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58)화 (58/164)
  • 58화. 내 탓은 없어

    2020.09.21.

    "왜, 왜 그렇게 봐요?"

    처음 느껴보는 살벌한 시선에 미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쿠키를 힘주어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괴물 같단 소리를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그녀와 닮은 얼굴을 한 아이가 내뱉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뭘 보냐니까요?"

    겁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미카엘은 더욱 크게 목소리를 냈다. 카벨레누스는 털을 잔뜩 부풀린 고양이처럼 경계가 그득한 미카엘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가까이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동공이 도드라진 길게 찢어진 눈을 제대로 마주하고서야 눈도 못 마주치겠다는 크리스의 말이 비로소 이해됐다.

    "하나씩 뜯어보면 그렇게 닮은 것도 아닌데.“

    "……."

    "……됐다. 애당초 애 하나를 두고 뭐하는 짓인 건지."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아이의 얼굴을 뜯어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알리시아를 설득하는 것이었고 아이는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수단에게 감정을 부여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들끓는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애당초 카벨레누스에게 미카엘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지워내기라도 하듯 다시금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이제와서 이런 생각하는 게 우스웠지만, 아이가 알리시아를 닮았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너, 혹시-."

    "미카엘! 미카엘! 크, 큰일 났, 히익!"

    "크리스?"

    저 멀리서 뛰어오던 크리스가 카벨레누스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저거, 네 친구인 것 같은-"

    "아저씨는 얼른 저리 가요! 아저씨가 무섭게 생겨서 크리스가 겁 먹었잖아요!"

    "꼬마, 너는 정말-"

    "아저씨는 얼른 집으로 가버려요!"

    미카엘을 아까의 울분까지 함께 담아 카벨레누스를 크게 소리친 다음, 곧장 크리스에게로 달려갔다. 크리스는 이미 한껏 놀라 벌써부터 울먹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크리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아줌마랑 우리 외삼촌이……!"

    "아줌마? 우리 엄마?"

    "알리시아에게 무슨 일이-"

    "히이익!"

    갑자기 끼어든 카벨레누스에 크리스가 기겁하며 물러나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에게 짜증을 토해내며 크리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 진짜! 아저씨는 그만 집에 좀 가라니까요! 얘 완전 겁 먹었…… 어? 크리스? 크리스?!"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미카엘은 기절한 크리스에 헛웃음을 토해내며 카벨레누스를 흘겨봤다.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쏟아지는 시선을 슬쩍 회피했다.

    16638394110973.jpg

    * * *

    "그래서, 그 남자는 누군데?"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알리시아는 대꾸하며 양동이를 찾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제 물을 다 써서 새로 물을 길어와야 했는데 이미 양동이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 짓인지는 뻔했다.

    '분명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알리시아는 판자가 덧대진 창고 지붕을 바라보며 치맛단을 꽉 쥐었다. 카벨레누스가 마을에 머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집 어디 하나 사내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키가 닿지 않아 아쉬운 소리라도 하며 사다리를 빌려와 수리해야겠다 생각했던 창고 지붕도 어느덧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그냥 아는 사이인데 집도 고쳐주고, 울타리도 고쳐주고 다 해? 솔직하게 말해봐. 그 자식이랑 너 무슨 관계야."

    알리시아의 정신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피터가 그녀의 시야가 막아섰다.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피터를 마주봤다.

    "그 자식이라니, 말 조심히 하세요.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사람 아니에요."

    "거 봐, 발끈하는 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네가 이렇게 나와?"

    "설령 제가 그 사람과 무슨 사이라고 해도 그게 그쪽과 무슨 상관이죠?"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잔뜩 노한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피터가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전 분명 말했어요. 미카엘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당신에게 줄 마음은 한 조각도 없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그러면 이대로 미카엘을 아비 없는 애로 키울 거야?"

    "……."

    "솔직히 지금이야 애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가서도 애가 아빠를 안 찾을 것 같아?"

    "그거야말로 그쪽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알리시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다른 것도 아니고 네 일인데."

    "맞아요. 제 일이에요. 그쪽 일이 아니라, 제 일."

    "언제까지 내게 쌀쌀맞게 굴 참이야?"

    피터는 꿀꺽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알리시아 쪽으로 몸을 붙여왔다. 사내의 끈적한 시선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노골적이었다.

    "빼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자꾸 이러면 예쁘게 봐주는 것도 정도가-."

    찰싹- 슬쩍 다가오던 피터의 손이 알리시아의 제지에 어설프게 허공에서 멈췄다. 알리시아는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며 팔짱을 꼈다.

    "당신이야말로 적당히 해요. 당신 아버지 얼굴을 봐서 참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요."

    "너, 진짜……."

    "입 아프게 계속 말하게 하지 마세요. 전 이미 입장을 분명히 했고 바꿀 생각 없어요."

    차갑게 식은 시선에선 일말의 틈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피터는 애써 알리시아의 눈을 똑바로 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그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게 앙칼진 게 네 매력이기도 하니까."

    "하……."

    "헛소리라고 치부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은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 안 해요."

    "말 안 하면 네가 몰라주잖아."

    "몰라주는 게 아니라, 그냥 알고 싶지 않은 거죠. 전 당신과 잘해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으니까요."

    "……그럼 그 자식은? 그 자식이랑은 잘 해볼 마음이 있고?"

    "여기서 그 사람 이야기가 왜 나오죠?"

    알리시아는 치미는 분을 삼켜내며 눈을 찡그렸다. 마을에 정착한 지 벌써 2년이 넘어감에도 알리시아 모자는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분란을 일으키는 것 좋지 않았고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또래 친구도 사귀면서 마을에 익숙해지고 있는 미카엘에게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시킬 순 없었으니까.

    "맞네! 맞아! 그 자식이랑 잘 해볼 참이었던 거야. 그래서 내게 이렇게 쌀쌀맞아지고, 내겐 죽어도 못 하게 했던 집 수리도 다 시키고."

    "자꾸 이러시면 저도 더는 못 참아요."

    "네가 못 참으면 어쩔 건데?"

    "……."

    "네가 지금껏 우리 마을에 어떻게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다 우리 아버지랑 널 잘 봐준 내 덕분이지."

    피터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알리시아 쪽으로 몸을 붙였다. 처음에는 그저 곱상하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눈길이 가는 여인은 쉽게 넘어오지 않아 더욱 매력적이었다.

    "솔직히 너랑 내 조건만 놓고 생각해봐. 이거 내가 엄청 손해 보는 거야. 애 딸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애를 키워주기까지 하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

    "자존심만 내세우지 말고 현실을 보라니까? 언제까지 낡디 낡은 옷만 입고 다닐 건데? 나랑 결혼하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잖아."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만 돌아가세요."

    알리시아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굳이 피터가 저러지 않아도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했다.

    "……설마 벌써 그놈이랑 잤어?"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놈이랑 잔 거 맞지?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피터가 거칠게 알리시아의 손목을 잡아채 억지로 몸을 돌리게 했다. 알리시아는 조금도 지지 않고 이를 악 문 채 피터를 노려봤다.

    "말조심하세요."

    "그놈이 널 아내로 맞이하기라도, 아니. 설마 그놈이야? 그놈이 미카엘 친부라도 돼?"

    "괜한 소리 하지 마세요."

    "첩을 데리러 온 걸 보니 본처라도 죽었나 보지?"

    "제발, 적당히 하라고요!"

    알리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피터를 거칠게 밀어냈다. 얼마나 세게 잡힌 건지, 그녀의 손목에는 이미 손자국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빼는데? 어차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알리시아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거지."

    피터는 짐짓 모른 척 웃으며 알리시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좀 더 지켜보면서 공을 들일 생각이었는데, 웬 낯선 사내 놈이 나타나 괜히 초조해졌다.

    '그딴 겉만 번지르한 놈에게 빼앗길 순 없지. 내가 이 계집한테 공들인 게 몇 년인데.'

    요 며칠 간 알리시아의 오두막을 맴돌던 카벨레누스를 떠올린 것만으로 피터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순서를 무시하고 자신이 공들이던 여인을 앗아가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무슨 기사라도 되는 양 그녀의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꼴이 같잖았다.

    "잘 생각해. 그놈이 진짜 귀족이라 해도 네 인생이 필 것 같아? 애까지 가져놓고 이런 시골까지 도망쳐온 거 보면 뻔하잖아. 그 자식한테 너는 그냥 장난감이야. 잠깐 가지고 논 거지."

    "당신이 뭘 안다고."

    "사내놈들 습성이 다 거기서 거기지. 특히나 귀족놈들은 더해."

    "……."

    "나는 달라. 다른 놈들과 달리,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아끼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내놈 씨까지 품어주겠단 소리를 하겠어?"

    피터의 손이 알리시아의 뺨을 쓸었다. 카벨레누스가 하도 자리를 비우지 않아 이제야 겨우 얻은 기회였다. 이 김에 확실하게 알리시아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옆에 낀 채 오만방자한 귀족 놈의 콧대를 콱 꺾어줄 필요가 있었다.

    "사랑해, 알리시아. 나랑 결혼하자."

    "절 정말 사랑해요?"

    "당연하지. 말했잖아. 나는 다른 남자와는 다르다고."

    "……다르다고요? 헛소리도 정도껏 하셔야죠."

    알리시아가 차갑게 피터의 손을 내쳤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며 구애하던 피터가 최근 들어 오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뭐? 헛소리?"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인간이 하필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나타났어. 이걸 내가 우연이라고 생각해야 해?"

    "당, 당연히 우연이지! 내가 왜 그 자식 눈치를 보겠어?"

    피터가 말을 더듬으면서 오히려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이 같잖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그게 우연이라면 어디 증명해봐. 지금이라도 그 사람을 똑바로 보고 날 사랑한다고 지껄여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데?"

    "당연히 못 하겠지. 그 사람은 만만하지 않고, 나는 만만하니까. 내게만 그러는 거잖아."

    알리시아가 눈에 바짝 힘을 주고 성큼 한 걸음을 디뎠다. 미카엘을 키우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 여자 혼자 애를 키운다고 만만하게 보며 찝쩍거리는 놈들은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널 위한다, 사랑한다 말로 쉽게 지꺼리면서도 정작 보이는 행동에선 제대로 된 애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쉬워보이기에 가볍게 찔러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거 알아? 네 누이는 나와 미카엘에게 항상 화가 나있어. 혹시라도 너랑 내가 잘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거지."

    "누나는 그저-."

    "그뿐인 줄 아니? 다들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기 바쁘지. 남자들은 어떻게서든 나와 한 번 해보려고 나를 싸구려 여자로 만들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에 대한 화를 내게 풀기 바빠. 그게 내 인생이야."

    "그런 건 나랑 결혼하면 다 해결돼. 다들 네가 혼자니까-."

    "그래서 내 탓이라고?"

    알리시아는 짧게 조소한 다음, 곧장 말을 이었다.

    "아니. 거기에 내 탓은 없어. 나는 한 번도 부끄러운 짓 해본 적 없고,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

    "미카엘에게 아버지가 없어서 걱정이라는 소린 다신 하지마. 내 최선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인간이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될 바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테니까."

    알리시아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날카로운 말들을 전부 토해냈다. 피터는 턱에 힘을 주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침전물이 켜켜이 가라앉은 양 어두워진 잿빛 눈동자에 목덜미가 서늘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봤자, 돈 많은 놈이 결혼하자고 하면 냉큼 할 거면서."

    "뭐?"

    "고결한 척 굴지마. 결국 네가 이러는 것도 돈 많은 사내 놈 등에 업고서 목소리가 커진 것뿐이잖아."

    "나는 계속 싫다고 거절했어. 그걸 무시한 건 너고."

    "내가 언제 무시했는데? 솔직히 네가 흘리고 다닌 거잖아? 누가 창부 출신 아니랄까 봐, 사내만 보면 눈웃음 치는 습관이 있어서는……."

    "누가 창부라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너지. 내게 모를 것 같아? 다들 그 이야기 해. 곱상한 계집 하나한테 귀족 사내들이 줄줄이 달라붙어 매달리는데, 그 정체가 뭐겠냐고. 귀족만 상대하는 고급 창부일 게 뻔하다고."

    "너, 진짜……."

    "괜찮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서로 서운한 점은 전부 잊고 우리 천천히 이야기를……."

    피터가 다시 목소리를 누그러트리며 알리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 순간, 거칠게 목덜미를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이 없었더라면.

    1663839411097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