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2)화 (62/164)
  • 62화. 잠깐만 빌려줄게요

    2020.10.05.

    알리시아가 거친 숨을 뱉었다. 요즘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와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왔다. 카벨레누스가 아무리 잠자코 있다고 한들, 언제 그의 마음이 바뀔지 몰랐다.

    "아니."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그대로 뛰쳐나가려다가 이내 이어지는 목소리에 그대로 멈췄다.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리시아는 나무를 짚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로 아니에요?"

    "그래."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려 미카엘의 시선을 피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아이의 시선 끝에 담긴 간절함을 모를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럼, 우리 아빠가 누군지도 몰라요?"

    "몰라."

    "그럴 줄 알았어요! 솔직히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되기엔 너무 못됐잖아요? 우리 아빠는 아저씨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있고 다정한 사람일 거예요!"

    미카엘은 이가 보일 정도로 웃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알리시아는 괴로웠다. 마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길 빌어야지. 만약, 모자란 놈이었다면……."

    카벨레누스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는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카벨레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두 손을 꽉 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멀리서 바라본 두 사람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럴싸해 보이고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욱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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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크리스랑 나눠먹어."

    "이렇게나 많이?"

    미카엘이 품에 한 가득 안긴 도시락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리시아는 동글동글한 아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훌륭한 어른이 되려면 잘 먹어야 하잖아."

    "으음, 그렇지."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벌써 밖에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카벨레누스도 분명 나와 있을 것이었다.

    "미카엘."

    "응. 엄마."

    "미카엘은 많이 아빠가 보고 싶어?"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아빠 필요 없어! 엄마만 있으면 돼!"

    미카엘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알리시아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보고 싶어해도 돼."

    "그치만 아빠는 나쁜 사람이잖아."

    "……아빠가 왜 나쁜 사람이야?"

    "엄마를 혼자 뒀잖아. 그게 제일 나빠. 그러니까, 나는 아빠 같은 거 필요 없어."

    알리시아의 시선 끝에 미카엘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걸렸다.

    "아빠가 남겨준 것도 있잖아."

    알리시아가 손을 뻗어서 미카엘의 펜던트를 쥐었다. 미카엘이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부적처럼 걸기 시작한 목걸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그리워?"

    "그리웠지, 항상."

    전해주지 못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매해 카벨레누스를 위한 부적을 만들었을 만큼. 알리시아는 차마 뱉지 못하는 진심을 숨기며 그저 웃었다.

    "그러면 아빠는 나쁜 사람이 맞아. 엄마를 항상 기다리게만 하잖아."

    "……."

    "엄마. 나는 정말 괜찮아."

    미카엘은 짧은 두 팔로 낑낑거리면서 알리시아를 안으려 애썼다. 알리시아는 아이를 안은 채, 치미는 울음을 애써 삼켰다.

    "……미카엘, 우리 여행갈까?"

    "여행?"

    "예전에 그랬잖아. 책에서 본 바다 보고 싶다고. 그거 보러 갈까?"

    "진짜?"

    "물론이지."

    "와, 엄마 최고! 나 갈래! 꼭 갈 거야!"

    신이 나 품을 파고드는 미카엘을 끌어안으며 알리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카벨레누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미카엘에게 너그러웠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시간이 흐른다면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슈바르한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슈바르한에는 그들이 있었다. 설원 속에서 흉흉한 금안을 빛내며 살아가는 마물들. 그들이 있는 한, 미카엘은 슈바르한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잠깐은……. 아주 잠깐만…….'

    알리시아는 아이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혈육 간의 끌리는 무언가가 진짜 있는지 모르나, 미카엘은 자연스럽게 카벨레누스에게 이끌렸다. 그런 게 정말 혈육 간의 끌림이라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 * *

    "네 어머니가 싸준 거라고?"

    "네. 맛있어 보이죠? 내가 진짜 큰 마음 먹고 아저씨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미카엘은 으스대면서 카벨레누스에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샌드위치를 바라만 볼 뿐, 받지 않았다.

    "……네 어머니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

    "무슨 말이요?"

    "그건……."

    그때, 알리시아와 분명 시선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인기척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왜, 모른 척하는 거지?'

    카벨레누스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가 미카엘에게 접근하는 걸 원치 않았다.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면 무슨 조치라도 취했을 것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부터 받아요. 나 팔 떨어지겠어요."

    "……."

    "아저씨."

    미카엘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알리시아가 조치를 취했다고 하기엔 아이는 여전히 밝고 해맑아 보였다.

    "안 먹을 거예요?"

    "아니."

    미카엘이 손을 빼기 전에 카벨레누스가 샌드위치를 잡아챘다. 대단한 재료가 들어간 건 아니지만, 깔끔하게 재료를 쌓아 반으로 자른 샌드위치는 정갈하니 맛있어 보였다.

    "맛있죠?"

    "그래."

    "그게 다예요?"

    "그럼?"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새로운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딱히 몇 번 베어 문 것 같지도 않은데 샌드위치는 금세 사라져갔다.

    "맛있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라, 좀 더 그럴싸한 표현들이 있잖아요."

    "샌드위치가 그냥 샌드위치지."

    "그럼 먹지 말아요! 아저씨는 우리 엄마 요리를 먹을 자격이 없어요!"

    미카엘이 버럭 화를 냈다.

    "너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 보이는데."

    "아저씨 아니더라도 먹을 사람은 많거든요! 원래 크리스랑 같이 먹으라고 싸준 걸 내가 특별히 아저씨한테 준 건데……."

    미카엘은 궁시렁거리며 제 몫의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짭쪼름한 햄이며, 고소한 치즈, 새콤달콤한 토마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맛있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성의 없는 대답이라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크리스가 그때 만났던 네 친구였던가?"

    "혹시라도 걔한테 접근하지 마세요. 걔는 아저씨 이야기만 들어도 벌벌 떠니까."

    "겁쟁이로군."

    카벨레누스는 혀를 차며 새로운 조각을 집었다.

    "어쩔 수 없죠. 걘 아직 어리니까."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이대로라면 저 아저씨에게 엄마의 샌드위치를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었다.

    '확실히 아이들이 먹기엔 양이 많군.'

    카벨레누스는 아직 남아 있는 샌드위치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고작 샌드위치였지만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내에게는 그 사소함이 여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꼬마."

    "미카엘이라니까요."

    "이름이 그렇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죠. 부르라고 있는 게 이름인데."

    "……그래, 미카엘."

    눈을 부릅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미카엘에 카벨레누스는 짧게 한숨을 뱉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조그만한 생명체가 파닥거리는 게 같잖았지만, 지금은 아이의 심기를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저번에 네 아버지가 궁금하다고 했지?"

    "뭐, 여전히 궁금하긴 하죠."

    뺨에 빵가루를 묻힌 채 미카엘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

    "아빠를 보면 가장 먼저 다리를 뻥 차주고 싶거든요. 아저씨한테 훈련 받는 이유 중 하나도 그래서인데…… 잠깐,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만약에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아저씨 싫은데요."

    "……."

    "아저씨는 못됐잖아요."

    미카엘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카벨레누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아빠가 되어주겠다는 사람을 내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요."

    "……그렇게 많았나."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낮아졌지만 미카엘은 태연하게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를 집었다.

    "많았죠. 우리 엄마가 얼마나 예쁜데."

    "……."

    "하여간, 꿈도 꾸지 말아요. 나는 아저씨가 우리 아빠 되는 거 별로예요."

    썩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미카엘은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마저 샌드위치를 냠냠 먹었다.

    "내가 친아버지인지 아닌지 물어봤잖아."

    "아니라면서요. 그럼 말 다 한 거죠."

    "말을 다 해?"

    "친아버지는 좋든, 싫든 간에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양아버지는 고를 수 있는 거잖아요."

    "……."

    저 조막만한 머리통에는 도대체 뭐가 든 건지. 가만보면 생각하는 것이 참 남달랐다.

    "솔직히 아저씨가 내 아빠가 될 바에는 차라리 제임스 삼촌이 훨씬 낫죠."

    "제임스? 그 화가?"

    "어라? 우리 삼촌 알아요?"

    "아마도."

    "알면 아는 거지, 아마도는 뭐예요."

    "……."

    "또, 대답 안 하는 것 봐. 이래서 나는 아저씨가 싫은 거예요."

    미카엘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 삼촌이라는 인간은 대답을 잘해주나보지?"

    "삼촌은 천사죠."

    "천사?"

    "삼촌은 바빠서 자주 오진 못하지만, 올때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오거든요."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미카엘은 턱을 괸 채 배시시 웃었다. 제임스가 이번엔 뭘 사올지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입가가 흐물흐물해졌다.

    "그런 건 누구나 해."

    "아저씨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잖아요."

    "……."

    "솔직히 말해봐요. 어른들이 아저씨 되게 부자랬는데, 사실 아니죠?"

    동정 어린 미카엘의 시선에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알리시아를 찾는 게 중요했기에 뭔가를 챙길 새가 없었다. 기동성을 높히기 위해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최소한의 인력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여유만 있었더라면, 그깟 선물 같은 건 얼마든지 쌓아서 가져올 수 있었다.

    "뭘 갖고 싶은데? 원하는 건 뭐든 주지."

    "제가 뭘 말하든 다 줄 수 있어요?"

    "위험한 것만 제외하면."

    "거짓말."

    "그딴 걸로 왜 거짓말을 해."

    "그럼 집 사주세요. 크리스네 집보다 훨씬 큰 걸로요."

    매번 제 집이 허름하다고 혀를 차던 마렌을 떠올리며 미카엘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진짜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보다는 카벨레누스가 꼬리를 말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정작 돌아오는 대답은 덤덤했다.

    "몇 채 갖고 싶지?"

    "장난하지 말고요."

    "장난 아닌데."

    "안 속는다니까요. 아저씨가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 성. 좀 낡긴 했지만 나름 쓸 만해."

    카벨레누스는 슈바르한 성을 떠올리며 턱을 괬다. 황궁에 비해서 작은 편이긴 해도 슈바르한 성은 제국에서는 두 번째로 큰 성이었다.

    "왜 자꾸 거짓말해요."

    "거짓말 아니야."

    "그럼, 이따만큼 큰 개도 키워요?"

    "그래."

    너무 덤덤하게 대답해서 더욱 긴가민가했다. 미카엘은 고심하다가 결국 인상을 팍 썼다.

    "아저씨가 무슨 황제라도 돼요?"

    "황제는 아니고, 대공."

    "대공이 뭐예요? 높은 거예요?"

    "황제 다음이지. 일단은."

    "……역시, 거짓말이잖아요."

    미카엘이 잔뜩 실망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부유하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 어른들 이야기는 믿을 게 못 됐다.

    "뭐, 좋아요. 내가 아저씨를 돈 보고 만나는 건 아니니까요."

    "……."

    "그럼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오늘도 나뭇가지만 휘둘러요?"

    미카엘이 일어나 바지에 붙은 나뭇잎을 툭툭 털어냈다.

    "아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는 여기서 저기까지 계속 뛰고 있어."

    "아저씨가 돌아올 때까지요? 그럼, 그 동안 아저씨는 뭐하는데요."

    "사냥."

    "토끼라도 잡게요?"

    미카엘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니. 멧돼지"

    "멧돼지요?"

    "어제도 밭을 헤집어놓았더군. 귀찮은 건 일찍 치워야지."

    "아저씨, 혼자 잡아요? 다른 사람은요?"

    "고작 멧돼지 가지고. 무슨."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목덜미를 주물렀다.

    "밀런 아줌마네 남편은 밤중에 멧돼지한테 습격 당해서 몇 달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말하길 할 수 있는데 나서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할 수 없는데 나서는 건 무모한 거랬어요."

    "좋은 말이군. 마음에 품고 있어. 괜한 사고 치지 말고."

    "아니, 내가 아니라 아저씨한테 하는 말이잖아요."

    걱정해주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냈는데, 무심한 사내는 도대체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카엘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까치발을 세웠다.

    "그깟 멧돼지에게 당할 거라면 슈바르한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슈바르한의 주인이고, 뭐고 간에 위험하다니까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누가 아저씨 걱정을 한다고……!"

    미카엘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얄밉긴 해도 카벨레누스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은 한참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죽어도 멧돼지 잡으러 갈 거면 이거라도 가져가요."

    "뭐 하는 거지?"

    "우리 엄마가 만든 부적인데 잠깐 빌려줄게요."

    "……."

    "물론 완전히 주는 건 아니고, 잠깐만 빌려주는 거예요. 진짜로 아주 잠깐."

    아저씨가 다치면 내 훈련은 누가 봐줘요. 미카엘이 선심 쓰듯 걸고 있던 펜던트를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펜던트를 집어들었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펜던트는 살짝 옆을 비틀면 열리는 로켓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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