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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64)화 (64/164)

64화. 다친 곳은?

2020.10.12.

"그 노파가 분명 짐승 새끼를 받았다고 했지?"

"술과 약에 취해 이미 정신 나간 노파입니다. 산파로 일했다는 말도 거짓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으로선 가능성을 얻어낸 것만으로도 충분해."

하필, 딱 그 시기에 짐승으로 태어난 아이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르페누스에게는 말도 안 된다면서 가볍게 넘길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르페누스는 턱을 괸 채 다리를 꼬았다.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정세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대신관 늙은이는 이때다 싶어 신탁 놀음을 하며 황실을 먹으려고 안달이 나 있었고,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는 주인의 뒤꿈치를 물었다.

"나탈리가 남아 있었더라면 좀 더 참을 만했을 텐데, 아쉽군."

제르페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지면서 짓고 있던 미소도 일그러졌다. 카벨레누스를 손에 넣은 이상, 이제 대신관은 나탈리를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었다. 카벨레누스 이상으로 매력적인 것을 내어줘야지만 8년 전, 못다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나탈리님은-."

"그녀 이야기는 됐어. 아쉽긴 해도 나중에 다시 가지면 돼."

"하지만……."

"그녀와 바꾸기에는 아이의 가치가 너무 높아졌어. 그러니, 지금은 그녀보다 아이 쪽 문제에 더 신경써."

제르페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왼쪽 소매에 감춰둔 팔찌를 매만졌다. 나탈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 어떤 여자도 나탈리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특별함에는 항상 한계가 있었다. 나탈리라는 여자는 사랑했지만, 반역 가문으로 낙인 찍혀 모든 걸 잃어버린 리아나드 후작 영애는 품어줄 수 없었다. 신관이 된 그녀를 언제든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무리한 값은 치르고 싶지 않아 매번 대신관과 거래 조건을 이리저리 재며 시간만 보냈다. 그 시간 속에서 나탈리가 고통스러워 하는 건 알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권력이라는 건 선택의 연속이었고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위한 약점을 만들 순 없었다. 나중에 나탈리에게 걸맞는 자리를 줄 생각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카벨레누스와는 만났다고 했지?"

"네. 나탈리님 측에서 먼저 손을 쓰시는 바람에……."

"내 사랑스러운 아우님은 상대하기가 껄끄러운데, 꽤나 곤란하게 되었군. 군대라도 보내야 하나?"

제르페누스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작은 마을이니 금세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군사를 풀면 신전 측에서 알아차릴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슈바르한 안으로 들어가면 더 잡기 어려워질 거야."

"그러면……."

"조금만 더 빨리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 아우님께서 너무 발이 빠르셨지."

카벨레누스의 손이 닿기 전에 아이를 손에 넣었으면 좀 더 이야기가 쉬워졌겠지만, 이미 선수를 빼앗겼다. 아쉽지만 카벨레누스와의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카벨레누스를 상대하려면 병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솔직히 갸늠하긴 어렵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워낙 특별하시니까요."

펠티온은 쓰게 웃었다. 제르페누스의 그림자로서 살아온 시간만큼 카벨레누스를 봐왔다. 슈바르한의 늑대는 그에게 붙은 악명이 우스울 정도로 괴물 같은 존재였다.

"제 아무리 카벨레누스라도 한계는 있겠지."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능성은 충분하군. 내 아우님은 아군으로 두면 참 든든한데, 적으로 두면 상당히 골치 아픈 상대라서 말이지."

곤란하다는 사람치곤 제르페누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하지만 펠티온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제르페누스가 저럴수록 잔혹한 계획을 세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면, 그녀를 보내는 건 어때? 그녀라면, 충분히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라면……."

"8년 전 사건 때문에 여러모로 원한이 쌓여 있는데, 이 김에 감정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겸사겸사, 족쇄에 대한 실험도 해보고 말이야."

"족쇄말입니까?"

"카벨레누스 때처럼 족쇄가 쉽게 풀리면 곤란하잖아. 아버지께서 간과했던 부분을 보완해서 절대 풀 수 없는 족쇄를 만들어내야지. 그녀에게 새겨놓은 족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인해보자고."

그 어여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짐승처럼 절규하던 여자를 떠올리며 제르페누스는 싱긋 웃었다. 감정적이고 멍청해서 옆에 두기엔 부족했지만, 능력은 나름대로 써먹을 만했다. 8년 전 사건의 죽음을 완벽하게 조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덕분이기도 했고.

"아, 그리고 아이는 최대한 살려오되, 혹시라도 놓칠 것 같다면 그냥 죽여버려."

"아이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내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당연히 죽여야지."

위협이 될 만한 건 처음부터 잘라버려야지. 제르페누스가 피식 웃었다.

"아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인 겁니까?"

"아니."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할 뿐 가치 있다고 말하긴 이르지. 그 아이가 정말로 마물을 조종하는 힘이 있는지는 모르고, 운 나쁘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제르페누스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느긋하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직은 추측에 불가할 뿐,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가능성이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면 아예 판도가 달라질 거다. 애매하게 물 밑에서 힘 겨루기만 하고 있던 황실과 신전 간의 전쟁이 이번 기회에 끝날 거야."

"마물을 조종하는 힘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마물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들이 없는 것도 아닌 걸요. 군대는 통제가 어려운 마물보다는 그런 실력자들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야 있지만, 무력만이 힘은 아니지."

대신관은 신의 뜻을 가장해 스스로 재앙을 만들고 없애가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통제하며 권력을 유지해왔다. 지금까지 신전이 버틸 수 있었던 건, 필요에 따라 언제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만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신의 뜻이라는 단어만큼 사람들을 쉽게 유혹하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럼, 폐하께서는……."

"나라고 그 방식을 못 쓸 이유는 없지 않나."

제르페누스의 눈이 빛났다. 프라임 신전은 대대로 마물을 신에게 버림 받은 죄인들이라 말해왔다. 신전과 대적하기엔 어떤 존재보다 제격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괄시해오던 마물들에게 짓밟힌 신의 사자. 그 누가 그렇게 나약한 구원자를 믿겠어?"

"마물의 힘이 아니라, 이름이 필요하신 거군요."

"마물이 그동안 쌓아온 악명은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지. 두려움만큼 사람들을 통제하기 쉬운 게 없거든."

제르페누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벌써부터 아이를 손에 넣을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만 손에 넣으면 신의 뜻도 우리 것이 되는 거다. 드디어 어설프게 권력을 나눠가진 반쪽이 아니라, 진짜 세상의 주인이 되는 길이 열리는 셈이지."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대로. 제르페누스는 유리창에 비친 제 인영을 천천히 어루만지다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금안이 아닌 눈동자는 여전히 거슬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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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후우……."

미카엘은 뜀박질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얌전히 카벨레누스의 말을 듣고 있기에는 너무 지루했다. 혼자서 하는 훈련은 전혀 재미없었다.

'진짜 감쪽 같이 숨어서 쫓아갔는데, 눈치가 귀신 같아서…….'

미카엘은 두 손에 턱을 받친 채로 카벨레누스가 사라진 길을 노려봤다. 카벨레누스의 뒤를 몰래 뒤쫓으려다가 이미 여러 번 걸린 전적이 있어 쫓아가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멧돼지한테 당하면, 내가 도와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깊은 뜻도 모르고 쫓아오면 다신 훈련시켜주지 않는다는 협박이나 하고.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해서 절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가 아닌 게 천만 다행이지. 그것도 아주 다행!"

미카엘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절대 안 도와주겠다고 툴툴거리고 있는 것과 달리, 카벨레누스가 떠난 방향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바스락-. 그때였다. 가까이서 들린 수풀 소리에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아저…… 어?"

카벨레누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미카엘은 토끼눈으로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들을 바라봤다.

"아저씨들이 웬일이에요?"

절 둘러싼 사람들에 미카엘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 같이 익숙한 얼굴의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나무몽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어딨지?"

"그 남자요?"

"요즘 너랑 자주 어울리는 것 같던데, 어디 갔는지 모르니?"

"아저씨는 왜 찾아요?"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험악한 표정을 한 촌장, 루이스를 보곤 미카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평소 너털 웃음을 짓고 다니던 루이스답지 않게 그는 어쩐 일인지 잔뜩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는 멧돼지 잡으러 간다고 했어요."

"멧돼지?"

"멧돼지가 밭을 헤쳐놨다고요."

"웃기는군. 고작 혼자서 뭘 하겠다고."

"……."

"그래서, 그자는 어느 쪽으로 갔지?"

착각이 아니다. 차가운 말투에서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미카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왼쪽 방향을 가리켰다. 카벨레누스가 간 것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쪽으로 갔단 말이지?"

"떠난지 꽤 되었으니까, 따라잡으려면 얼른 가야할 걸요."

"그래. 알았다."

루이스는 대충 대꾸한 다음,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는 마을에서 힘 좀 쓴다는 청년들이 우르르 붙어 있었다. 미카엘은 멀어지는 촌장 일행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자 곧장 몸을 돌려 그대로 내달렸다.

'아저씨가 위험해.'

카벨레누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카벨레누스에게 위험을 알려야만 했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일단 달리긴 했지만, 길게 이어진 숲은 전부 다 비슷해 보여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미카엘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머리 위로 부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카엘에겐 다소 높은, 하지만 카벨레누스에게는 딱 맞은 높이에서 꺾인 나뭇가지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카벨레누스가 길을 표시해둔 것이었다. 미카엘은 환하게 웃으며 재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카벨레누스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빨리 쫓아간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서 검은 인영이 보였다. 미카엘은 환하게 웃으며 힘껏 발을 내디뎠다.

"아저-."

"거짓말을 했구나, 미카엘."

"……."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미카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잿빛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어머니도 네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알고 있니?"

"……."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네 어머니 입장이 꽤나 곤란해질 거다."

"엄마는 아무런 잘못 없어요."

"그런 두고 볼 일이지. 결국 저놈이 꼬여든 건 따지고 보면 네 어머니 탓이잖니."

잡힌 뒷덜미에 목이 조여들었다. 미카엘은 인상을 쓰며 목을 조이는 셔츠를 잡아당겼다.

"이거 놔요!"

"녀석, 성격 하곤. 걱정하지 마라. 그간의 정이 있는데 설마 우리가 너한테 나쁜 짓이라도 하겠니?"

루이스는 싱긋 웃으며 뒤 선 청년에게 턱짓했다.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미카엘을 어깨에 멨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촌장님."

"그놈, 딱 봐도 만만치 않은 놈이니 혹시 모를 대비책으로 데리고 있어야지. 설마 제 새끼를 보고도 못 본 척하겠어?"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켜. 이러다가 괜히 저놈이 우릴 먼저 눈치채면 곤란해. 놈이 방심한 틈에 처리해야지."

"우웁! 욱!"

힘껏 반항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다. 미카엘은 억지로 입에 물린 손수건에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퍼억-!

"아아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일행 중 가장 키 큰 밀이 다리를 감싸쥐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악!"

소란에 앞장서서 나온 가일이 어깨를 감싸며 비명을 내질렀다.

"어디야! 갑자기 어디서-."

"저쪽! 저쪽에서! 아니, 반대쪽-, 윽!"

미카엘은 당황해 눈만 껌벅거렸다. 바닥에는 피 묻은 돌멩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저씨?"

청년들이 우왕자왕하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을에서 가장 덩치 좋은 존이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어느 샌가, 존의 등 위에는 그의 목덜미를 눌러 제압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어린애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네, 네놈이……!"

"다들 뭐 해! 얼른 저놈을 잡아!"

혀를 쯧쯧 차는 카벨레누스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다급하게 그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휙! 카벨레누스는 쓰러진 존을 한 손으로 들어 달려드는 무리를 향해 그대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존의 무게에 눌린 청년들은 넘어져 버둥거리는 틈을 타 남은 둘도 잡아채 그대로 그 위로 던져버렸다.

"다친 곳은?"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토하며 미카엘을 바라봤다. 미카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만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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