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3)화 (63/164)
  • 63화. 떠날 생각이야

    2020.10.08.

    카벨레누스는 엄지를 움직여 펜던트를 밀었다. 약간의 힘을 주자, 펜던트는 달깍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이 열렸다.

    "……아직도 그림을 그리나보군."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실력이 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의 그림인 걸 한눈에 알아봤다. 여전히 슈바르한에는 알리시아가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

    "그야, 우리 엄마는 화가니까요."

    "화가?"

    "엄마가 그림을 그리면 삼촌이 팔아주고 있어요."

    협소한 마을에서 생계를 어떻게 꾸리나 했더니. 카벨레누스는 펜던트 안쪽에서 웃고 있는 여자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엄마 그림이 요즘 인기 있대요. 그래서 큰 도시에 있는 화가 협회에서도 제의를 받는다고요."

    "……그런데,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는 거지?"

    "엄마말로는 엄마는 실력이 별로래요. 내가 보기엔 되게 잘 그리는데, 좀 더 연습을 더 하고 싶댔어요."

    "……."

    "그치만 삼촌이 그랬는 걸요. 엄마는 더 크게 될 사람이라고, 여기보다는 더 큰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요."

    카벨레누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거리는 아이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알리시아가 떠나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알리시아의 우선 순위는 미카엘일테니까.

    "아저씨도 나중에 엄마 그림 보면 꼭 칭찬해줘요. 알았죠?"

    "그래."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림 너머 펜던트 안쪽에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카벨레누스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그림을 빼려다가 멈췄다. 억지로 빼려고 하면 그대로 그림이 구겨져버릴 것이었다.

    '……별 의미는 없겠지.'

    장인의 물건도 아니고, 그냥 길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공산품이었다. 재료를 아끼기 위해 일부러 속을 텅 비게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그리 수상한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빌려주는 거예요. 가져가면 안 돼요. 알았죠?"

    "그렇게 불안하면 다시 가져가."

    "하지만……."

    미카엘이 머뭇거리자, 카벨레누스가 먼저 움직였다. 미카엘은 도로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반사적으로 매만졌다.

    "소중한 물건은 함부로 내주는 게 아니야."

    "……그렇게 소중한 건 아니에요."

    미카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것치곤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하던데."

    "그건 엄마가 만들어서 그런 거죠. 설마 내가 아빠 물건을 진짜 좋아하겠어요?"

    "아빠? 네 아버지?"

    "웃기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남긴 게 고작 이거 하나래요. 그것도 엄마가 만들어준 거."

    "……."

    "엄마 성의를 봐서 걸고는 있지만 솔직히 썩 마음에 들진 않아요."

    미카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은 그 순간에도 펜던트를 꽉 쥐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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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지냈어, 알리시아?"

    "드디어 왔네."

    알리시아가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임스를 발견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은 어딨어? 오늘도 놀러 나갔나?"

    "물론 나갔지. 특히 오늘은 도시락도 가지고 갔으니 좀 늦게 올 거야."

    "미카엘이 좋아하는 사탕을 잔뜩 사왔는데 아쉽게 되었네."

    "정말? 미카엘이 알면 진짜 좋아할 거야. 차 마실래?"

    "차를 마시기 전에 문 좀 열어주면 좋겠지만."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줘."

    알리시아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먼 길을 와서 수척해질 법도 한데, 은발의 사내는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우리 몇 개월만에 만나는 거지?"

    "거의 두 달일 걸."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더 되는 줄 알았는데."

    제임스가 능청을 떨며 모자와 외투를 벗어 벽에 걸었다. 알리시아는 분주히 냄비에 물을 올리고 찬장에서 찻잎 꺼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원래는 지난주쯤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나?"

    "계약 조건을 새로 협의하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라고."

    "제임스, 새로 계약해?"

    "나 말고, 너."

    "……."

    주전자에 찻잎을 넣던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최근 화가 협회에서 차세대 작가들을 선정하기 시작했어. 넉넉한 후원금이 지급될 거고,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게끔 작업실도 준비될 거야. 물론, 명성을 쌓는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나보다 더 좋은 화가가 많을 텐데."

    "협회장이 널 원하고 있어. 그녀는 네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고, 네게 거는 기대 역시, 무척 커."

    "……."

    "좋은 기회야."

    제임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뱉었다.

    "좋은 기회 줘서 고마워. 하지만 알잖아. 내 처지가 어떤지. 지금은 무리야."

    "언제까지 무리라고만 할 건데?"

    "그건 미카엘이 좀 더 크고 나서……."

    "네가 지금껏 미카엘을 위해 헌신해온 거 알고 있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기회를 날리다간 분명 후회할 거야."

    제임스의 목소리에선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이 엿보였다. 알리시아에게는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아직은 미비하지만 수도에선 그녀의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환경만 갖춰진다면, 그녀는 분명 화가로서 입지를 굳건하게 잡을 것이었다.

    "미카엘 때문에 계속 미뤄온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미카엘도 제 앞가림은 할 나이잖아."

    "미카엘은 아직 애야."

    "걔도 이제 8살이야. 성장이 느리긴 해도 분명 8살이라고."

    "하지만, 알잖아. 미카엘은……."

    "네가 뭐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지난 일이잖아."

    제임스가 짧게 숨을 토해냈다. 남들과는 다른,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 그는 미카엘이 태어났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일?"

    "그래. 지난 일이야. 실제로 미카엘은 지금껏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어. 아무도 미카엘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는지 모르고, 설령 알고 떠들어도 누가 믿겠어."

    제임스가 다가와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쌌다. 알리시아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았던 거잖아. 이 마을도 겨우 정착한 거고."

    "……."

    "너는 충분히 했어. 더는 숨어 살 필요는 없어."

    "……."

    "사람은 더 큰 곳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해. 이건 너뿐만 아니라, 미카엘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야.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서 살 수 없잖아."

    제임스가 낡은 오두막을 바라봤다. 알리시아가 마을 내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목이 탔다. 큰 돈을 주고 산 것치고는 낡고 허름한 집도, 알리시아를 깎아내리기 바쁜 마을 사람들도 무엇 하나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그녀를 이런 곳에 둘 수 없었다.

    "내가 도울게."

    "……."

    "그럴 수 있게 해줘. 우린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제임스가 알리시아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8년 전, 설원에서 다 죽어가던 알리시아와 재회했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다. 그 순간조차 알리시아를 통해 먼저 간 누이를 겹쳐 보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만들었다. 온갖 핍박도, 서러움도, 기쁨도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되었다. 비록, 알리시아가 보는 가족과 자신이 보는 가족의 의미가 다를지라도.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어."

    "부탁? 무슨 부탁?"

    "그 사람이 왔어."

    "……."

    제임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곧장 입을 똈다.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슈바르한의 주인, 그리고 미카엘의 친부."

    "그자도 알고 있어? 미카엘이 자기 아이라는 거."

    "아니. 몰라."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를 수 없을 텐데."

    "내가 거짓말을 했어. 여섯 살이라고. 미카엘은 다행히 또래보다 작잖아."

    "그 말을 믿었다고?"

    제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예전에 모르코 부인이 그랬어. 그 사람이 이미 아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리고?"

    "아이는 검은 머리와 금안을 가지고 태어날 거라고. 하지만 미카엘은 어느 쪽도 닮지 않았잖아. 의심할 순 있어도 쉽게 확신할 수 없을 거야."

    알리시아가 기억하는 카벨레누스는 주관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확신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말하지 않을 셈이야."

    "응. 절대."

    바로 이어진 알리시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자가 여전히 미카엘을 죽일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우습게도 그 사람, 미카엘이랑 꽤 잘 지내고 있거든."

    알리시아의 양 입꼬리가 축 처졌다.

    "게다가 미카엘도 그 사람을 참 많이 좋아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제 아버지라는 걸 아는 건지, 당연하게 그 사람을 좇아. 그게 너무 빤히 보여서 차마 함께 있지 말라고 못 하겠어."

    차라리 데면데면하면 좋을 텐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카벨레누스와 미카엘 사이에는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카벨레누스가 미카엘을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

    알리시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벨레누스가 미카엘에게 너그러운 건, 그때 그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미카엘을 임신했을 때, 차라리 입양을 하자고 말했던 사람이야. 그게 낫다고."

    "……."

    "겁이 나. 그 정도로 미카엘을 혐오했던 사람이 진실을 알았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일지가."

    알리시아의 손이 떨렸다.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태어난 아이. 실제로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믿기 어려웠겠지만 미카엘은 그렇게 태어났다. 카벨레누스가 증오하던 마물의 모습을 닮은 짐승의 모습으로.

    "미카엘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어.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 걸."

    미카엘이 짐승의 모습을 했던 건 정말로 잠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는 점점 더 사람에 가까워졌고 두 살 무렵부터는 완전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아이는 짐승의 모습보다는 사람의 모습으로 더 오랜 시간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었다. 단지 태어날 때 그런 모습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괴물 취급 받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관점일 뿐, 카벨레누스의 관점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미카엘이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걸 알면 괴물이라고 멋대로 확신하고, 결국엔……."

    알리시아는 차마 다음 말은 할 수가 없어 그저 두 손으로 힘겹게 입을 막았다. 제 아이가 죽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서, 내가 뭘 해주길 바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사람이 먼저 포기해줬으면 싶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야."

    "네 말뜻은……."

    "조만간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야. 물론, 그 사람 모르게."

    도와줄 수 있을까? 알리시아가 붉어진 눈으로 제임스를 올려봤다. 제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얼마든지 도와줄게. 대신, 목적지는 내가 정하게 해줘."

    "제임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심지어 그 사람은 이런 촌구석 마을까지 쫓아온 사람이야. 그냥 숨는 건 의미가 없어."

    "……."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제임스의 말대로였다. 이곳까지 찾아온 카벨레누스를 생각하면 단순히 그냥 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차라리 나와 함께, 수도로 가자. 가서 이름도, 신분도 새로 만들어서 아예 새롭게 사는 거야."

    "……그게 정말 가능할까?"

    "내가 수도에 머물면서 느낀 건, 돈만 있으면 수도에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사실 뿐이야."

    "나는 많은 돈은 낼 수 없는 걸."

    "걱정하지 마. 내가 이번에 네 그림 값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제임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열 수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그런 식의 도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을 가장 좋은 값으로 팔아주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얼마나 벌었는데? 3천 갈렌?"

    "아니. 그보다 한참 더."

    "그럼 혹시, 1만 갈렌?"

    "아니, 10만 갈렌."

    "뭐?"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제임스는 뿌듯해하며 보다 진한 미소를 지었다.

    "말했잖아. 이번 작품은 분명 비싸게 팔릴 거라고."

    "하지만, 10만 갈렌은 너무……."

    지금껏 몇 년간 팔아온 그림값이 2만 갈렌이 조금 안 됐다. 10만 갈렌은 너무 낯선 숫자였다.

    "놀랄 필요 없어. 10만 갈렌은 시작일 뿐이야. 좀 더 명성을 쌓으면 지금보다 훨씬 비싼 값에도 팔 수 있어."

    "……."

    "미카엘이 열 살이 되면, 아카데미 보내고 싶다고 했지? 못해도 지금처럼만 벌면 아카데미 졸업까지는 학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제임스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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