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60)화 (60/164)

60화. 어떻게 해드릴까요?

2020.09.28.

"네 어머니를 지키기에는 너무 약해 보이는데."

"그래서 강해지겠다는 거잖아요!"

"뭐, 의지는 나쁘지 않군."

카벨레누스는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미카엘에게 내밀었다.

"휘둘러."

"네?"

"매일 내가 보는 앞에서 하루에 오백 번씩 휘둘러."

"지금 나랑 장난해요?"

미카엘은 제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보면서 인상을 팍 썼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 쪽은 보지도 않으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강해지고 싶으면 군소리 말고 내가 하란 대로 해."

"……속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하긴, 그 상태로 봐선 다섯 번이라도 제대로 휘두르면 다행이겠군."

"누가 못 한다고 그래요? 할 수 있거든요!"

미카엘이 보란듯 손에 쥔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너무 힘이 들어갔어. 팔에 힘 빼고, 허리는 반듯하게 세워."

"고작 나뭇가지 휘두르는 거잖아요."

"그 고작도 제대로 못 하고 있잖아."

"그럼 어떻게 휘둘러야하는지 보여주세요. 아저씨는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봐줄게요."

미카엘이 새초롬하게 쏘아붙였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적당한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휘둘렀다.

"우와……."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탄성을 뱉었다가 급하게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아이의 뺨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로 신기했다. 고작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뿐인데,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데도 나뭇가지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했길래, 소리가 그렇게 휙휙 나요?"

"궁금하면 계속 휘둘러."

"방법을 알려줘야죠!"

"자세가 제대로 되었는지 정도는 봐줄 테니까, 요령 피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 것이 될 때까지 제대로 휘둘러."

카벨레누스는 무심히 대답한 후, 다시 도끼를 쥐었다. 미카엘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심하다가 슬쩍 카벨레누스의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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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알리시아는 빨래를 걷다가 흘러내린 붕대에 미간을 찡그렸다. 혼자서 어설프게 감은 탓인지, 붕대는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풀리곤 했다. 알리시아는 짧은 한숨과 함께,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카벨레누스가 준 약 덕분에 며칠째 계속해서 괴롭히던 통증이 금세 사라졌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사소한 도움조차 여지가 되기에 받아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시하기엔 걱정 어린 미카엘의 시선을 이길 수 없었고, 그 다음으로는 앞으로의 생활이 두려웠다. 그녀는 가장이었다.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의 입에 음식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면 자존심은 항상 뒷전이 되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계속 받기만 하면 결국 기대고 싶어질 거야.’

부러울 정도로 카벨레누스는 참 모든 게 쉬웠다. 귀족으로 살아와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그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알리시아가 낑낑대면서 겨우 고쳤던 울타리도 그는 하루아침이면 금세 고쳤고, 장작도 몇 해 겨울을 넘겨도 될 만큼 창고 가득 채웠다.

‘슈바르한에서도 그랬지.’

편안한 삶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몸만큼은 그랬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싼 향유가 매일 몇 병씩 아낌없이 쓰였고, 값을 매기기 어려운 보석들을 달았고, 손 닿으면 녹을 것 같이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 카벨레누스는 항상 최고의 것만 내주었고, 그것들에 둘러싸이다 보면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지금껏 그때의 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언제나 슈바르한이 생각났다. 이대로 슈바르한으로 도망쳐 카벨레누스의 울타리에 숨어 안락하게 지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작은 셔츠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슈바르한만큼은 안 돼. 미카엘은 괴물이 아니야.’

미카엘에게는 더는 특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지금껏 평범하게 자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알리시아! 지금 나랑 이야기 좀 해!”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노기 섞인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들고 있던 빨래통을 놓쳤다.

“부인?”

기껏 한 빨래가 바닥을 구르면서 엉망이 됐지만, 화가 잔뜩 난 마렌이 그런 걸 신경써줄 리 없었다.

“마을 물을 흐려도 유분수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세요.”

"발뺌하지마. 다 알고 왔으니까."

마렌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알리시아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알리시아는 밀린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꼬리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이제는 하다하다, 외부인까지 마을로 끌여들여서 이딴 분란을 만들어?"

마렌은 신경질적으로 삿대질을 하며 더욱 언성을 높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제 눈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아비 없는 애를 키우고 있지 않나, 마을 남자들에게 꼬리를 치지 않나, 그간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는 결국 이런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분란이라뇨.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본데—."

"오해는 무슨! 허튼 소리 그만하고 당장 이 마을에서 떠나!"

"저는 정당하게 이 집을 샀어요. 부인께서 제게 이래라, 저래라 하실 순 없어요."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해?"

"촌장님이라 해도 타인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할 순 없는 법이에요."

“이게 네 집이라는 증거가 어딨는데?”

마렌이 얄궂게 웃었다.

“뭐라고요?”

“이 마을은 대대로 우리 가문에서 촌장이 나왔어. 그리고, 어느 집 하나 우리집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집안이 없지. 이방인인 너만 제외하고 말이야.”

“…….”

"네가 이 집의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한들, 그걸 누가 들어주겠어."

마렌은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턱을 추켜올렸다. 일그러진 알리시아의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네가 마을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치고 다니는 거 다 알면서 넘어가줬어. 내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네 인생은 충분히 비참하잖아."

"……."

"하지만, 네가 내 동생에게까지 구정물을 튀기는 꼴은 못 봐. 너, 피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걔 두 다리가 몽땅 부러져서 당분간 걷지도 못해. 네 남자가 내 동생을 그런 끔찍한 몰골로 만들었다고!"

얼마나 꼴이 비참한지, 처음에는 들짐승에게 당한 줄 알았다. 겨우 졸라서 데려온 의사조차 처참한 몰골에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꼴 좋게 된 거죠."

"뭐?"

"제가 분명 수도 없이 싫다고 거절했을 때는 듣지도 않더니, 결국 그런 꼴이 되고서야 제게 찝적거리지 않게 되었잖아요."

"이봐—."

"절 쫓아내시겠다고 하셨죠? 그러면, 저도 아쉬울 거 없어요. 그동안 제가 참았던 이유가 방금 사라졌는데, 제가 왜 멍청하게 참고만 있겠어요.”

알리시아는 마렌의 손을 잡아채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하!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얌전한 척 굴면서 속내는 아주 시커멓기 그지 없어.”

마렌은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알리시아의 손을 쳐냈다.

“어디 마음껏 떠들어보세요. 어차피 늘 그래왔잖아요.”

“뭐?”

“말은 바로 하세요. 부인. 부인께서는 한 번도 넘어가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셨고, 그만큼 사소한 것 하나 제 꼬투리를 잡기 위해 전전긍긍하셨죠.”

제가 질투나서요.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렌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미쳤다고 너 같은 걸 질투해? 네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제 인생 안 비참해요.”

“…….”

“힘든 순간도 있지만, 전 제 인생이 자랑스러워요. 제가 버텨온 순간들이 지금의 미카엘을 만들었는 걸요. 제 아이가 제 인생을 말해주는데 뭐가 부끄러울까요.”

마렌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거칠게 바닥에 놓인 빨래통을 찼다. 하지만 정작 알리시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마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실이 마렌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정말, 너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구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혼자 고고한 척, 우아한 척 다 하고 다니지. 스스로가 귀족이라도 되는 양 말이야!”

“…….”

“착각하지 마. 너는 귀족이 아니야. 아비 없는 애를 혼자 키우고, 남의 남자한테 꼬리나 치는 행실 더러운 여자라고!”

마렌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예쁘장하게 생긴 것 외에는 정말로 볼 것 없는 계집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도 촌구석에서나 먹히지 공주처럼 떠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들 저 계집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고 바빴다. 밭에 거름 좀 뿌리라고 백날 말해도 듣지 않던 남편은 알리시아에겐 선뜻 거름을 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창고 정리를 매일 같이 미루던 이웃집 펜더는 자진해서 창고를 뒤져서 알리시아를 위해 모포를 가져다줬고, 남동생 피터조차 알리시아의 집 울타리를 고쳐야겠다면서 먼저 나섰다.

“고상떨지 마. 싫은 척, 아닌 척 굴면서 사람 안달나게 하는 게 네 술수라는 거 다 알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뭐?”

“제가 웃으면, 사람들은 꼬리친다고, 헤퍼 보인다고 말해요. 그리고, 반대로 차갑게 굴면, 별 것도 아닌 게 고상떤다고 말하죠.”

“…….”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제가 뭘하든 욕하고 비난할 생각밖에 없다고.”

알리시아는 헛웃음 토해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왜 절 싫어하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화낼 대상은 내가 아니에요.”

“네가 꼬셨잖아.”

“저는 수백, 수천 번 싫다고 말했어요. 거절했고, 또 거절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남편도, 동생도, 아니 그 누구도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이 화내야하는 상대는 제가 아니라, 그들이죠. 잘못한 건 그들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요. 피터를 그렇게 만든 남자에게도 이렇게 대했나요?”

알리시아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마렌을 응시했다.

“그, 그건 나중에 찬찬히……!”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조용히 넘어가겠죠. 장신에, 체격도 좋고, 심지어 돈도 많아보이는 사내에게 누가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겠어요. 특히, 그가 진짜 귀족이라면 더욱 곤란해질 테고요.”

“…….”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 건 생각 안 해보셨나요? 제가 남자를 조종해서 피터를 그렇게 만들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줄 수 있다는 거요.”

마렌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너, 지금 협박하는 거니?”

“네.”

알리시아는 피식 웃으며 빨래통을 집어들었다. 제 앞에선 그렇게 목소리를 잘도 높이더니 정작 카벨레누스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뭐? 네? 너 방금 네라고 한 거니?”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참았던 건 집 때문이었다고. 떠나게 된 마당에 무슨 짓이든 못 하겠어요.”

“…….”

“그 사람은 부인께서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높은 신분이고, 마음만 먹으면 이깟 마을 하나 없애는 것도 일도 아니거든요.”

알리시아는 어느 때보다 평온한 표정으로 덤덤히 빨래를 주웠다.

“거짓말하지 마. 그렇게 신분 높은 사람이 왜 여깄겠어.”

“뭐, 본처가 죽고 헤어진 애첩이라도 맞이하려고 왔나보죠.”

“뭐?”

“뭘 그렇게 놀라세요. 부인께서 신나게 떠들고 다니던 이야기 중 하나잖아요.”

“…….”

“부인께서 떠들고 다닌 이야기대로라면, 저는 악독하고 못되처먹은 인간이라서 얼마든지 남자를 휘두르며 패악질을 일삼아도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빨래통을 품에 안은 채,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마렌은 입 하나 뻥긋하지 못하고 애꿎은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네 말 믿지 않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인께서는 믿으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선 거짓말쟁이가 되시는 걸요.”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그 손, 함부로 휘두르시면 그 사람이 많이 화낼 거예요. 피터도 그랬거든요.”

들렸던 마렌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알리시아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멋대로 휘두른 손이 말 하나에 멈추는 게 우스웠다.

“절 쫓아내고 싶다면 어디 해보세요. 저도 제 집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할 테니까.”

“…….”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잖아요.”

알리시아는 유유히 빨래를 거둔 채,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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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부 다시 빨아야겠네."

알리시아는 엉망이 된 옷들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기껏 해놓은 빨래가 수포로 돌아간 게 안타까웠지만 오염이 심해 옷을 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번거롭더라도 새로 깨끗하게 빠는 편이 나았다.

"비누가 여기 어디 있었…… 크리스?”

알리시아가 창고 틈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크리스를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너, 여기서 뭐하니?"

"엄마가 화내는 게 보여서…….”

“아…….”

“우리 엄마가 또 아줌마한테 화냈어요?”

크리스가 울상을 지으며 훌쩍거렸다.

“아니야. 그냥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야.”

“그치만, 엄마는 항상 아줌마한테 이상한 말을 하잖아요. 저번에도 엄마가 했던 말을 미카엘에게 알려줬더니 미카엘이 화를 내기도 했고…….”

“그건…… 으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었다. 애당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고심하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마침 그녀는 아이의 관심을 돌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 아줌마가 구운 쿠키 먹을래?”

“……쿠키요요?”

“마침 어제 구운 쿠키가 남아 있거든.”

“그럼 미카엘이랑 같이 먹을래요!”

크리스가 반색하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좋은 생각이네. 그럼 아줌마가 준비하는 동안, 미카엘 좀 불러와줄래.”

“미카엘, 집에 없어요?”

“당연히 없지. 너랑 논다고 아침 일찍부터 나갔는 걸.”

"저랑요? 저는 미카엘이랑 만나려고 온 건데요?"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리시아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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