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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59)화 (59/164)
  • 59화. 수고했어

    2020.09.24.

    쿵-! 목덜미가 잡힌 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으, 으…… 흡!"

    피터는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려다가 마주친 흉흉한 금안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죽는다.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사, 살, 려-."

    "한 마디도 하지 마. 그 역겨운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었다간 이대로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피터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반항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잔뜩 힘이 풀린 다리 사이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살기등등한 사내가 얼마나 흉포해 보이는지 눈빛만으로도 제 몸을 넝마처럼 찢어놓을 것 같았다.

    "괜찮나."

    카벨레누스는 애써 분을 삼키며 알리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감정이 들끓는 눈은 사냥을 앞둔 짐승처럼 날 서 있었지만, 정작 알리시아를 살피는 손길은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다쳤군."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발갛게 부어오른 알리시아의 손목을 향했다. 그는 짧게 숨을 토해내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미카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낯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너는 네 어머니와 함께 있어."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피터의 옷깃을 쥐었다.

    "컥, 컥!"

    피터는 졸린 목에 켁켁거리며 버둥거렸지만 카벨레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손으로 달랑 들린 몸이 바람결에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미카엘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려진 시야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보지 마. 미카엘."

    "왜?"

    "네가 볼 만한 게 아니야."

    알리시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미카엘은 엄마의 손을 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손끝에 닿은 엄마의 손목은 굳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 * *

    "엄마, 아파?"

    "아니. 안 아파."

    "거짓말."

    "왜 엄마가 미카엘에게 거짓말을 해."

    알리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엄마는 항상 그러잖아. 늘 괜찮다고만 해. 나한테는 아픈 거 참지 말라고 해놓고는."

    "……."

    "나도 엄마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그랬잖아. 아프다고 말해야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거라고."

    미카엘은 두 팔을 벌려 알리시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렇게 아프지 않아서 그래. 자고 일어나면 금방 나을 거야."

    "……정말?"

    "물론이지."

    "그럼 내일 확인할래. 그리고 여전히 아파 보이면 같이 의사 아저씨한테 가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알리시아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이의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환경 탓인지, 아이는 너무 철이 일찍 들어버렸다. 어설프게라도 어른 흉내를 내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 편이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천천히 어른이 되면 좋겠는데."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균일하게 들리자,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잠이 든 미카엘을 침대에 제대로 눕혔다. 부은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아이의 얼굴을 보니 참을 만했다. 마을에는 의사가 없어 치료를 받기 위해선 떨어진 옆 마을까지 가야만 했을 뿐더러, 의사에게 낼 진료비도 만만치 않았다. 제임스에게 물건 대금을 받기 전까지는 당분간은 생활비가 빠듯했다. 아낄 수 있는 지출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다. 알리시아는 부은 손목을 모른 척하며 조심스럽게 1층으로 내려왔다.

    '……괜찮으려나.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창밖을 확인했다. 벌써 밖은 어둑해졌지만 카벨레누스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내 선에서 정리했어야 했는데.'

    알리시아는 힘없이 창문에 이마를 댔다. 서늘한 밤공기가 유난히도 차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계속 그러고 있기에는 밤공기가 찬데."

    "……언제 오신 거예요."

    "한참 전에."

    "그러면 부르기라도 하시지."

    "내가 온 걸 그대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딱 다섯 걸음. 그만큼만 떨어진 거리에서 카벨레누스가 옅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말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사내의 얼굴은 잘 보였다. 심지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전부.

    "왜 끼어드신 거예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알아."

    "안다고요?"

    알리시아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잠깐으로 그대의 삶을 전부 엿볼 순 없다는 거 알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대의 지난 시간이 버거웠을 거라는 게 너무 잘 보여서."

    "……."

    "처음에는 화가 났어. 그대가 여전히 내 옆에 있었더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 테니까. 누구보다 좋은 옷, 음식,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최고의 것들로 그대를 채워줬겠지."

    "……."

    "하지만, 그랬다면 그대는 오늘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했겠지.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어. 내가 당신이 겪은 버거운 순간들에 화를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던 여자는 너무도 작고 연약했다. 제 목소리 하나 내는 것도 버거워 눈치를 보고 많은 걸 생각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었고 자연스레 걱정도 많아졌다.

    "모르코 부인이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그대는 약하지 않다고."

    "……."

    "이제야 그 말이 좀 이해되는 것 같아. 왜 그녀가 그런 소리를 했었던 건지."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날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과거를 끄집어내봤자, 겨우 정리했던 미련만 되살아날 뿐이었다.

    "발악한 것뿐이에요. 그렇게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들 너무 쉽게 보니까요."

    "그래서 결국 이겨냈잖아."

    "……."

    "수고했어, 정말로."

    덤덤하게 내뱉어진 목소리에 눈가가 시큰거리는 건 왜일까. 알리시아는 어두운 밤에 제 표정이 보이지 않길 바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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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전하를 기다린 건, 피터 때문인걸요. 걘 촌장님의 아들이고 혹시라도 문제라도 생기면, 저는……."

    길어지는 변명에 알리시아는 결국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토해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데, 그걸 뱉으면 꾹꾹 눌러두었던 마음이 튀어나올까 차마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변함없이 제게 꽂힌 시선에 목이 멨다.

    "죽이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라고 해서 늘 사람을 죽이진 않아."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라-."

    "미안해."

    그런 모습 보여서. 카벨레누스의 사과에 알리시아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피비린내 나던 첫 만남이었고, 그가 살육귀라 불린다는 것도 서로가 뻔히 다 아는 사실인데 이제와서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모습은 이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알리시아는 창틀을 꽉 쥔 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을 신경쓰셨다고요."

    "……."

    "이제와서 약한 척 굴지 마세요. 전하께서는 자기 자식도 버리실 정도로 비정한 분이시잖아요."

    "……."

    "이번에 조금 도와준 걸로 괜히 생색낼 생각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그런다 해도 제 입장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세요."

    괜히 못된 소리만 듣지 마시고요. 알리시아는 마지막 말은 하지 못한 채, 창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러고는 뒤돌아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덧 치맛자락에는 떨어진 눈물에 하나둘 얼룩이 지고 있었다. * * *

    "엄마?"

    "……미카엘?"

    알리시아는 유난히도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려 미카엘을 살폈다. 미카엘은 아이와 어울리지 않는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자?"

    "아, 그게 엄마가 너무 피곤해서……."

    "나한테는 바닥에서 자면 큰일난다고 했으면서."

    "미안해."

    어제 그렇게 울다가 그대로 지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미간을 찡그렸다.

    "엄마, 아파?"

    "아니야. 안 아파."

    "그치만 손목이 어제보다 더 부었는 걸."

    "아침이라서 그래. 금방 좋아질 거야."

    알리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카엘 앞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손을 저을 때마다 미약하게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카엘, 조나 아줌마네 가서 우유 좀 받아올래? 엄마가 아침에 팬케이크 구워줄게."

    알리시아는 미카엘에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러고보니 어제 쿠키를 굽느라고 계란도 다 썼는데 그것도 받아다주면……"

    미카엘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어투로 창문을 열던 알리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창가에는 작은 통과 함께 붕대가 놓여 있었다. 알리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통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통 안에서는 예전에 맡아보았던, 싸한 냄새가 났다. 슈바르한의 약이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카벨레누스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제 밤에 왔던 건…….'

    알리시아는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혹시라도 자신을 두려워할까봐, 멀찍이 서서 절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엄마, 왜 그래? 울어?"

    미카엘이 걱정스럽게 알리시아의 품을 파고 들었다.

    "엄마아, 울지 마. 미카엘이 여기 있으니까 울지 마. 응?"

    "흐읍, 흑……흑, 흑……."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미카엘을 힘껏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되뇌면서도 한 번 터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카벨레누스를 상대하는 건 손잡이 없는 칼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상처 입히려고 휘둘렀는데 휘두를 때마다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갈 뿐이었다. * * *

    "인정할게요."

    "뭘."

    "내가 약하다는 말."

    미카엘은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턱을 추켜세웠다.

    "그런 걸 굳이 인정해야 하나. 딱 봐도 약하잖아."

    "아저씨는 매번 말을 참 짜증나게 해요. 혹시 우리 엄마한테도 이런 식으로 말해요?"

    "그럴 리가."

    "그런데 나한테는 왜 그래요?"

    "말했잖아. 난 널 싫어한다고."

    카벨레누스는 변함없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혹시 어제 일로 겁 먹었을까 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해맑기만 했다.

    "내가 왜 싫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내가 엄말 꼭 빼닮았다고 말하는데."

    "안 닮았어, 하나도."

    "아니거든요! 닮았거든요! 내가 세상에서 우리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요!"

    "착각은 자유지."

    차라리 얄궂게 웃기라도 하면 웃으며 넘길 수 있겠는데, 표정 하나 없이 덤덤하게 말하니까 더 불쾌하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다리를 흘끔 봤다가 며칠 전의 참사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만 삐죽 내밀었다.

    "참내, 누군 아저씨가 좋은 줄 알아요? 나도 아저씨 싫거든요."

    "그러면 적당히 귀찮게 하지 그래."

    카벨레누스는 주워온 장작을 바닥에 쌓으며 도끼를 집어들었다. 다른 집들은 겨울 준비를 한다며 장작을 쌓기 시작하는데, 알리시아의 집만 영 허술했다. 나름대로 장작을 모아놨다 해도 잔가지들만 쌓아놨으니 금방 써버리고 말 것이었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하루라도 알리시아를 추운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사내가 기억하는 여자는 유난히도 추위에 약했다.

    "나도 아저씨한테 이런 소리 하기-."

    퍽!

    "그런데 내가 부탁할 만한 사람이-."

    퍽!

    "조금만-."

    퍽!

    "장작 좀 그만 패고 내 말 좀 들어줘요!"

    참다 못한 미카엘이 신경질적으로 쿵쿵 발을 굴렀다.

    "너랑 쓸데없는 수다 떨 바에는 장작을 패는 쪽이 유익하지."

    카벨레누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끼를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것 같았는데도 날이 닿자마자 두꺼운 나무 장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엄마가 울었어요."

    "……."

    엄마 소리에 귀신같이 멈춘 도끼질이 얄밉지만 부탁할 사람이 카벨레누스밖에 없었다. 미카엘은 미래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강해지게 만들어주면 안 돼요?"

    "네 어머니가 운 것과 네가 강해지는 게 무슨 상관이지?"

    "우리 엄마는 아파도 내 앞에서는 아프다고 안 하거든요. 잘 울지도 않아요."

    "……."

    "그런데 아저씨가 오고서 엄마는 잘 울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짜증나는데, 한편으로는 부러워요. 아저씨는 엄마를 참지 않게 하는 사람이잖아요."

    순간적으로 카벨레누스는 목울대가 떨렸지만, 미카엘은 아무것도 모른 채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그랬어요. 참으면 병이 난다고. 그래서 난 항상 엄마가 참지 말았으면 하는데, 엄마는 항상 나 때문에 참아요. 엄마는 날 항상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나도 이제 다 컸는데."

    "……."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려고요. 엄마가 깜짝 놀랄 만큼 강해져서 엄마가 나 때문에 참지 않게 만들 거예요."

    미카엘은 까치발까지 세워가면서 나름 카벨레누스와 시야를 맞추려고 애썼다. 티끌 하나 없이 말간 아이의 눈동자가 태양 아래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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