손등을 톡 건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저씨, 바보."

    "……."

    "아저씨, 멍청이."

    "……."

    "아저씨!"

    "……방금 뭐라고 했지?"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의 무릎을 소리날 정도로 탁탁 두들기고서야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멧돼지 어떻게 잡았냐고요."

    "멧돼지가 어때서?"

    "아저씨, 내 말 하나도 안 들었죠."

    "아니."

    "그럼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봐요."

    "……."

    "거 봐! 하나도 안 들었잖아요!"

    미카엘이 얼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카벨레누스는 아이의 얼굴을 보다가 결국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수도 없이 봐왔던 얼굴인데, 이제와서 껄끄럽게만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하지만 말간 눈동자를 마주볼 때마다 자꾸만 옛 기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너는 얌전히 나무나 휘두르고 있어."

    "이미 다 휘둘렀어요."

    "거짓말하지 마."

    "이런 걸론 거짓말 안 해요."

    미카엘이 턱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지금 몇 시인 줄이나 알아요?"

    "……."

    "할 말 없죠?"

    미카엘이 얄궂게 웃으며 턱끝을 살짝 추켜올렸다. 카벨레누스는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다 했으면 그만 가봐."

    "……."

    "가라고 했을 텐데."

    "아저씨,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시선에 맞춰 조심스럽게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없어."

    카벨레누스는 마주친 잿빛 눈동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없는데, 왜 자꾸 내 눈 피해요?"

    "안 피했어."

    "거짓말! 지금도 내 얼굴 제대로 안 보잖아요!"

    미카엘이 입을 삐죽거리며 또다시 카벨레누스의 시야를 막아섰다.

    "생각할 게 있다고 했지."

    "혹시, 제임스 삼촌 때문에 그래요? 삼촌이-."

    "그만 가라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미카엘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아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미카엘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냈다.

    "실은, 엄마가 아저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어요."

    "……."

    "상황 봐서 그 말을 해줄 생각이었는데……."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들고서야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미카엘을 향했다. 어느샌가 아이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왜, 우는거지?"

    지금껏 카벨레누스가 본 미카엘은 모진 말을 해도 넉살 좋게 넘기던 아이였다. 이런 걸로 우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가 벌써부터 눈치를 많이 봐요. 소심하고, 겁도 많아요. 그러니, 이 이상으로 잔인한 말씀하지 마세요.'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왜 이제와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노릇이었지만, 확실한 건 속이 쓰렸다. 또래보다 철이 일찍 들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더 익숙해서 제대로 울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울지마."

    "안 울어요!"

    "울지 말라고."

    "안, 운다니까요!"

    눈가가 발갛게 물든 주제에 안 울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미카엘을 보며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었다. 제 한 손조차 채우지 못하는 조막만한 얼굴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닿은 느낌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울지 말래도."

    카벨레누스의 엄지가 미카엘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미카엘은 토끼눈으로 카벨레누스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눈가를 어루만지는 거친 손끝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이게 다 누, 구 때문인, 흑……."

    정말로 싫었다. 제멋대로고, 성격도 나쁘고, 정말로 다 별로였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하지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무심한 눈동자도,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쉽게 보이는 뒷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싫은 척, 아닌 척 굴어도 결국엔 제게 떨어진 작은 관심이라도 좋아서.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라고 수백, 수천 번 되내어도 자꾸만 눈에 밟혀서.

    "흐읍, 흑, 흐아아앙!"

    미카엘은 뿌옇게 물든 시야 속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서러워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하루에도 수십 번 만져본 펜던트였다. 감춰진 비밀을 찾는 것도, 잔머리를 굴려 펜던트 안쪽에 감춰진 그림을 구김 없이 꺼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서나 봤던 아버지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다른 아버지처럼 안아주지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내지도 않는 아버지의 뒤를 몰래 좇으며 어설픈 기대를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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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울다가 잠들었어."

    "그게 무슨……."

    알리시아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서둘러 미카엘을 살폈다. 다행히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긴 미카엘은 얼굴이 퉁퉁 불긴 했지만, 별 문제 없이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었다.

    "제가 안을게요."

    "아니. 내가 하지. 제법 무거워."

    "……."

    "이것도 부담스러운가?"

    카벨레누스가 슬쩍 알리시아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표정이 없는 얼굴만 봐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들어오세요."

    알리시아가 슬쩍 몸을 틀어 카벨레누스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틈을 만들었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늘 오두막 주위를 맴돌았지만 안으로 들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카엘 방은 2층에 있어요."

    "그래."

    카벨레누스는 애써 긴장을 억누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오두막 안에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3명 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올라오시면 돼요. 계단이 낡아서 삐그덕거리니 조심해주시고요."

    "……."

    "여기가 미카엘 방이에요. 여기 눕혀주시면 돼요."

    알리시아가 재빨리 미카엘이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침대에 눕힌 후, 미카엘의 잠자리를 봐주는 알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실은 식사 초대를 했다고 들었어."

    "그간 미카엘을 돌봐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역시 알고 있었나."

    "모르는 게 이상하죠."

    알리시아가 이불을 정리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카엘은 완벽한 거짓말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아이의 변명은 허점투성이었다.

    "왜 말리지 않았지? 그대는 나를……."

    "아이가 행복해 보여서요."

    "……."

    "눈치채셨겠지만, 이 마을은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은 아니거든요. 실제로 아이한테 못 보일 꼴도 많이 보여줬고요."

    한숨 섞인 목소리가 안타까워 그대로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등불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그대에게 제대로 닿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남은 이야기는 식사라도 하면서 하죠."

    "……."

    "기껏 열심히 만든 음식인데, 버리면 아깝잖아요."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떨렸다. 몸을 돌린 알리시아는 그의 예상과 달리 웃고 있었다. * * *

    "입맛에 좀 맞으세요?"

    "맛있어. 아주. 굉장히."

    어설프게 덧붙여진 칭찬은 안 하느니 못한 것만 같다. 카벨레누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애꿎은 고기 조각만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멋진 칭찬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다행이네요. 미카엘에게 듣기로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들어서 좀 걱정했거든요."

    "……."

    입싼 놈 같으니라고. 카벨레누스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럴 거라면 무조건 맛있다고 말할 걸 그랬다.

    "여기 있는 요리, 전부 그대가 한 건가?"

    "저는 요리사를 데리고 있지 않으니까요."

    "요리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농담이에요. 농담. 그러니까, 그렇게 진지한 얼굴 하지 마세요."

    알리시아가 낭랑하게 웃고서야 뻣뻣했던 목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실은 좀 어색해서."

    "뭐가요?"

    "그대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원치 않았잖아."

    "솔직히 지금도 원하지 않아요."

    "……."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미카엘을 돌봐주신 것도, 그리고 구해주신 것도요."

    테이블 아래로 감춰진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구해줬을 때의 카벨레누스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설명하던 미카엘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미카엘이 카벨레누스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야.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건 내 탓이 크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식탁의 초가 반쯤 녹아갈 쯤, 카벨레누스가 먼저 입을 뗐다.

    "미카엘은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더군."

    "그러려고 노력해서 그렇죠."

    "솔직히 말하자면, 여섯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여."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섯살보다 얼마나 더 많아 보이는데요? 한 살? 두 살? 아니면, 더 위인가요?"

    하지만 알리시아는 웃는 낯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나는 이런 건 못 하겠군."

    적어도 그대 앞에선 그러지 못하겠어.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그 와중에도 알리시아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미카엘의 펜던트를 봤어."

    "미카엘이 잃어버렸다고 울상이던데, 전하께서 가지고 계셨나 보네요."

    "할 말은 그것 뿐인가?"

    "펜던트를 돌려달라는 말도 할 참이에요."

    알리시아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구겨진 펜던트를 꺼냈다.

    "습격 당시, 누군가 밟은 모양인지 엉망이 되었더군."

    "곤란하게 됐네요. 미카엘이 많이 아끼던 건데."

    "그래서, 의도치 않게 안에 있는 걸 봤어."

    "그래서요?"

    "내 그림이더군."

    무려 8년 전의. 카벨레누스가 힘겨운 숨을 뱉었다. 마치 뜀박질을 한 양 심장이 시끄럽게 뛰고 있었다.

    "그런 게 있었나요?"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인가?"

    "모른 척이라뇨. 그냥 그림일 뿐이잖아요. 그린 사람도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어요."

    알리시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카벨레누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털을 부풀린 고양이처럼만 보였다.

    "미카엘이 말하길, 그 펜던트의 주인이 자기 친부라고 하더군."

    "……."

    "다시 한 번 물을게."

    8년 전의 그 아이. 정말로 죽은 게 맞아? 카벨레누스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모른 척하는 알리시아의 의도를 알면서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요?"

    "……."

    "살아 있다면, 뭐가 달라지나요?"

    알리시아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전해주지 못했던 8년 전의 부적이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구겨진 펜던트처럼 모든 게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탈을 쓴 괴물일 뿐이야."

    "……."

    "괴물의 피를 이은 아이는 결국 괴물일 뿐이니까."

    "……."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니까."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왜 그날의 비수 같던 말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까. 허망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한 말이었어요."

    "나는 그저-."

    "우습지 않나요? 고작 말이었어요. 당신은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를, 당시의 감정에 북받쳐서 내뱉었던 고작 말. 그 말에 전 아직까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곤 해요."

    "……."

    "게다가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어떻게 달라졌든 간에 혹시나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죠."

    저 아직도 꿈을 꾸거든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가냘픈 숨이 흘러나왔다.

    "수도 없이 아이를 부정하던 당신이 결국 내 아이를 죽이는. 그래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간 내 아이가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그런 비참한 꿈을."

    알리시아의 손끝이 희게 질렸다. 단지 꿈이었을 뿐인데 숨통이 바짝 조여와 괜히 숨이 가빠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그리고, 고작 말이었어요."

    "……."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이 하필 당신이었죠.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당신이 특별했던 만큼 상처도 깊어서. 알리시아는 그 순간에도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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