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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56)화 (56/164)
  • 56화. 우리 엄마 좋아해요?

    2020.09.14.

    "미, 미카엘!"

    먼저 정신을 차린 알리시아가 다급히 달려가 미카엘을 등 뒤로 감췄다. 카벨레누스를 향한 시선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제가 사과할게요.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요. 애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알아."

    "……."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해칠 생각은 없어."

    의사를 말했음에도 그를 향한 시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게 다가려다가 바짝 긴장해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뒤로 물러섰고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떻게서든 자신의 시선에서 아이를 지우기 위해 발악하는 그녀의 몸짓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맹세해. 그대는 물론, 그대 아이에게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날 경계할 필요는 없어."

    카벨레누스는 그 자리에 선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알리시아는 그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집에 들어가 있어. 미카엘."

    "싫어. 난 엄마랑 있을 거야."

    "떼쓰지 말고."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안겨드는 미카엘을 밀어냈다. 미카엘은 한껏 우울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가 절 내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신, 엄마도 바로 와야 해."

    "응. 금방 갈게."

    알리시아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자 우울했던 아이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미카엘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서야 입을 뗐다.

    "그렇게 아이가 소중해?"

    "제 목숨보다 더요."

    망설임없는 대답과 함께, 일체 흔들림 없는 눈이 빛난다. 카벨레누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알리시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예전과는 달라'

    날것 그대로의 눈은 시간을 뛰어넘어 잘 연마되어 있었다. 사내는 변화의 순간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동시에 슬펐다. 그녀의 삶은 자신이 없어도 문제 없는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없어야만 그녀의 삶이 완성되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불순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절 밀어내는 작은 손을 차마 잡을 수 없었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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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엄마, 저 아저씨 오늘도 있어."

    "밖은 그만 보고 얼른 와서 밥 먹어."

    "하지만, 저 아저씨가 우리집 울타리 고치고 있는데……."

    "미카엘."

    "……알았어."

    미카엘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힘없이 소파에서 내려왔다. 엄마가 저런 얼굴을 할 때면 정말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저 아저씨는 오늘 돌아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알았지?"

    "그 말은 어제도 했잖아."

    "……."

    "그런데, 저 아저씨는 왜 자꾸 우리집에 와? 저 아저씨는 누군데?"

    수저를 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두 눈이 순진무구해서 괜히 목이 탔다. 미카엘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그립다고 말해본 적은 없었다.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든 아이는 어른처럼 굴 때가 많아 눈치껏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뻘의 사내가 지나갈 때면 자연스럽게 미카엘의 고개가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을 뿐이지, 아이는 항상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냥, 예전에 엄마가 알던 사람이야."

    "그럼 삼촌이잖아. 제임스 삼촌 같은 사람 아니야?"

    "아니야. 달라."

    "엄마가 저 아저씨를 싫어하니까?"

    "응. 싫어해."

    알리시아는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싫어할래."

    "……."

    "엄마의 적은 내 적이잖아. 나는 항상 엄마 편인 걸."

    칭찬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카엘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알리시아는 한참을 수저로 수프만 휘젓다가 결국 고개를 들었다.

    "……너무 싫어하진 마."

    "……."

    "엄마는 미카엘이 그 아저씨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미카엘은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는 수프의 김이 사라진 후에야 겨우 입을 뗐다.

    "엄마한테는 많은 의미가 있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리고?"

    "비밀."

    "비밀? 왜?"

    "그게 더 재미있잖아."

    알리시아는 웃으며 미카엘의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언젠간 작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모든 걸 이야기해줄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 아이는 아이답게, 그 나이에 맞게 눈치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제 품에서 안락하게 그저 웃는 날만 많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한 8년이었다. 알리시아는 두 팔을 뻗어 어린 아들을 꽉 끌어안았다. 부모가 되어본 건 처음이라서 모든 게 버겁고 어려웠다. 부모로서의 삶은 듣던 것처럼 숭고하지만은 않았고 지칠 대로 지쳐서 도망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버텼던 건, 보채는 아이가 원망스럽다가도 뒤돌면 웃어주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던 탓이었다. 자신만이 제 세상인 듯 안겨오는 온기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끝내 아이를 사랑하게 된 건 그 사소한 감정이 쌓이고, 쌓이면서 완연한 애정이 된 덕분이었다. 모든 것들보다 그 애정이 앞서게 되고서야 알리시아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지키고자 길가에서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함 없이 좋은 것들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애썼다.

    '내겐 미카엘뿐이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알리시아는 애써 아이의 심장 박동을 곱씹으며 두 팔에 힘을 줬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오롯이 저만 담아내는 눈동자를 본 순간 곧장 무너졌다. 예나, 지금이나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굳건한 의지를 흔들었다. 알리시아는 그 순간에도 바깥에 있을 카벨레누스에게 온신경이 닿아 있었다. 애당초 지난 8년을 버티게 했던 건, 아이의 얼굴에 남아 있는 사내의 흔적이었기에. * * *

    "그래서? 그 시커먼 아저씨는 누구래?"

    "나도 몰라. 엄마가 아무런 말도 안 해줬어."

    미카엘은 턱을 괸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엄마 말로는 엄청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했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가 옆집 아줌마랑 수다 떠는 거 몰래 들었어. 그 아저씨, 엄청 부자라고. 품에서 금화가 한 움큼씩 나온다고. 그래서 다들 그 아저씨가 촌장님 집 말고, 자기네집에서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랬어."

    "확실히 부자처럼 보이긴 했어. 그 아저씨가 입고 있던 옷이 진짜 부드러웠거든. 그렇게 부드러운 옷은 처음 만져봤어."

    미카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돌이켜보면 시커먼 사내는 옷뿐만 아니라, 차고 있던 장신구도 좋아 보였다.

    "너, 그 아저씨 옷도 만져봤어?"

    "나는 같이 말도 탔잖아."

    "으으, 그러고 보면 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안 무서웠어? 나는 그 아저씨 눈도 못 마주치겠던데.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솔직히 무섭진 않아. 다만……."

    "다만?"

    "엄마가 변한 것 같아서 싫어."

    요즘 들어 엄마 생각만 하면 한껏 우울해진다. 미카엘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숨을 토해냈다.

    "너희 엄마가 왜? 나는 너희 엄마 좋던데. 마을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잖아. 나는 아줌마가 구워준 피넛 쿠키가 제일 좋아."

    "그게 문제인 거지."

    미카엘은 거칠게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시커먼 아저씨가 온 날부터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나사가 빠진 인형처럼 멍하니 있는 날이 많아졌고 실수도 잦아졌다. 눈 감고도 구워내던 쿠키를 태워 먹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 뭐가?"

    "어린애는 몰라도 돼."

    "너도 나랑 같은 여섯 살이잖아."

    "아냐, 나는…… 아니. 됐어."

    미카엘은 또 한 번 한숨을 토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저씨를 싫어한다고만 생각했기에 그냥 아저씨가 미웠다. 엄마의 적은 자신에게도 적이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울었어.'

    고사리 같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어젯밤, 엄마는 자신이 가져온 브로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엄마는 잘 안 우는데.'

    엄마는 신기할 정도로 거의 울지 않았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것도 오직 자신이 아팠을 때뿐이었다.

    "……아저씨가 엄마를 빼앗아가면 어떡하지?"

    "응? 아저씨가 너희 엄마를 왜 빼앗아가?"

    우는 엄마를 달래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밤중에 남몰래 울음을 토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낯선 여자가 엄마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가짜 엄마 행세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랑 있으면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줌마가 아줌마가 아니면 누군데?"

    "……."

    "미카엘."

    "역시, 안 되겠어."

    미카엘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크리스가 재빨리 미카엘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결심한 소년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 * *

    "아저씨."

    "……."

    "아저씨!"

    "……."

    "내 말 안 들려요? 아저씨!"

    미카엘이 두 팔을 휘휘 저어가며 사내의 시선을 끌려고 애썼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무심한 사내는 도무지 고개를 돌려주는 법이 없었다.

    "아.저.씨."

    "……."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미카엘은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 엄마다!"

    "……."

    "거봐, 다 들리면서 모른 척한 거잖아요!"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돌아간 사내의 고개에 미카엘의 입술이 더욱 삐져나왔다. 사내는 그런 미카엘을 흘끔 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또 왜 나 무시해요!"

    "……."

    "나 좀 봐요!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요!"

    "……."

    "엄마!"

    "……."

    "봐! 또, 이럴 때만 고개 돌리고!"

    미카엘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내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쭉 주변을 살펴 알리시아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곧장 고개를 돌려 다시 창고를 고치는 일에 집중했다. 미카엘은 능숙하게 못을 박아내는 사내를 흘겨보다가 결국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가 아무리 판자를 덧대도 매해 기울어가는 창고는 사내의 손길에 어느샌가 신기할 정도로 그럴싸해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목수예요?"

    "……."

    "그 망치 안 무거워요? 나는 들지도 못하고, 엄마도 낑낑거리면서 드는데, 아저씨는 한 손으로도 거뜬하네요."

    "……네 아버지는 이런 건 안 해주는 모양이지?"

    "나는 아빠 같은 거 없, 아니. 아저씨 방금 말한 거예요? 방금 말한 거 맞죠?"

    미카엘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사내의 관심을 끌었다는 생각에 절로 박수가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지?"

    "와, 진짜네. 진짜 말했어."

    "꼬마야."

    "꼬마 아니고, 미카엘이에요. 미카엘 누스."

    미카엘은 한껏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사내의 시선이 절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네 이름따위가-."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

    "상대가 이름을 말하면, 자기도 이름을 말하는 게 예의라고 엄마가 그랬단 말이에요."

    "……카벨레누스."

    카벨레누스가 성가시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지만, 미카엘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카벨레누스 옆으로 붙는 소년의 행동에선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엿보였다.

    "그게 다예요? 성은요?"

    "폰 슈바르한 블랑셰."

    "폰 슈바…… 뭐라고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름은 유려한 발음과 잘 어울려 듣기 좋았지만, 막상 따라서 발음하려니까 자꾸만 혀가 꼬였다. 미카엘은 억지로 발음 하려다가 포기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저씨 이름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카벨레…… 으으 무슨 이름이 이렇게 길어요? 설마, 아저씨 나한테 이름 알려주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예요?"

    "네 마음대로 생각해. 그보다-."

    "역시, 거짓말이구나. 내가 발음 못 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었어."

    미카엘은 다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돌아와 이제는 대놓고 카벨레누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카벨레누스는 아이에게 경고를 할까 하다가 익숙한 색의 눈동자를 보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차갑게 굴기엔 아이는 많은 것이 알리시아를 닮아 있었다.

    "그럼 아저씨의 진짜 이름은 뭐예요?"

    "……."

    "설마, 또 나랑 말 안 하기로 한 거예요?"

    "……."

    "아저씨!"

    "네 어머니가 나와 있는 걸 보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럼 우리 엄마 때문에 나랑 말 안 하는 거예요?"

    미카엘이 어이없다는 투로 얼굴을 찡그렸지만 카벨레누스는 태연했다.

    "우리 엄마예요."

    "알아."

    "안다면서 왜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그렇게 신경 써요?"

    아저씨, 혹시 우리 엄마 좋아해요? 미카엘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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