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57)화 (57/164)
  • 57화. 나는 아저씨가 싫어요

    2020.09.17.

    "나는-."

    "우리 엄마 좋아하지 말아요. 나는 아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

    "내겐 엄마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 빼앗아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쪼그만 아이 주제에 눈빛이 제법 강단 있다.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미카엘을 바라봤다. 그녀를 쏙 빼닮은, 그러나 반은 다른 남자의 피가 섞인 아이.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의 존재는 불쾌할 뿐이었다. 알리시아가 소중하게 여기지만 않았어도 엮일 일은 없었다.

    "빼앗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빼앗을 생각인데."

    카벨레누스는 얄궂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지금으로선 아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심술을 내비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 방금 아저씨가 완전히 싫어졌어요."

    "나는 처음부터 네가 싫었다만."

    "내가 왜 싫은데요?"

    "네가 내 것을 앗아갔으니까."

    카벨레누스는 무심한 시선으로 미카엘을 위아래로 천천히 살폈다. 얼핏 봐도 사랑받고 자란 아이에겐 객관적으로 모난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구김살 없는 미소가 퍽 예뻤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여자의 푸석해진 머리카락이, 통통한 뺨을 볼 때면 여자의 핼쑥한 뺨이, 부드러운 손을 볼 때면 여자의 망가진 손이 떠올랐다. 아이는 여자를 영양분 삼아 자라난 기생충 같았다.

    "나는 아저씨 걸 빼앗은 적이 없어요."

    "빼앗았어, 그것도 가장 소중한 것을."

    "그럼, 그거 돌려주면 우리 엄마, 안 빼앗아갈 거예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보자, 스스로가 얼마나 유치하게 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카벨레누스는 쯧, 혀를 찬 후에 대답 없이 망치를 집어들었다.

    "왜 대답 안 해요!"

    "……."

    "아저씨!"

    "……."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튀어나온 나무 판자를 그대로 뜯어내고 새 판자를 덧대 망치질을 했다.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걱정될 정도로 엉망이라 손볼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낑낑거리며 고생하는 걸 보기보단 자신이 한 번 더 움직여 그녀가 할 일들을 모조리 없애두는 편이 나았다.

    "진짜, 아저씨는 이상해요."

    "……."

    "지금도 대답 안 해주고."

    미카엘은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누군가 자신을 대놓고 싫다고 말하는 건 처음이라 괜히 기가 빠졌다.

    "됐어요. 나도 아저씨랑 말 안 해요. 누가 아쉬울 줄 아나."

    미카엘은 카벨레누스를 등진 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가 뭘 빼앗았어요?"

    "말 안 한다면서."

    "안 할 거예요."

    딱, 그것만 알고. 미카엘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벨레누스는 마저 못질을 하다가도 동글동글한 아이의 머리통을 흘끔 봤다.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 수 있는 것 같은 하찮은 생명체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네가 올해 여섯 살이라고 했던가?"

    "그건 왜 물어요?"

    "너무 작아 보여서."

    "……."

    아이를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카벨레누스의 눈에 비친 미카엘은 유독 작아 보였다. 떠나기 전, 가제프도 여덟 살은커녕 다섯 살 정도로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곧 클 거예요. 그것도 아저씨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자존심 상한 아이의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물드는 걸 보니 자제하려고 했던 심술이 다시금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마지막 못질을 했다.

    "그건 무리일 것 같은데."

    "왜요?"

    "나중에 키가 컸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나는 그 나이 때도 컸거든."

    "늦게 크는 사람도 있다고 엄마가 그랬거든요!"

    "말끝마다 엄마, 엄마거리는 걸로 봐선 확실히 애는 애군."

    미카엘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은 후, 흩어진 장비들을 정돈했다. 미카엘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아저씨!"

    "왜?"

    "애랑 싸워서 이겨서 좋아요?"

    얄밉게 혀를 낼름 미는 미카엘에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굳었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쪼르르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고작 앞에 섰을 뿐인데, 드리워진 그늘에 괜히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말 안 할 테니까 잘 들어요. 나는 아저씨가 싫어요. 그것도 무지무지."

    "……."

    "우리 엄마한테 손 하나 까딱하면 내가 가만 안 있어요. 알았죠?"

    "참, 무섭군."

    카벨레누스는 새삼스레 성가시다는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왜, 대답 안 해요?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하란 말이에요!"

    "내가 왜?"

    "아저-"

    "미카엘!"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 카벨레누스와 미카엘,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알리시아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 엄, 히끅-!"

    미카엘은 처음 보는 엄마의 표정에 놀라 딸꾹질을 반복했다. 알리시아는 빠르게 주변을 확인한 후, 곧장 다급하게 달려와 미카엘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미카엘? 어디 안 다쳤어?"

    "나, 괜, 히끅! 흑!"

    "엄마 왔으니까,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상태를 살피자마자, 도로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이의 등을 다독이는 그녀의 손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알리시아."

    "이제 그만 돌아가주세요."

    "나는 그저……."

    "말씀드렸잖아요. 도움 같은 거 필요없다고."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에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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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엄마, 사실 내가 그 아저씨한테 먼저 말 건 거야."

    "네가?"

    "응. 그러니까, 그 아저씨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미카엘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카벨레누스가 밉긴 했지만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미안해. 엄마가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

    "……."

    "아냐. 엄마가 더 미안해. 엄마가 순간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

    알리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이에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카엘과 카벨레누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순간 정신이 훅 나가버렸다. 카벨레누스와 달리, 미카엘은 너무도 작고 연약했다.

    "지금이라도 아저씨에게 사과해야겠지?"

    "사과는 엄마가 대신 할 테니까, 다신 그 아저씨랑 둘만 있지마."

    "하지만, 엄마가 그 아저씨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미카엘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잔뜩 굳은 알리시아의 표정에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

    "나는 그냥……."

    숙여진 고개가 안쓰럽다. 알리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참아내며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엉겨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에 놀란 가슴이 그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니야. 엄마가 이상한 소리해서 미안해. 엄마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예민하게 굴었나봐. 신경 쓰지 마. 알았지?"

    알리시아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른들의 문제로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 어디 아파?"

    "조금 쉬면 금방 나아질 거야."

    알리시아가 웃자, 미카엘의 표정도 금세 풀렸다.

    "그것보다 오래간만에 쿠키 구우려고 하는데, 미카엘이 도와줄래?"

    "쿠키?"

    "미카엘이 좋아하는 피넛이랑, 버터 쿠키 잔뜩 구워줄게. 어때?"

    "좋아! 대신, 내가 쿠키 모양 찍을래!"

    "물론이지. 미카엘이 도와주면 쿠키가 훨씬 맛있어질 거야."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흘끔 창가를 바라봤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여전히 사내가 있을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 * 불쑥 내밀어진 작은 손에 카벨레누스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작은 손의 주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지를 든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끌려고 애썼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사과하려고요."

    "사과?"

    "미안해요. 그때, 아저씨 편 못 들어줘서."

    "……."

    "내 사과, 안 받아줄 거예요?"

    미카엘이 한 번 더 손에 쥔 봉지를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봉투 틈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버터 내음에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과자는 안 먹는다만."

    "이건 보통 과자랑은 달라요."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데."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우리 엄마가 만든 건 다르거든요?"

    미카엘은 덩달아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눈에 바짝 힘을 줬다.

    "……알리시아가 직접 만들었다고?"

    "아저씨가 뭔데, 우리 엄마 이름을 멋대로 불러-, 아! 왜 멋대로 가져가요!"

    "나 주려고 가져온 거라면서."

    카벨레누스는 빼앗긴 봉지를 도로 빼앗기 위해 깡총깡총 뛰는 미카엘을 무시하며 봉지를 열었다. 미카엘은 몇 번 더 제자리에서 뛰다가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걸 깨닫고 애꿎은 눈에만 바짝 힘을 줬다.

    "과자는 안 먹는다면서요."

    "이건 예외."

    "아, 괜히 가져왔어!"

    미카엘은 요란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토하다가도 봉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카벨레누스에 슬쩍 눈을 돌렸다. 잿빛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가 그득했다.

    "맛있죠?"

    "아직 먹지도 않았다만."

    "아저씨는 왜 그렇게 말을 못되게 해요?"

    "네가 싫어서."

    "나도 아저씨 싫거든요! 진짜 괜히 왔어!"

    엄마한테 혼날 각오까지 하고 온 건데 미안했던 마음이 싹 가신다. 미카엘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팔짱을 단단히 꼈다. 사과도 사과지만, 오늘 온 목적을 사내에게 확실하게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혹시나해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착각하지 말아요. 내가 오늘 온 건 아저씨가 좋아서가 아니에요. 수상쩍은 아저씨를 감시하려고 온 거죠."

    "감시?"

    네까짓 게? 확연하게 드러난 깔보는 시선에 미카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표정 없는 무뚝뚝한 아저씨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보니 아주 못되처먹은 인간이었다.

    "잘 들어요. 우리 엄마는 아저씨를 싫어해요."

    그것도 무지무지. 미카엘은 뒷말을 특히나 힘줘서 발음하며 턱을 빳빳하게 추켜올렸다.

    "나는 앞으로 아저씨한테서 내가 우리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우리 엄마 편이니까요. 내가 우리 엄마를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우리 엄마 그만 괴롭히고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요."

    "싫다면?"

    "싫으면 저랑 싸우는 거죠."

    "너 같은 꼬마랑 싸워봤자,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 꼬마 아니거든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나름 무서운 표정으로 경고했는데 딱히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미카엘은 슬쩍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보곤 가슴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정작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이 그러든, 말든 간에 봉지를 열었다. 잘 구워진 쿠키에선 진한 버터 내음이 났다. 바삭-

    "맛있죠?"

    쿠키를 제대로 씹어 삼키기도 전에 미카엘이 물어왔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입안에서 부서지는 쿠키를 음미하듯 천천히 씹었다.

    "진짜 맛있죠?"

    참지 못한 미카엘이 다시 물었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슬쩍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입안에 퍼진 고소한 피넛과 버터향은 나쁘지 않았지만, 솔직히 썩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아이의 입맛에 맞춘 쿠키는 단 것을 즐기지 않는 사내에겐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우리 엄마가 만든 게 맛없다고요? 거짓말."

    "내 취향은 아니야."

    "그럼 먹지 말고 돌려줘요!"

    "싫은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쿠키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두 번째 쿠키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입맛에 맞진 않았지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맛없다면서 먹는 건 무슨 심보예요?"

    "맛없다곤 안 했어. 취향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지."

    "그게 그거죠."

    "다르지."

    "지금 나랑 장난해요?"

    미카엘은 이를 박박 갈다가 절 무시하는 카벨레누스에 슬쩍 못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치껏 카벨레누스의 뒤로 가 있는 힘껏 그의 종아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악!"

    카벨레누스의 다리를 걷어차자마자, 미카엘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아 제 다리를 감쌌다.

    "혼자서도 잘 노는군. 혼자 내버려둬도 심심하진 않겠어."

    카벨레누스는 새삼 귀찮다는 얼굴로 남은 쿠키를 입에 넣었다.

    "……아저씨, 다리에 뭐 이상한 거 숨겨놨어요?"

    "그럴 리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래요? 무슨 사람이 돌덩이 같잖아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훌쩍거리는 소년의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고여 있었다.

    "네가 상대적으로 약해서 그런 거지."

    "안 약해요! 내가 얼마나 강한데!"

    "약해. 그것도 무척."

    "아니거든요!"

    아무런 타격 없는 얼굴로 덤덤히 품평을 내리는 카벨레누스에 미카엘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공격한 건 분명 자신인데, 왜 아픈 건 자신뿐인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이상한 거예요! 이 괴물!"

    날카롭게 소리친 미카엘의 외침에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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