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1)화 (61/164)

61화.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20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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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152, 153……, 허어억, 헉……, 잠깐, 더, 는 못, 하겠어, 요!"

"끈기라곤 없군."

"아, 아니, 허억…… 거든요! 쉬, 었다가, 헉, 헉…… 다시 할 거예요!"

힘껏 목소리를 높였을 뿐, 미카엘은 들판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는 가쁜 숨을 내쉬는 미카엘을 흘끔 내려다봤다. 철이 일찍 들었다는 걸 감안해도 생각하는 게 여섯살치곤 지나치게 성숙한 아이였다. 몸집만 컸더라면, 더 나이가 많다 해도 믿었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미카엘은 적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제 핏줄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색이었다. 미카엘은 그때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카엘을 보고 있노라면, 종종 그 아이가 떠올랐다. 그저 원망하고 미워하기에만 급급했던 아이. 지금도 그 마음은 달라진 게 없고, 이제와서 좋은 부모 흉내를 낼 마음도 없었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필부의 삶에 물들기라도 한 건지…….'

카벨레누스가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며, 평온하고 무난한 하루를 보내는 게 전부인 곳이었다. 철 들 무렵부터 전장을 떠돌고,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했던 사내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피비린내 나는 삶을 잊고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연스럽게 날 선 감각이 누그러졌다. 모든 것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평범한 필부였다면…….'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 폰 블랑셰 슈바르한. 길고 긴 이름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그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테니까.

"아저씨, 검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카벨레누스는 어느덧 고른 숨을 뱉고 있는 소년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안 돼."

"좀 더 고민하고 대답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깟 검 보여주는 게 뭐 어렵다고. 미카엘의 두 볼이 화난 복어처럼 부풀었다.

"그야,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까."

"왜요?"

"검에 눈독 들이지 마. 검을 들어봤자, 좋은 일은 없어."

"왜 좋은 일이 없어요. 검을 드는 거 되게 멋있잖아요."

미카엘은 새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미 아이의 시선은 카벨레누스의 허리춤에 찬 검에 가 있었다.

"검을 드는 게 멋있다라, 딱 어린애가 할 법한 생각이군."

"뭐라고요?"

"괜한 환상 품지 마. 검은 멋있는 게 아니라, 그냥 무기야."

카벨레누스의 손이 무심히 검을 가렸다. 체력이나 길러줄 참이었지, 실제로 검을 가르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검이 무기라는 건 나도 알거든요."

"검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것도 알아요."

미카엘은 벌떡 일어나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소년은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제 꿈은 기사거든요. 검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기사?"

"네. 기사요. 그것도 엄청 강한 기사!"

미카엘의 목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빛나는 갑옷과 날카로운 검을 들고 적들을 모조리 해치우는 거죠. 정말 멋있지 않아요?"

"그딴 거, 하나도 안 멋있는데."

"아저씨는 멋있는 게 뭔지 모르네요."

미카엘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이지."

카벨레누스가 손을 내밀었다. 미카엘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카벨레누스의 손을 흘끔 봤다.

"갑자기 손은 왜 보여줘요?"

미카엘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카벨레누스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왜 잡는 거지?"

"손 잡고 일어나라는 거 아니었어요?"

미카엘이 눈치껏 슬쩍 잡은 손을 빼며 얼굴을 구겼다.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세상 불쾌하다는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빠졌다.

"잡으라는 게 아니라 보라는 거다."

"내가 아저씨 손을 봐서 뭐하게요. 심지어 아저씨 손, 진짜 못생겼는데."

미카엘이 얄밉게 혀를 낼름 내밀었다.

"검을 잡으면 네 손도 그렇게 될 거야."

"검 때문에 아저씨 손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

삐죽 내밀었던 작은 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쏙 입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미카엘은 마치 자기가 다치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파요?"

"지금은 안 아파."

"그래요?"

미카엘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냉정한 사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더럽게 많이 아팠지만."

"……진짜요?"

미카엘이 잔뜩 겁 먹은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지."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아픈 건 질색인데……."

"나뭇가지 몇 번 휘둘러서 오는 근육통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지. 생살이 찢어져서 피가 난 적도 있고."

"으, 싫다."

미카엘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뻐근한 근육통에 아직도 얼굴이 찡그려지는데 그보다 더 아프다니. 얼마나 아플지 감이 오지도 않았다.

"검을 든 사람에게는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야. 단순히 손뿐만 아니라, 온몸에 상처가 생길 수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지."

카벨레누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전쟁 영웅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전쟁 같은 건 모르면 모를수록 좋았다. 어설픈 동경으로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봤자, 주어지는 건 죽음뿐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면 되죠. 강한 사람은 죽지 않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어머니도 다신 볼 수 없게 되겠지."

"그건 진짜 싫은데요."

아이의 둥그스름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른 것보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어머니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면 허튼 생각은 그만 하고 너는 네 어머니나 잘 지켜. 이런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따라 가만히 제 손을 응시했다. 나탈리의 치유력조차 엉망이 된 손을 완벽하게 되돌리진 못한 탓에 사내의 손에는 그간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네가 검을 들면 네 어머니가 안 좋아할 테고."

"……."

"이미 한소리를 들었나보군."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불만스럽게 꾹 다물린 입술만 봐도 알리시아와 미카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다치는 걸 싫어하거든요. 정말이지,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애인 줄 안다니까요."

"네가 다치는 것만큼 네가 누굴 상처입히는 것도 싫어하겠지."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널 많이 아끼니까. 카벨레누스는 뒷말은 삼키며 손을 뒤로 뺐다.

"더 이야기하기 귀찮으니까 그만하지."

"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데요?"

"떠들 말이 있으면 너희 집에 가서 떠들어. 나는 네 보모가 아니야."

"……."

생각지도 못한 부정적인 반응에 미카엘의 어깨가 축 쳐졌지만 카벨레누스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아니었다. 미카엘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애쓸 이유는 없었다.

"아쉬워하지 마. 검을 들 필요가 없다면 굳이 들 필요는 없어."

"그럼 아저씨는 왜 검을 들었어요? 아저씨한테는 이유가 있었어요?"

"……약속을 했거든."

"약속이요? 무슨 약속인데요?"

"글쎄."

카벨레누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카엘은 잠자코 카벨레누스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지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치이, 또 말 안 해주는 것 봐. 내가 이래서 아저씨를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어요."

"다행이군. 나도 그렇거든."

"하여간, 못됐어."

미카엘은 콧방귀를 크게 뀌며 그대로 들판에 도로 누웠다. 푹신한 풀밭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이 퍽 예뻤다.

"그럼 이것만 말해줘요."

"뭘."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미카엘이 빤히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태양을 등진 사내는 그늘져 번쩍이는 금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눈이 제법 익숙해져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무슨 뜻으로 한 질문이지?"

"그냥 궁금해져서요. 솔직히 아저씨는 여기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 소리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요. 다들 아저씨가 귀족이라고 했고, 엄마는 도망친 애첩이라고 했거든요."

"누가 그딴 더러운 소리를 한 거지?"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피터를 보면서 얼핏 예상하긴 했지만 아이의 입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는 생각 이상으로 불쾌했다. 알리시아를 모독하는 건, 그를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에요?"

"네 어머니는 애첩 같은 게 아니야. 그녀는……."

카벨레누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뱉었다. 미카엘은 그의 반응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다가 두 손을 깍지꼈다.

"거봐요. 아닐 줄 알았어. 우리 엄마가 그럴 리 없죠. 나는 다 알거든요. 우리 엄마만큼 예쁘고 착한 사람이 없다는 거."

"……."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항상 싸우기 바빠요."

"……."

"아저씨도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엄마가 싸워야 하는 사람."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손가락만 연신 꼼지락거렸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나쁘지 않았다. 엄마 대신 싸워준 것도, 약을 가져다 준 것도,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기로 약속한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미리 말해두는 건데, 난 여전히 아빠가 필요 없어요. 아빠를 찾기에는 난 이미 다 컸거든요. 아빠를 찾는 건 원래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미카엘은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엄마를 위해서예요. 알았죠?"

"또, 무슨 허튼 소리를 하려고."

"사실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거든요."

미카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위를 향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 엄마 편이죠?"

"그래."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를 얼마든지 지켜줄 수도 있죠?"

"너랑 상관없이 지킬 거야."

"아저씨는 늘 그렇듯 말을 참 짜증나게 나네요."

미카엘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건 너도 못지 않아."

카벨레누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고 애라면서, 왜 이렇게 애한테 냉정해요."

"네가 그랬잖아. 넌 다 컸다고."

"엄마한테 이를 거예요."

미카엘이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해봐.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테니까. 오늘도 몰래 나온 거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미카엘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카벨레누스는 같잖다는 듯 대놓고 혀를 찼다.

"네가 하는 짓이 뻔하잖아."

"그런데, 왜 나랑 훈련해줬어요?"

"네가 괜한 사고 쳐서 알리시아를 곤란케 하는 것보다 내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나아서."

카벨레누스의 거만한 미소에 미카엘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나한테서 엄마 소식 들으려는 거면서. 거짓말."

"……."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저씨도 하는 짓이 뻔하거든요."

"넌, 확실히 알리시아는 닮지 않은 것 같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카벨레누스는 지지 않겠다는 듯 절 똑바로 노려보는 미카엘을 보다가 결국 인상을 팍 썼다. 미카엘은 생김새를 제외하곤 알리시아와는 사뭇 달랐다. 그 점이 새삼스럽게 거슬렸다. 아이가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면, 남은 건 아버지 쪽이니까. 카벨레누스는 치미는 질투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예 고개를 돌렸다. 저 작은 얼굴을 조금만 더 보고 있으면 유치하게 아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그곳에 남아있을 낯선 사내의 흔적을 찾게 될 것만 같았다.

"아저씨."

"왜."

카벨레누스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덕분에 사내는 미카엘이 얼마나 고심하며 말을 꺼냈는지 알지 못했다.

"있잖아요.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이요."

"말할 거면 그냥 해. 나는 빙빙 말 돌리는 거 딱 질색이야."

"……."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

재촉에도 미카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아저씨가 진짜 내 아빠예요?"

다시 던져진 물음은 아까보다 떨림이 느껴졌다.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지?"

"어른들이 그러더라고요. 아저씨가 내 친부일 거라고."

"……."

"그래서, 계속 궁금했어요. 아저씨가 정말로 내 아빠인지, 아닌지."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삼켰다. 아이는 평소처럼 뻔뻔하게 웃고 있었지만 깍지 낀 손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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