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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55)화 (55/164)
  • 55화. 그대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2020.09.10.

    "이제와서요?"

    알리시아가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이제라도 하겠다는 거야."

    카벨레누스는 초조해져 좀 더 손에 힘을 줬다. 지옥 같던 순간은 지난 8년으로도 충분했다.

    "아뇨. 전하께선 그러실 수 없어요."

    8년 전의 그 아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으니까. 알리시아가 붉게 물든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노려봤다. 그는 이미 한 번 아이를 버렸다. 이제와서 부모의 권리를 주장할 순 없었다. 누가 뭐래도 미카엘은 온전히 제 아이일 뿐이었다.

    "……죽었다고?"

    "왜 놀라세요? 전하께서 바라셨던 바잖아요."

    "알리시아."

    "전하께서 죽이고 싶었던, 전하의 아이는 8년 전 죽었어요."

    알리시아는 이를 악 문 채, 카벨레누스의 손목을 쥐었다. 사내는 미카엘의 비밀을 몰랐고 미카엘은 또래보다 한참 작았다. 그 사실이 못내 감사했다.

    "말했잖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제게 남편이 있다고 해도요?"

    "……."

    "저, 지금 행복해요. 이제와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알리시아의 손이 무심히 카벨레누스를 밀어냈다. 카벨레누스는 절 밀어내는 손을 멍하니 보다가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웃고 있었다.

    "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전하를 그리워해본 적 없어요. 그러기엔 너무 행복한 삶이었는걸요."

    "……."

    "그만 돌아가세요. 8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분이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우습지 않나요."

    "……그대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

    "찾지 않은 게 아니야. 그럴 수 없었던 거지. 그대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아도 결국 나오는 건 그대가 죽었다는 사실뿐이라서."

    카벨레누스가 다급히 멀어지는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고왔던 작은 손은 어느덧,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대의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대를 이런 식으로 위하나보지?"

    "시골 아낙의 손이 다 그렇죠. 저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을 뿐이에요."

    부끄럽다 여겨본 적 없던 손이 사내의 앞에선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알리시아는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굴도 많이 상했고."

    "……."

    "옷도 많이 낡았군."

    "……."

    덤덤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알리시아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볕에 탄 얼굴도, 거칠어진 손도, 끝이 다 닳아버린 소맷자락도 전부 당연한 것들이었는데, 사내의 지적에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졌다. 사내의 앞에 서면 엄마가 아닌, 여자가 되었기에.

    "정말로 촌부의 모습 그대로야."

    "절 조롱하고 싶으신 거라면-."

    "그런데도 왜, 그대는 변함없이 내 시선을 앗아가는 건지."

    "……."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내가 없어도 행복했다고."

    카벨레누스는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꿈꿨던 재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 사내의 아이를 품은 여자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화가 났고, 또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온갖 감정이 치밀고 치미는 질투에 머릿속이 빙빙 돌아도 닿은 체온이 기꺼워서. 결국, 모든 감정들을 앞지르는 건 그녀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라서.

    "나는 아니야. 나는 지난 8년 간 단 한 번도 그대를 잊어본 적이 없었어.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 너무도 싫었어. 그대는 멈춰 있는데, 나는 나아가는 것 같은 그 기분이 너무도 끔찍했어."

    "……."

    "원하는 걸 말해.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

    그대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카벨레누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알리시아는 그 순간에도 제 손을 놓지 않는 사내를 보며 숨을 삼켰다.

    "……다 끝난 이야기예요."

    "끝나지 않았어."

    "고집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것으로 그대를 잡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아니. 할 거야."

    사내는 모순투성이었다. 우악스러웠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수도 없이 후회했어.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아무리 곱씹어봐도 떠오르는 게 그대의 미소가 아니라, 우는 얼굴이라서."

    "……."

    "날 믿을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머릿속으로는 수도 없이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떨리는 손이 애처로웠다. 물기 어린 눈이 안타까웠다. 눈부신 태양 같던 사내의 몰락에 가슴이 넝마쪽이 된 것처럼 괴로웠다. 괴로웠던 시간도 있었으나 행복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알리시아는 눈에 힘을 준 채,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럴 수 없어요."

    "왜?"

    "제 마음이 달라졌으니까요."

    "……."

    "전 더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뿐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렇다면 나를 이용해."

    카벨레누스가 다시금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이용이요?"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대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어. 어쩌면, 예전의 사건이 반복될지도 몰라."

    "……."

    "내가 그대를, 그리고 그대의 아이를 지킬게. 그럴 수 있게 해줘."

    "그런다고 해서 전하께 이득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대가 남잖아."

    "……."

    "그렇게라도 그대를 볼 수 있고, 옆에 있을 수 있는 거잖아. 나는 그거면 돼."

    카벨레누스가 그답지 않게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건 전하의 마음이지, 제 마음이 아닌 걸요. 애당초 저는 지금 전하의 진의마저 의심되는 걸요."

    "알리시아."

    "제 아이는 제가 지켜요.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 자리에 전하의 자리는 없어요."

    알리시아가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를 밀어냈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사내는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밀려났다.

    "가세요. 그리고, 그만 잊으세요."

    "잊으라고?"

    "네. 잊으세요. 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세요. 지난 8년 동안 잘 해오셨잖아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못 해. 그대가 빤히 살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럼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 편이 잊기 편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라도 전하와의 인연을 끊을 수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것도 없으니까요."

    알리시아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불구덩이를 삼킨 것 같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다시 시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젠 그녀에겐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전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텼던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저는 더는 그렇게 살 수 없고 그렇게 살 생각도 없어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아무리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간절하게 애원한다고 한들 그것은 순수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카벨레누스가 보일 반응은 뻔했다. 그는 잔인한 사내였다. 필요하다면 제 자식조차 죽일 수 있을 만큼.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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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떻게 하실 겁니다.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럴 리가."

    "그럼 강제로라도-."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평생 날 보지 않겠지."

    카벨레누스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화가 치밀었을 때에는 억지로라도 끌고 갈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악착같이 고개를 쳐들고 목소리 내는 여자를 보니 결국 할 수 없었다. 원망 어린 시선은 익숙했지만 그럼에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기만 해도 만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마주하니 욕심이 났다.

    '좋아해요.'

    그때, 그 애정 어린 눈빛이 그리워서.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손세수를 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곧은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가씨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뿐더러, 그 꼬마, 아니. 도련님께도 미움을 사버려서……."

    "먼저 떠나도록 해."

    "네?"

    "적들의 속내를 빤히 알면서 그녀를 두고 갈 순 없어. 내가 남을 테니, 먼저 슈바르한으로 돌아가 있도록 해."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카벨레누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설득하실 수 있으십니까?"

    "해야지."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빛났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낡디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 * *

    "……."

    "……."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친 익숙한 얼굴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여 방문객의 정체를 확인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한 카벨레누스가 서 있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집이 많이 낡은 것 같아서, 혹시라도 수리가 필요한 곳은 없나 해서."

    카벨레누스가 무심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돌아가시라고 했잖아요."

    "그대 없이 어떻게 돌아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저는 돌아가지 않아요."

    알리시아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카벨레누스를 스쳐 지나갔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알리시아에 맞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날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대가 다시 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게."

    "전하께선 바쁘신 분이잖아요."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대니까."

    카벨레누스가 불쑥 알리시아의 앞을 막아섰다. 알리시아는 짧게 한숨을 뱉고는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막아선 사내에 의해 그대로 앞이 막혔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제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비켜주세요."

    사내로 인해 때 아니게 드리워진 그늘에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는 슬쩍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났다.

    "힘쓰는 일이 필요하다면 날 부려먹으라는 뜻이었어."

    "제가 왜요?"

    "그대가 힘든 게 싫으니까."

    "지금껏 혼자서도 잘해왔어요. 이제 와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남편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아차,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카벨레누스의 입가에는 옅게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거짓말을 했군."

    "아니에요."

    "그럼?"

    "남편은 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우거든요."

    알리시아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턱끝을 추켜세웠다. 카벨레누스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알리시아의 표정만 가지곤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제 아이라면 가질 수 없는, 알리시아와 마찬가지로 적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어떤 사람이지?"

    "뭐가요."

    "그대의 남편."

    단어를 뱉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쓰게 느껴질 줄은 처음 알았다. 카벨레누스는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향한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겨우 괜찮은 변명을 꺼냈다.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라고?"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알리시아의 거친 손에 닿은 카벨레누스의 시선에는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시골 아낙 손들은 대부분 이렇다고. 그 사람이 딱히 잘못한 건 아니에요."

    사내의 앞에 내놓기에 멋쩍었던 손이지만 한 번 드러낸 덕분인지 처음처럼 부끄럽진 않았다. 애당초 카벨레누스의 앞만 아니었다면, 알리시아는 제 손을 부끄럽다 여길 일도 없었다. 고급 향유를 발라가며 정성껏 관리하던 시절처럼 부드럽진 않아도, 거칠어진 손 덕분에 지금의 미카엘이 있을 수 있었다. 남들이 못났다 말해도 거칠어진 손은 알리시아의 자랑이었다.

    "나라면-."

    "그런 가정은 할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잖아요."

    "……매정해졌군."

    "감정에 휘둘리는 나이는 지났거든요."

    알리시아는 좀 더 걸음을 빨리 했다. 카벨레누스와의 거리를 벌리고자 함이었지만, 정작 사내는 별 무리 없이 그녀를 따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오실 셈이세요?"

    "그대가 떠나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저희 아까부터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알아. 그러라고 하는 거야."

    "……."

    "그대도, 나도 고집이 있으니 누가 이기나 해볼 수밖에 없잖아."

    카벨레누스가 슬쩍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알리시아는 무슨 말이라도 쏘아붙이려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사내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리줘. 내가 들지."

    "……."

    "알리시아?"

    "……."

    "알리시아."

    빤히 절 부르는 사내를 알았지만 알리시아는 모른 척 삽을 챙겼다. 말로해서 안 된다면 모른 척 굴 수밖에 없었다.

    "날 모른 척할 셈인 건가."

    "……."

    "뭐, 좋아. 이것도 나쁘지 않지."

    어깨에 삽을 걸친 채,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알리시아는 빼앗긴 삽을 되찾기 위해 까치발까지 세웠지만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닿지 않았다.

    "괜한 짓은 그만하시고, 그만 돌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사과에 주변이 한 순간에 고요해졌다. 알리시아와 카벨레누스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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