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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65)화 (65/164)

65화. 아이가 살아 있었다

2020.10.15.

"왜 대답이 없지? 다친 곳 없냐고."

"……."

"설마 겁먹은 건가?"

최대한 피는 안 보이는 방향으로 나름 자제한다고 자제했는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저씨, 진짜 강하네요."

"겁먹은 건 아닌가 보군."

"이런 거 처음 봤어요."

"당연히 처음 봐야지."

카벨레누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다음, 루이스를 흘겨봤다. 루이스는 당황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그저 물고기처럼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길래, 어린애 하나 두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야, 뻔하지 않나. 전부 다 네놈 탓이지."

"내 탓?"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놈 때문에 우리 아들 다리가-."

"아, 그놈인가?"

"그래! 피터! 네놈이 멀쩡한 두 다리를 분질러놓은 내 아들 피터!"

루이스가 핏대를 세워가며 버럭 외쳤다. 피터가 그런 몰골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 원흉이 저 이방인이라는 말을 마렌에게 전해 들었을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그 정도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뭐?"

"아예 죽여버릴까 하다가 참은 거였거든."

"이놈이-."

"그리고, 복수라도 하고 싶었으면 나한테 했어야지."

카벨레누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신장 차이 때문에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미카엘의 모습이 감춰졌다.

"네가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나도 네 아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거지! 안 그래?"

"누가 내 아들……."

카벨레누스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미카엘이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지, 일단은."

언제는 자신이 싫다면서, 이럴 때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카벨레누스는 짜증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턱을 삐딱하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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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먼저 들어가."

"아저씨는요?"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리고는 곧장 걸음을 뗐다. 미카엘은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다급하게 달려가 카벨레누스의 앞을 막아섰다.

"왜?"

"그, 그게…… 아! 결국, 멧돼지는 못 잡은 거네요!"

"잡았는데."

"네?"

"손질해서 가져다주지. 네 어머니는 보양할 필요가 있어 보이니까."

슈바르한이라면 온갖 귀한 것들을 먹였겠지만, 아쉬운대로 멧돼지라도 먹여야지.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로 걸음을 뗐다. 미카엘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카벨레누스의 앞을 막아섰다.

"할 말이 더 있나?"

"그게 말이죠……."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말할 거면 제대로 해. 우물거리는 건 딱 질색이야."

"고…… 고요……."

"뭐라는 거야."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미카엘은 빠르게 심호흡을 반복하다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맙다고요!"

"뭐?"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미카엘은 빠르게 외치고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뱉었다. 심장이 떨렸다. 카벨레누스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하고 싶지 않아 차마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의외로군."

"……."

"그런 말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그랬어요. 감사 인사는 제대로 해야한다고. 그리고……."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저씨가 무작정 싫진 않아요."

"……."

"조금, 아주 조금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미카엘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손에 힘을 줬다. 엄마는 아저씨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건 싫었다. 어느 날, 훌쩍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몰래 떠나지 말아요.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잡았다. 카벨레누스는 떨리는 아이의 손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어째서 아이는 자신을 향해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는 건지. 그리고, 왜 자신은 저 시선을 외면할 수 없는 건지.

"나는-."

"미카엘!"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카엘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금세 환하게 웃었다.

"삼촌!"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의 손이 순간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구겨진 옷자락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잘 지냈어?"

"사탕 사 왔어요?"

"당연히 사 왔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끌어안은 은발의 사내를 바라봤다. 곱상하게 생긴 사내는 카벨레누스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전하."

제임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벨레누스는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카엘을 끌어안고 있는 제임스의 팔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제가 전하께 설명 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이유가 없다고?"

"전하께서는 이미 8년 전에 자격을 잃으셨으니까요."

제임스는 셔츠 소매로 미카엘의 얼굴을 가렸다. 짐승 같은 사내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8년 전, 알리시아가 피투성이 몸으로 설원을 헤쳐가며 도망쳤을 때,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나버렸다. 죽어가던 알리시아의 손을 잡은 것도, 미카엘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카벨레누스에게는 그 어떤 자격도 주어질 수 없었다.

"넌 자격이 있다는 건가?"

"적어도, 전하보다는 있을 겁니다."

"……."

"계속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전하가 아니라, 바로 제가요."

제임스는 눈에 힘을 줬다. 8년 전만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카벨레누스는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알리시아는 맹목적으로 카벨레누스를 따랐고 제임스의 마음 역시 깊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 했다. 알리시아의 우선순위는 바뀌었고 제임스의 마음도 달라졌다. 알리시아를 당연하게 품에 안고 제임스를 바라보던 카벨레누스가 더는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화가 나부랭이따위가 감히……."

카벨레누스는 자신도 모르게 하던 말을 멈췄다. 보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가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치겠군."

카벨레누스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조금만 덜 닮을 것이지. 하필 알리시아를 꼭 빼닮은 얼굴로 그러는 건 반칙이었다. * * *

"그래서, 무슨 생각이었지?"

"……."

"대답하지 않을 건가?"

자리를 비운 새, 단체로 입이라도 맞췄는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짤막한 한숨과 함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둘렀음에도 고목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말하지 않으면 다음은 누가 될지 모르겠는데."

"……."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상관 없겠지."

"개인적인 복수일 뿐입니다!"

존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복수?"

"촌장, 아니 저 늙은이가 아들이 다쳤다니까 눈이 멀어서 벌인 일입니다!"

"이놈이, 감히-.

"맞습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여럿이서 덤비면 못 이길 테니, 조용히 처리하고 그 대가로…… 어, 음…… 나으리! 네! 나으리의 재물을 나눠준다고 했습니다!"

"옷도 고급품이고, 돈 씀씀이도 남다르다며 숨겨놓은 재산이 더 될 거라고요!"

한 명의 입이 열리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백이 튀어나왔다. 카벨레누스는 턱을 괸 채로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며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아닐 거라곤 생각했지만, 역시나였다. 어설픈 습격자들은 배후에 제르페누스나, 헤르만이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평화가 지속될 거라고 보지 않았다. 슈바르한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건, 적들에게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이 기회를 허투루 날릴 리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짧은 숨과 함께, 검을 도로 집어넣았다.

"목숨이 아깝다면, 숨죽이고들 살아. 한 번만 더 그딴 수작 부렸다간 정말로 죽여버릴 테니까."

"그, 그럼 살려주시는 겁니까?"

"……."

대답 대신, 빤히 바라만보는 카벨레누스에 존이 기겁하며 두 손을 싹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다신 그딴 짓 저지르지 않습니다! 맹세합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알았으니까 꺼져."

"네, 네!"

퇴출이 허락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네?!"

화들짝 놀란 무리가 희게 질린 얼굴로 카벨레누스를 돌아봤다.

"숲 안쪽에 아까 잡아둔 멧돼지가 있어. 손질해서 알리시아의 오두막까지 가져다 놓도록 해."

"멧돼지요?"

"가죽은 벗기고, 피와 내장도 전부 제거해서 깔끔하게."

"……."

"안 가나?"

자연스럽게 내려진 명령에 순간 당황했지만, 저 짐승 같은 눈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다. 애당초 저 흉흉한 눈을 마주할 바에는 차라리 멧돼지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가, 갑니다! 가고 말고요!"

마을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같은 생각으로 다급하게 뛰어갔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후……."

미카엘의 존재로 알리시아에게 다른 사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정신이 아찔했다. 이미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라서 도무지 감정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 다음으로는 허무했고, 또 그 후로는 슬펐다. 하지만 우스운 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제임스가 미카엘을 데리고 알리시아의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감정이 제멋대로 널뛰며 속을 수백 번 뒤집어 놓고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정말로 미치겠군."

카벨레누스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알리시아와 다시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8년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고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시간은 박제되어 멈춰 버렸는데, 그녀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카벨레누스는 꾸역꾸역 질투를 삼켜내며 이를 꽉 물었다. 슈바르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알리시아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어떻게해야 그녀를 설득할 수…….'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쌓인 나뭇잎 사이로 뭔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꼬마 거군."

아까 버둥거리면서 걸린 목걸이 줄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낡은 펜던트를 살피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떨어지면서 어디 부딪힌 건지, 아니면 밟힌 건지 펜던트는 움푹 파인 것처럼 모양이 망가져 있었다.

'제법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던데…….'

미카엘이 이걸 발견하면 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카벨레누스는 혀를 차며 펜던트를 비틀었다. 일그러진 펜던트는 힘을 줘야만 겨우 뻑뻑하게나마 열렸고 안에 있는 그림은 구겨져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군."

손으로 살짝 펴보려고 해도 아예 몸체가 구겨진 거라 소용이 없었다. 전문가에게 따로 수리를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카벨레누스는 벌어진 펜던트 틈으로 구겨진 그림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했다. 펜던트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은 알리시아의 모친의 초상화였다. 목걸이가 알리시아의 것이라면 문제될 건 없지만, 미카엘은 그것이 친부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남자를 위해 만든 부적이라면, 다른 그림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럽게 튀어나온 그림을 들어올렸다. 고작 확인만 하는 것뿐인데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건 짐승에 가까운 사내의 직감이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가 그러하듯, 본능적으로 뭔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툭-. 카벨레누스의 손에서 펜던트가 스르르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사내는 그걸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 머릿속에 새하얀 물감을 부어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전부 새하얗기만 했다. 초상화로 가려진 펜던트 안쪽에는 꽤 오래된 듯 빛바랜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검은 머리에, 금안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지금보다는 더 앳된 모습의, 8년 전의 자신이.

"……."

카벨레누스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림을 쥐었다. 어느샌가 시작된 떨림에 자꾸만 손에 힘이 풀리려고 했지만 고집스럽게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 없었다. 손에 쥔 무엇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놓는 순간, 8년 전처럼 허망하게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카벨레누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렸다. 8년 전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 괴물이 아닌, 평범한 아이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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